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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사민당 집권 후 '빈'이 변했다? 120년전 보수정당이 '공공복지' 시작박원순 시장이 언급한 오스트리아 빈 '복지 시정'의 역사

지난 5월 19일, 연합뉴스에서는 <박원순 "정권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완전히 다른 세상 될 것">이란 제목의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생각하는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현재의 민주당 정권이 계속 집권해야 한다는 박원순 시장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정치인이 자기가 속한 당의 장기집권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 당이 지금보다 더 좋은 미래를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기사를 보는 필자의 시야에 들어온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었다.

박 시장은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 오스트리아 빈은 시민이 집 걱정을 하지 않도록 전체 주택의 40%가 공공임대주택"이라며 "빈 시장에게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한지 물었더니 1944년 빈이 독일로부터 해방된 이후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놓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발언의 취지는 이해를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관련된 사실관계가 틀렸다.

첫째, 빈이 독일로부터 해방된 날이 틀렸다.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Anschluss, 안슐루스)을 거쳐 나치 독일에 합쳐진 오스트리아는 1945년 5월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그중에서 빈을 방어하던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한 때는 1944년이 아니라 1945년 4월 13일이었다.

둘째, 위 문구는 아주 옛날부터 1944년까지 계속된 권위주의 세력의 집권 이후에야 비로소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 실상을 확인해 보면, 빈이 실질적으로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시행해온 세월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1897년 기독교사회당 '칼 루에거' 취임 후 본격 변화

빈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도로서 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1282년에 첫 시장 콘라트 폴(Konrad Poll)이 취임한 이래, 현임 시장 미하일 루드비히(Michael Ludwig)에 이르기까지 총 236명이나 되는 시장이 있었다.

그중에 시민의 삶을 중시하는 복지 중심 시정의 문을 연 시장은 누구일까? 위 기사가 주는 뉘앙스에 주목하면 1944년 혹은 1945년에 독일군을 몰아낸 뒤에 취임한 사회민주당 소속의 누군가일 것이다. 하지만 그 추리는 틀렸다. 시민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던 첫 시장은 1897년 취임하여 1910년 사망할 때까지 13년이나 빈 시장으로 재직했던 칼 루에거였다.

<사진1> 칼 루에거(Karl Lueger, 1844~1910)

칼 루에거는 빈에서 태어난 서민 출신의 변호사였다.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에서도 빈부격차가 벌어지자 이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계에 진출하여 1875년에는 시의원이 되었고, 1885년에는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891년에는 기독교사회당을 창당했다. ‘사회’라는 글자는 들어가지만 사회주의와는 별로 연관이 없고, 반개신교적인 보수적 가톨릭주의를 기반으로 했다.

하지만 보수주의적이라고 해서 늘 기득권의 편에 서는 것은 아니다. 루에거는 당시 경제적 주도권을 쥔 로스차일드와 같은 유대계 재벌들을 공격했으며, 이는 반유대주의적이긴 했으나 중하층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낸 것은 사실이었다. 기독교사회당은 전국적으로는 군소정당에 불과했지만 루에거의 인기 덕에 1895년 빈 시장 선거에서 이겼다. 대학생 때 ‘운동권’이었던 루에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임명을 거절하는 바람에 바로 시장에 취임하지는 못하고 부시장이 되었지만, 그 뒤로 2번이나 더 당선되자 황제도 결국 승인했다.

1897년부터 시장으로서 일하기 시작한 루에거는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진력했다. 가스, 상하수도, 전기, 도로 확장 등 공공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했으며 노면전철도 운행했다.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시에서 운영하여 시민들이 이용에 부담을 받지 않게 했다. 시공되지는 않았지만, 지하철까지 놓으려고 계획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공원을 크게 넓혀서 정원이 없는 서민들도 자연의 여유를 느낄 수 있게 했으며, 가난한 시민들에 대한 구제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반유대주의를 내세워 유권자에게 인기를 얻었으면서도 가난한 유대인들을 구제하는 일에는 서슴없이 나섰다. 루에거의 시정 덕분에 시민들의 삶은 눈에 띄게 개선되었으며, 시민들은 루에거를 ‘빈의 신’이라고 부르고 그에 대한 지지를 ‘루에거 숭배’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런 지지에 힘입어 루에거는 4차례에 걸쳐 시장에 당선되었고, 재직 중에 사망했을 때는 수십만 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찾아왔다. 그의 시장 취임을 반대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조차 추도사에서 ‘빈의 수호자’라고 루에거를 지칭하며 깊은 애도를 표했을 정도였다.

칼 루에거가 남긴 위업은 지금도 빈에 남아 있다. 루에거를 기리는 기념상과 이 상이 있는 ‘칼 루에거 박사 광장’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루에거가 시장 재임 시 지었으며 묻히기도 한 교회는 ‘칼 루에거 박사 기념교회’라고 불린다. 칼 루에거의 이름을 붙인 도로도 있었지만, 2012년에 이름이 바뀌었다.

<사진2> 칼 루에거 박사 광장(Dr. Karl Lueger Platz)
<사진3> 칼 루에거 박사 기념교회 (Dr. Karl Lueger Ged&#228;chtniskirche)

루에거 이후 1919년부터 '붉은 빈'의 시작

루에거 사후, 그의 자리를 이은 시장 2명은 모두 기독교사회당이었다. 이들은 루에거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받았으나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 수행과 이에 따른 시민 생활의 유지가 더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전쟁은 1918년에 끝났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국이 되었고 정치체제는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시장 선거가 보통선거로 바뀌고서 시행된 1919년의 첫 시장 선거에서 기독교사회당 소속인 리하르트 바이스키르히너(Richard Weiskirchner) 전 시장은 낙선하고, 보다 진보적인 사회민주노동당(지금의 사회민주당)에서 시장직을 얻는다. 일명 ‘붉은 빈(Roten Wien)’으로 불리는 시기의 시작이다.

사회민주당 소속 야콥 로이만, 칼 자이츠 두 시장이 가진 정치성향은 전임자들과 달랐지만, 시민의 삶을 향상한다는 점을 시정 목표로 두었다는 점은 같았다. 이 시기에 사회민주당에서 중점을 둔 시 정책 중 하나가 기사에서 박원순 시장이 찬양한 공공임대주택 건설이다.

<사진4> 야콥 로이만(Jakob Reumann, 1919~1923)
<사진5> 칼 자이츠(Karl Seitz, 1923~1934). 오스트리아 첫 대통령(1919~1920)이기도 하다.

당시 빈에는 주택 공급이 크게 부족했다. 전쟁으로 인한 하이퍼인플레이션에다 제국 말기에 가속화된 빈으로의 인구 집중, 제정 시기인 1917년부터 시행된 세입자 보호법(임대료를 전쟁 전인 1914년 수준으로 제한한다) 등이 원인이었다.

사회민주당은 이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25년에서 1934년에 거쳐 대량의 공공주택 공급을 시행했다. 6만 가구에 달하는 이 공공주택들은 주택 건설을 위한 특별세와 사치품에 붙는 세금에다 정부 출자로 건설되었다. 민간이 운영하는 임대주택은 임대료가 일반 근로자 소득의 30%에 달하는 데 반해 4%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임대료도 낮았다. 게다가 세입자가 질병에 걸리거나 실직하면 임대료 지불이 유예되었다.

<사진6> 사회민주당 정부가 건설한 공공주택 중 하나인 칼 마르크스 호프(Karl Marx-Hof)

시 정부가 제공한 복지는 주택정책에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헐벗은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아이가 있는 가정에 의류수당을 지급했고,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을 방지하고 아이들이 길거리를 떠돌지 않도록 다수의 유치원과 탁아소, 아동용 목욕장을 개원했다.

의료비는 무료였고 공중목욕탕과 스포츠 시설을 정비해서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칼 루에거 재임기에 공영화된 가스, 전기, 쓰레기 처리 등의 공공시설은 사회민주당 시기에도 여전히 시가 직접 운영했다. 당시 시의원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겼다.

“젊은이들을 위해 투자하면 감옥에 돈을 덜 들여도 되고, 임산부와 신생아 관리에 투자하면 정신병원에 돈을 덜 들여도 된다.”

사회민주당이 시를 운영하면서 이런 공공정책에 지출한 재정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사용하던 비용의 3배였다. 덕분에 신생아 사망률은 오스트리아 전체 평균보다 낮았고, 시민들의 결핵 감염률은 절반 이하였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오스트리아 연방법에 따른 기본적인 세입에 더해 지방자치단체에서 독자적으로 부과하는 세금에서 나왔다. 승마용 말, 고급 대형 승용차, 집에 두는 하인, 호텔 방 등의 사치품에 붙는 사치세와 소득에 따라 누진세로 부과하는 주택 건설을 위한 특별세가 주 재원이었다.

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공공투자를 집행하고, 그 유지에도 비용을 들이니 빈에서는 실업률도 전국 평균보다 낮았다. 채권을 발행하지 않고 전액 자체재정으로 재원을 조달하니 빚 상환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서 오스트리아에서도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자 사회민주당이 장악한 빈을 재정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면서 복지에 중점을 둔 공공정책은 그 혜택이 줄어들게 된다.

빈의 공공복지, 파시즘 때문에 11년간 퇴보

1932년에 정권을 잡은 기독교사회당의 엥겔베르트 돌푸스 총리는 대공황으로 인한 혼란을 독재정치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 일환으로 공산당과 나치당의 활동을 금지했고, 1934년에는 심지어 사회민주당까지 불법화하려고 했다.

이는 당연히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양측이 폭력으로 충돌하자 정부군 및 우익단체와 노동자들이 빈을 무대로 시가전을 벌였고, 돌푸스는 이를 빌미로 시장 칼 자이츠를 체포하고 자기 정부의 부총리였던 리하르트 슈미츠를 시장으로 임명한다. 이때의 기독교사회당은 칼 루에거 시절과 달리 완전히 극우화된 파시즘 정당이었고, 1933년부터는 그 이름까지 조국전선(Vaterländische Front)이라고 개칭한 상태였다.

사회민주당 시절의 복지정책이 새 시장 밑에서도 계속될 리는 없었다. 그나마 4년이 지난 뒤에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다. 이후 7년 동안 나치당 소속인 3명의 시장이 빈을 다스렸고, 전쟁 탓도 있어서 시정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연합군은 빈을 폭격했고 전쟁 말에는 쳐들어온 소련군과 수비하는 독일군이 열흘에 걸쳐 시가전을 벌여 도시를 파괴했다.

해방 후 사민당 시장이 평균 10년 재임

나치가 임명한 마지막 시장은 전투 중에 쫓겨났다. 시를 점령한 소련군이 처음에 새로 세운 배관공 출신의 무소속 시장은 단 3일 만에 물러나고, 테오도르 쾨르너가 빈 시장에 취임한다. 쾨르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참모총장 출신이자, 돌푸스가 사회민주당을 불법화하기 전에 연방의회 의장까지 지낸 바 있는 유력 정치인이었다.

쾨르너는 6년 동안 빈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공습과 시가전으로 파괸된 빈을 재건했다. 그 업적을 바탕으로 1951년에는 오스트리아 공화국 대통령에 출마, 51%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6년간 재임하였다.

쾨르너 이후에 취임한 빈 시장은 7명이고, 이들 모두 사회민주당이다. 이들 8명이 시장으로 재직한 기간을 합치면 74년으로 1인당 평균 재임 기간은 9년 3개월이다. 다만 현임인 미하일 루드비히 시장이 작년 5월 24일에 취임, 이제 고작 취임 1주년을 채운 상황이므로 이를 제외하면 나머지 7명의 평균 재임 기간은 10년 4개월이다.

모든 결과에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다

박원순 시장이 기사에서 언급했듯이 정책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장기집권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 사례를 관찰하되 그 일부만 파악하고,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재 빈이 이룩한 공공복지는 “1944년 이후 사회민주당이 계속 집권해서” 이룬 게 아니다. 사회민주당 출신이 아니었던 보수주의자 칼 루에거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그 후임자들이 이어받았으며, 그 씨앗 위에 사회민주당 출신 시장들이 물과 비료를 주어 가꾼 결과가 지금의 복지다. 중간에 오스트리아가 우경화되면서 잠시 멈춘 시기가 있기는 했으나, 그 사실만으로 그 이전에 40여 년간 이룬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덤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본문에서도 조금 언급했지만 현재 빈 시장직을 차지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Österreichs)’은 계속 ‘사회민주당’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전인 칼 자이츠 시장 시대까지는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자당(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 Österreichs)’이었고, 돌푸스에 의해 불법화되었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 재건했을 때는 ‘오스트리아 사회당(Sozialistische Partei Österreichs)’이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을 정식으로 쓰기 시작한 건 1984년에 취임한 헬무트 질크(Helmut Zilk, 1984~1994) 시장이 재임하던 1991년부터다.

임영대 팩트체커  steinhof@naver.com  최근글보기
역사작가다. 역사를 주된 주제로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는 둥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전쟁 전략, 전술, 무기>, <서프라이즈 세계 역사 미스터리> 등의 역사 교양서와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 등의 소설을 썼다.

임영대 팩트체커  steinho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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