그가 손 대면 '명작'...영화 <하나레이 베이>가 기대되는 이유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9.05.2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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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데.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이를테면, 뭐가?”

“다(Everything)...”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열차가 전주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올 무렵, 옥스포드에서 이른 점심을 먹던 친구가 이번 기사에 대한 기대를 담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친구는 충분히 설레어 할 만 했다. 목축으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월든 출신인 그가 도쿄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데릭 하트필드의 소설을 찾아보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알프레드 번바움이 번역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장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등장하는 그 작가가 가공의 인물임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가 도서관을 찾는 일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팬이 빨강머리 앤의 집에 가는 것과 같았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인 <하나레이 베이>의 프로듀서, 오가와 신지에 대해 친구가 호감을 갖는 이유는 그밖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오가와는 하루키 원작의 장편 상업영화 가운데 흥행 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상실의 시대>를 만들었다. “직업으로서 소설가”의 삶을 살기 전부터 고양이를 키웠고, 일상을 다룬 글의 곳곳에서 ‘장수 고양이’ 뮤즈가 등장하는 하루키처럼 오랜 세월 네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했던 애묘인(愛猫人)이기도 하다. 대표작인 <양지의 그녀>(※ 지난 3월 개봉)와 <구구는 고양이다>(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도 스토리의 중심에 고양이가 있다. 본인은 ‘우연’이라며 머쓱한 웃음을 짓지만.

설령 천만에 달하는 반려동물인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최소 제목 정도 들어보았을 작품으로 채워진 오가와의 필모그래피를 지나치기란 쉽지 않다. 2004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 후 개봉, 한국 관객에게 츠마부키 사토시와 우에노 주리를 알린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오다기리 죠에게 오히려 일본 이상의 인기를 경험하게 한 <메종 드 히미코>(전주국제영화제 초청작), 한때 “일본 여배우 = 아오이 유우”라는 등식을 성립시킨 <허니와 클로버><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에게 세 번에 걸친 한국 국제영화제 초청(부산국제영화제 2회, 전주국제영화제 1회)과 베를린영화제 국제비평가연맹상의 영예를 차례로 안긴 <핑크와 그레이><나라타주>, 그리고 <리버스 엣지>가 그의 손을 거쳤다.

약속 장소에 나타날 오가와를 기다리다 메모지에 단어 하나를 적었다.

“마에스트로(maestro)”

기획, 제작비 조달, 시나리오 개발, 감독 선정, 스태프ㆍ캐스트 구성, 공정관리 등을 진행하며 최종편집권을 쥐는 프로듀서를 ‘영화의 지휘자’로 바꿔 부른다면, 그에게 이 이상 어울리는 표현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하나레이 베이>의 프로듀서 오가와 신지. 그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후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는 많은 작품을 만들어온 마에스트로이자 젊은 영화인들의 다정한 멘토이다. 사진: (주)브리지헤드 제공

홍상현: 

이번 <하나레이 베이>의 전주국제영화제 초청 말고도 한국과 워낙 인연이 깊다.

오가와 신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한국을 찾은 게 15년 전이다. 그간 많은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 관객 여러분께서 제 작품을 가장 많이 봐주셨다. 기쁘고 감사하다. 저와 많은 작품을 함께한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도 매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다. 한국은 제게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 소중한 곳이다.

 

홍상현:

우선 ‘아스믹 에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과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로 상징되는, 즉, ‘작품성’과 '흥행성’이라는 두 개의 흐름이 합쳐지며 태어난 이 독립제작사에서 청춘을 바치며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는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오가와 신지:

원래 미국 비디오시장의 확대로 쏟아져 나오던 독립영화를 매입, 일본에 유통하는 일을 하던 회사다. 기존 대기업이 할리우드 메이저스튜디오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던 탓에 후발주자로서 블록버스터를 제외한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작품을 보는 눈을 기를 수 있었다. <유주얼 서스펙트><트레인스포팅><파고> 등의 작품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시장이 과열되어 외화 수입가가 급등하자 ‘차라리 우리가 제작을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 결과 기존의 독립제작사인 헤럴드 에이스를 합병하면서 회사 이름도 ‘아스믹’에서 ‘아스믹 에이스’로 바뀌었다.

 

홍상현:

그 일은 신문 경제면에 지겹도록 등장하는 ‘합병’ 정도의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대사건’이었다.

오가와 신지:

헤럴드 에이스는 데이비드 보위와 류이치 사카모토와 공연(共演)한 <전장의 크리스마스>,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란> 등을 제작했다. <란>이 작품성과 별개로 큰 적자를 본 탓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 합병된 거지. 그때가 제 프로듀서 인생의 시작이다.

 

홍상현:

좀 슬픈 일 아닌가? 영화학과 강의에서조차 수 없이 언급되는 세계영화사의 명작 때문에 제작사가 타격을 입다니.

오가와 신지:

어디나 비슷하겠지만 일본 영화계에서도 결국 '돈'의 문제가 핵심이다. 이는 일본에 저처럼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프로듀서가 드문 이유와도 관련된다. 기본적으로 제작예산을 마련하는 게 영화사거든. 혹은 비디오 유통사나 TV방송국, 가끔 출판사도 끼어들고. 순수한 의미의 ‘투자자’란 거의 없다.

 

홍상현:

"순수한 의미의 투자자"라면 펀드(fund)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 시스템에도 일장일단이 있지. 예컨대 우디 앨런의 코미디영화 <브로드웨이를 쏴라>에서도 제작비를 대던 갱스터가 영화 내용에까지 관여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그려지지 않나. (웃음)

오가와 신지:

일본 영화계의 경우 아직 투자자와 프로듀서의 역할이 분리되어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본의 프로듀서는 기본적으로 회사에 소속된 샐러리맨인 까닭에 회사의 이익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다만, 독립을 하면 일단 프로듀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는 만큼 다양한 시도가 가능해진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크리에이티브 능력도 요구되지만

 

홍상현:

1기 공채 사원으로 입사해 제작부문 총괄임원의 자리에까지 오른 당신이 2012년 돌연 독립하게 된 이유와도 연관되는가.

오가와 신지:

그렇다. 더 자유롭게 일하고 싶었다. <하나레이 베이>의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의 전작, <화장실의 피에타>를 예로 들면, 애초에 그를 만난 건 2011년이지만 회사 소속일 때는 제가 그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을 수 없었다. 규모가 너무 작아서. 하지만 독립프로듀서가 되면서부터 작은 작품은 독립영화 스타일로, 규모가 큰 것은 큰 것대로 제작할 수 있었다.

 

홍상현:

그래도 퇴사하자마자 우에노 주리와 마츠모토 준이 공연한 2013년 최대 흥행작 <양지의 그녀>를 제작하면서 ‘마에스트로’의 포지션을 각인시켰다.

오가와 신지:

그 두 사람이 합류해주지 않았으면 사라질 작품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우에노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시절부터 함께 해왔다. 마침 1년 정도 배우생활을 이어갈 의욕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직접 만나서 설득했고, <양지의 그녀>를 계기로 복귀했다.

 

홍상현:

<양지의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런 ‘실적’을 통해 독립프로듀서의 롤 모델이 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하나레이 베이>도 없었을 테니까.

오가와 신지:

제가 창업한 프로덕션인 브리지헤드는 기획이 주력분야다. 시나리오와 캐스팅을 기획해 영화사와 협업을 진행한다. 제 경우 캐스트 구성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다른 프로듀서보다 유리한 지점에 서있고. 신인을 과감히 기용해 성공시키는 사례를 통해 배우들과의 유대를 돈독히 해 온 결과다.

 

홍상현:

<하나레이 베이>는 당신이 제작한 두 번째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영화다. 첫 번째는 <그린 파파야 향기><씨클로> 등으로 국제적으로 활약하던 트란 안 홍 감독을 기용한 <상실의 시대>다. 촬영감독은 <화양연화>의 마크 리 핑빙, 음악감독은 데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조니 그린우드였던 다국적 프로덕션이었는데,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그럼에도 이후 8년간 하루키의 작품을 영화화한 프로듀서가 없었다.

오가와 신지:

<상실의 시대>는 15억 엔 정도의 수익을 올려 흥행 면에서도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좀 더 성공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있다. 하루키의 작품 아닌가. (웃음) 그는 기본적으로 장편소설 영화화를 잘 허락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1Q84』 출간 당시에도 <상실의 시대>가 영화화 된 것을 기억하는 많은 프로듀서가 제안을 했지만 죄다 거절당했다. 단편소설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편인데 영화화가 쉽지 않은 탓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홍상현:

1981년 이후 네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지만 필자 개인적으로 당신 이상의 전문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이 <버닝>의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associate producer)로 당신을 세운 이유도 그 때문 아닐까.

오가와 신지:

<버닝>에 대한 칸국제영화제에서의 평가가 좋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저 자신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물론 예술영화라 흥행에서는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예술영화 시장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건 영화제에 입상하는 작품을 만드는 필름메이커들의 공통적 인식이기도 하다.

<하나레이 베이>의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 데뷔 이후 발표한 아홉 편의 작품 중 여덟 편이 한국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그는, <버닝>의 일본 개봉 당시 있었던 이창동 감독과의 대담에서 시종일관 깊은 존경의 마음을 표했다. 실제로 가장 큰 영향을 준 감독으로 주저 없이 이창동을 꼽는다.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제공

홍상현: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도 발표하는 작품마다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정도로 재능이 있지만, 흥행 면에서는 다소 불안해 보일 수 있는 연출자였다. 그런데 각본까지 맡기는 ‘파격인사’를 단행했다.

오가와 신지:

<화장실의 피에타>를 연출했지만 상업영화를 만드는 이들의 기준에서는 신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커리어가 신경 쓰였던 건 사실이다. 해외에서 주로 촬영이 이루어져야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주고 싶었다. 경험 없이는 성장도 할 수 없으니까. 원작이 단편소설이라 부가적으로 스토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3고가 나올 때까지 시나리오 개발이 순탄치는 않았다. 사흘간 합숙하면서 같이 집필한 결과 이야기가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홍상현:

<어느 가족>의 촬영감독인 콘도 류토를 기용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오가와 신지:

제가 프로듀스 한 2007년 작,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이 그의 상업영화 데뷔작이다. 마츠나가와는 데뷔작인 <피유피루 2001-2008>를 연출하기 전부터 친구사이고. 그래서 <하나레이 베이>의 촬영감독은 그 밖에 없다는 데 쉽게 의견이 모아졌다. 제작진을 구성하면서 가장 먼저 결정된 사안이다.

 

홍상현:

당신이 입안하는 기획은 캐스팅 면에서 중요한 특징이 있다. 훌륭한 연기자를 기용하지만, 기존에 대중에게 알려져 있던 것과 다른 매력을 이끌어낸다. <양지의 그녀> 이후 <하나레이 베이>까지 계속되는 패턴이다.

오가와 신지:

사람들에게 어필된 이미지와 실제로 연기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저는 이것을 부각시키는 게 오히려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할 수 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예컨대 마츠모토 준의 경우도 이누도 잇신 감독의 <황색 눈물>의 한 장면에서 평소 캐릭터와 달리 무척 성실하고 수더분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는 제가 그를 <양지의 그녀>에 출연시키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나라타주>에서는 슬슬 성인 캐릭터로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에서 판에 박힌 미남자의 전형적 이미지를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유키사다 감독에게 그의 캐스팅을 제안했다.

요시다 요의 <하나레이 베이>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그는 연륜에 따른 안정적인 연기력을 가졌으며 테크닉도 뛰어나다. 하지만 마츠나가 감독과 저는 다른 면을 원했다. 좀 더 ‘날 것(raw)’인, 실제의 본인과 구별되지 않는 느낌을 영화적으로 담아내려 했다.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과 오가와 신지 프로듀서는 <하나레이 베이>를 통해 요시다 요의 좀 더 ‘날 것(raw)’인, 실제의 본인과 구별되지 않는 느낌을 영화적으로 담아내려 했다. 사진: ㈜디오시네마 제공.
주인공(사치)의 아들 ‘타카시’로 분한 사노 레오. 그의 소속사는 심플한 스토리의 아트필름인 <하나레이 베이>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을 당시, 메인제작사로 나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제공
<소년, 소녀 그리고 바다>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후 <두 번째 여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너>,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을 통해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무라카미 니지로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도 <하나레이 베이>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제공

 

홍상현:

<하나레이 베이>에서 로케지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아름다운 경치가 역설적으로 슬픔의 정서를 극대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오가와 신지:

로케는 정말 미지의 영역이었다. 막상 현지에 가보니 상황이 생각한 것과 많이 다르더라.

우리가 추구한 것은 산사를 찾았을 때의 느낌처럼 ‘주변과 확연히 달라지는 공기’였다. 하나레이 베이는 계속 날씨가 흐렸고, 산 위에서는 비까지 내렸다. ‘이런 신비한 분위기는 여기서가 아니라면 담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현지 프로듀서는 와이키키에서 하나레이 베이의 외견을 찍는 게 경제적이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감독도 촬영감독도 “하나레이 베이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풍경을 담아내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스태프의 수를 줄이고 촬영을 진행했다.

 

홍상현:

보통 다른 연기자와 따로 노는 느낌일 때가 많은 외국인 캐스트도 <하나레이 베이>에서는 대단히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오가와 신지:

대부분이 신인ㆍ비전문가다. 일단 프로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실시했는데 마땅한 배우를 찾기 쉽지 않았다. 결국 아마추어까지 응모대상을 확대했더니 역시나 대부분 연기 경험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지더라.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실제로도 영화에서와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른바 ‘길거리 캐스팅’이 긍정적인 성과를 거둔 예다. 리얼리티의 힘이라고 할까. 신인ㆍ비전문가와 프로가 자연스레 뒤섞이면서 시너지효과를 냈다.

하와이 현지 프로듀서는 “와이키키에서 하나레이 베이의 외견을 찍는 게 경제적일 것”이라고 했지만 마츠나가 다이시 감독과 콘도 류토 촬영감독은 “하나레이 베이가 아니면 찍을 수 없는 풍경을 담아내겠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하나레이 베이>의 미장센은 그들의 ‘작가정신’의 결과다. 사진: (주)디오시네마 제공

“오늘 GV 때문에 한 차례 다시 보게 되면서 재차 실감했습니다만, <하나레이 베이>는 역시 큰 스크린으로 보는 게 좋습니다. 부디 영화관에 걸음 하셔서 관람해주시면 좋겠어요. 스토리도 그렇지만 주연을 맡은 요시다 요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작품에 몰입할 수 있으실 겁니다. 아울러 하와이에서 담아낸 ‘자연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라고요. ‘본다’기보다 ‘느낀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6월 6일로 예정된 <하나레이 베이> 개봉과 관련, 한국 관객에게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함이 배어나오는 어조로 메시지를 전하고, “하정우강동원송강호와 <박하사탕>(※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한국영화다)의 설경구를 좋아하고, 저와 비슷한 60년대에 태어난 세대인 봉준호 감독에게도 친근감을 느낀다”면서 한국 영화인들에 대한 코멘트를 이어가던 오가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마지막으로 ‘젊은 세대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하긴, ‘한층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강조하며 ‘젊은 피’에게 하루키 원작의 영화화 프로젝트를 맡기는 과단성을 보여준 그였다.

필자의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때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찾은 오가와와 인사할 기회를 놓친 것은, 소탈하고 다정한 멘토의 모습으로 매순간 젊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던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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