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연정 구상은 '민주정치의 교재'다

  • 기자명 김수민
  • 기사승인 2019.05.23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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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이라크 파병, 대북송금특검, 대연정, 한미FTA'를 묶어서 이야기한다.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했다"는 비판도, "진보 대통령이 진보 정책만 할 수 없다"는 옹호도 모두 그러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대연정'은 따로 떼어놓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연정은 연정론의 일각이었다. 노무현의 연정론은 일시적인 정치권 흔들기가 아니다. 성숙하고 진일보한 구상이었다. 

대통령이 애초 예상된 방향을 거스르는 것이 1987년체제 이후 정권의 특징이었다. KAL기 폭파로 인한 대북공포 속에서 세워진 노태우 정부는 남북교류의 물꼬를 텄고, 신군부 후예의 지원 속에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신군부세력을 척결했다. 대선 후보 시절 정리해고제를 반대한 김대중 정부는 노동시장유연성을 받아들였고, 반미주의자라고 소문났던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전쟁에 한국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네 정부는 국민의 폭넓은 존중과 넉넉한 지반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는 여소야대 총선 결과를 정계개편으로 뒤집는 패권주의로 오히려 강고한 반대층을 만들어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거듭된 승부수를 거쳐 권력을 교체했지만 제1야당의 틀어대기식 반대에 부딪혔다. 물론 노태우-김대중 정부의 제1야당도 무조건적 반대를 한 적이 있었을 것이며, 김대중-노무현 정부도 패권주의적 측면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헌법 위에 이분법이 군림하던 것이 한국 정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외줄정치 끝에 내몰렸다. 제1야당이 좋아하는 굵직한 정책을 고비고비마다 구사하면서도 제1야당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 그는 그런 상황을 일찍이 내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한나라당의 행태를 보며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분개했다. 또한 그의 저작을 읽다보면, 자신이 야당이나 소수파이던 시절 야박하게 굴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구절이 나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는 1987년 이후 당시까지의 대통령 가운데 권력기반이 가장 약했다.

2005년 연정론은 2003년 국회중심론에서 나왔다

그는 대통령에게 걸린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권력을 나누는 데서 찾았다. 2003년 4월 2일, 첫 국회 연설에서 그는 "특정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2/3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하는 선거법 개정을 주문한다. 이것은 지역구도를 혁파하려는 제안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어 이러한 제안이 2004년 총선에서 현실화된다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정당 또는 정치연합에게 내각의 구성권한을 이양하겠다"는, 책임총리제 내지 이원정부제를 약속한다. 

대통령이든 국민이든 한국사회에서는 대통령이 국정을 주도하고 국회는 승인 여부를 가린다는 착각이 만연하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강력한 권력이나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일수록 그 착각은 더 깊었다. 노무현은 그런 대통령들의 시대에서 나온 첫 대통령이었다. 약자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더 잘 이해하는 경우는 숱하다. 그는 의회권력이 정치의 중심임을 직시했고, 의회권력을 공식화ㆍ본격화하는 데 자신에게 주어진 대통령권력을 사용하고자 했다.

첫 국회 연설이 있었던 2003년 4월부터 대연정 제안이 나온 2005년 6월까지, 노무현의 권력관은 그리 달라진 것이 없다. 국면과 시세에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처음 제3당에 불과했던 집권세력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과반을 넘겼다. 물론 변함없는 것도 있었다. 여당과 야당과 국회 모두는 대통령을 뒤따르거나 비토하는 것이 주된 행위였다. 그러다 2005년 4.30 재보선을 거치며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이 무너졌다. 그러면서 노무현의 구상은 다시 급물살을 탔다. 그에게 여소야대는 대통령의 위기가 아니라 '대통령중심'이라는 쇼를 폐막시키는 호기였다.

순서를 정확히 기억해야 한다. 소연정 구상이 먼저였다. 새천년민주당 또는 민주노동당과 손을 잡으면 과반 의석을 살짝 넘긴 국회 다수파가 나올 수 있었다. 허나 논의할 준비가 된 세력이 없었다. 민주당 일각에서 논의해볼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당 흔들기'라는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성이 퇴색하고 있다고 보며 노동 이슈에서 특히 각을 세우던 민주노동당도 펄쩍 뛰었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나 선거제 개혁 등 몇 가지 정책조건을 고리로 논의해볼 수 있다고 응수한 노회찬 의원 정도가 예외적 극소수였다. 노무현 역시 작은 정당을 끌어들이기도 결코 만만치 않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다. 

"옆사람과 건배하면 소연정, 맞은편 사람과 건배하면 대연정." 

당시 그가 간명히 요약했다는 연정론이다. 옆사람들이 잔을 채우지 못하자 그는 맞은편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지층 상당수가 싫어하고 반대층이 좋아할 정책들을 들어줘봤자 존중받지 못했던 그는, 권력을 나눠줘서 반대로 돌기 바쁜 제1야당을 아예 공동여당으로 만들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시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다.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악수하는 노무현 대통령.

합동의총을 상상하며 '선거제 개혁'을 꿈꾸다

대연정 제안이 흔히 받는 오해는 그것이 몰이념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반대층의 정책기조를 알아서 받는 것보다 양측이 합의해서 국정을 운영하는 편이 어째서 더 몰이념적인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대연정 제안은 큰 함의를 몇 가지 더 품고 있었다. 노무현은 당시 열린우리당 대 한나라당의 대결구도가 여전히 이념이나 정책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고 보았다. 그는 대연정을 한 이후 양당이 합동의원총회를 여는 과정에서, 이념에 따른 재편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어떤 열린우리당 의원과 어떤 한나라당 의원이 같은 의견을 펴면서 다른 열린우리당 의원과 다른 한나라당 의원과 대결하다 보면 끝내 소속 이동이 일어난다는 상상이다. 

또 그의 대연정 구상은 최근 들어 다시 주목받듯 '선거제 개혁'과 동전의 앞뒷면을 이루고 있었다. 앞서 인용한 2003년 4월 연설에도 선거제 개혁이 나온다. 그가 선거제 개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연유는 그의 정치궤적을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노무현은 1990년대 초반 3당합당 후부터 야권통합 전까지, 1995년 김대중 정계복귀 이후 1997년 정권교체 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소수정당 생활을 해봤다. 통일민주당 초선 의원 시절에는 민주화가 진척되고 정권이 교체되면 진보정당으로 가겠다는 소신을 갖기도 했다.  

그는 양당체제의 현실을 인정하고 거대정당에 들어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자신이 겪은 정치인생을 후대에 물려주기를 원치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정권을 교체해도 여소야대면 힘들었고, 여대야소로 패권을 쥐어도 그것은 오래가지 않거나 혹은 내부 분열로 흔들렸다. 정치인은 그런 가운데서 지지층의 염원과 자신의 소신을 올곧게 구현하지도 못했다. 역대 대통령이 모두 겪은 것을 그도 겪고 있었다. 여러 정당이 의석을 나눠가지며 제각각 고집있는 소수파로 자리잡고, 그 소수파들이 아집을 버리는 연합으로 다수파를 이뤄가는 것만이 출로였다. 그 키는 선거제도가 쥐고 있었다. 그는 소선거구를 중대선거구로 바꾸거나 지지율과 의석간의 비례성을 높이는 선거제 개혁론을 늘 견지했다. 

그러나 선거제 개혁은 몹시 절실하다 해도 이루기는 그 이상으로 어려웠다. 그리하여 그 반대파인 한나라당에게 반대급부를 주고자 마련한 것이 대연정 구상이기도 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얼마간 옳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국회를 파행시킬 수는 있고 개헌을 저지할 만큼은 되는 한나라당의 의석수를, 그런 의석수와 그런 국회를 만든 시민들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대통령이나 그 지지층이 마음 먹은 대로 되는 것이 귀한 정치 현실에서, 한나라당에게 권력을 갈라주기란 투항이 아닌 것은 물론 특별한 타협도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 '양보'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은 되치기조차도 구사하지 못한 채 거절과 묵살로 문제제기를 넘겨버렸다. 선거제 개혁 등에 응할 생각이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정부여당에 대한 반감만 착실히 모아도 정권탈환이 가능한 현실에 편승하기 바빴을 뿐, 권력도 책임도 같이 지는 상황은 상상할 수 없었다. 

연정 구상이 수포로 돌아간 다음 노무현은 '국회 다수파의 정부' 대신 '열린우리당 정부'라도 만들기를 바랐다. 2004년 총선 이후 이미 중진 의원들을 내각 주요 포스트에 포진시킨 노무현 정부였다. 노무현은 여당 대표를 국무총리로 임명할 구상을 한다. 그러나 여당 역시 의회와 정당이 앞장서는 정부 운영을 대비하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그때는 여당이 대통령과 거리를 두기 바쁜 집권 후반기였다. 

유튜브 화면 캡처

'끊임없는 정치개혁 시도' 노무현이 남긴 교훈

혹자는 노무현이 결국은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임기 후반 그는 '4년 중임 정부통령제 개헌'을 제안한다. 2003년의 국회 추천 책임총리제 제안과 결이 매우 달라 보이는 미국식 대통령제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진단이 간과한 것이 있다. 노무현의 마지막 개헌 제안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재임 시기를 일치시키는 방안이었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또는 매우 작은 시간차를 두고 실시하면 대통령 소속 당파와 국회 다수파가 서로 엇갈릴 확률은 극소하다. 이는 의원내각제와 동일한 측면이기도 하다. 오히려 미국식 대통령제는 하원의원 임기와 대통령 임기를 교차시키고 있다.

이러한 노무현의 개헌 구상도 실패했다. 절대 다수의 힐난과 핀잔을 받고 거꾸로 정권의 위기를 앞당기기도 했다. "단임 대통령은 역사와 대화하려는 습성이 있다"는 평가가 냉소에 섞여 나오기도 했다. 1987년체제의 막내를 자임하면서 출가를 시도한 노무현은 그렇게 문턱에서 대통령직 수행을 맺었다. 

그의 후임 대통령은 1987년체제의 법칙과 계율마저 깨버렸다. 그들에게는 얼마간의 권력을 나눌 배포도 구상도 없었거니와, 그들 정부에서는 노태우- 김영삼 정부에서 일어났던 '진보'를 찾기 힘들었다. 집권 직후 맞이한 총선에서 손쉽게 여대야소를 이룬 이명박은 미국산 쇠고기 개방과 한반도 대운하를 밀어붙이다 1987년보다 더 큰 대중항쟁에 맞닥뜨렸다. 이미 여대야소를 다시 굳히고 나서 대선마저 1987년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로 승리한 박근혜는 일관되게 반대층을 배제하는 정치에 빠져들다 파면당했다.  

이분법과 패권주의는 어쨌거나 파멸한다는 법칙이 아로새겨졌고, 노무현 구상의 일단인 선거제 개혁은 적어도 표결대상에는 이르렀다. 노무현을 '스승'으로 여길지 말지는 시민과 정치인 각자의 몫이다. 다만 그는, 그를 스승으로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교재'로 남았다.

[참고문헌]
노무현재단 엮음(유시민 정리), <운명이다>, 돌베개, 2010.
윤태영, <바보, 산을 옮기다>, 문학동네, 2015.
노무현, <진보의 미래: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동녘,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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