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같이' 친일파 스티븐스 사살? 사실은 공모한 사이였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5.2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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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환의 역사 팩트체크] 전명운·장인환의 '스티븐스 사살 사건' 전모 ①

2018년 6월 3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그날의 암살자’란 제목으로 1908년 3월 23일 한국의 애국청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사건을 소개했다. 

스티븐스 암살을 위해 뒤를 쫓던 장인환은 페리선착장까지 찾아가게 되었고, 총을 꺼내 스티븐스를 저격하려는 순간 스티븐스를 저격하려는 전명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하지만 전명운이 암살에 실패하자 총알 세 발을 발사해 스티븐스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병원으로 이송된 스티븐스는 수술을 받았지만, 이틀 후 사망했다. 재판정에서 전명운과 장인환은 조국을 위해 스티븐스를 반드시 암살해야 했다면서 자신들의 범행을 당당히 밝혔다. 이에 감동한 미국 교민들은 둘을 변호하기 위해 현재 화폐로 3억이 넘는 돈을 모금했다.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 장인환은 25년형을 받았다. 현장을 목격한 한 미국 여성은 인터뷰에서 전과 장의 애국정신을 찬양했고, 이후 일부 언론에서는 일제의 한국 침략을 규탄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날의 암살자’의 한 장면. “서로 알지 못했던 두 남자, 한 장소에서 같은 인물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라는 자막이 이어진다.

 

스티븐스의 뒤를 쫓던 장인환은 자신보다 한 발 먼저 스티븐스를 암살하려는 전명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는 두 사람이 모르는 사이였고, 이 사건이 사전에 공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영상은 이 사건이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을 세계에 알린 최초의 사건이며 이후 일본에 대한 비판과 조선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었다는 내용을 전하는데, 특히 ‘서로 알지 못했던 두 남자가 한 장소에서 같은 인물을 암살하려 한 사건’이라는 자막이 눈길을 끈다.

시청자들은 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했으며 사전에 공모하지 않았는데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스티븐스를 처단하려 한 사실에 더욱 놀라고 신비스러운 기운마저 느낀다. 스티븐스 사살사건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전에 일어난 의열 투쟁의 시초로 기록되었고, 독립운동사의 감동적인 쾌거로 국민들 가슴에 각인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사전 약속도 없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2018년 6월 3일자 뉴스엔미디어는 ‘전명운 장인환 스티븐스 암살, 해외 거주 한국인 최초 의거(서프라이즈)’라는 기사를 통해 ‘그날의 암살자’를 소개했는데, 다음은 기사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일본에서 파견한 외무고문. 평소에도 외신 기자들에게 “일본이 대한제국을 돕는 것”이라고 망언했던 스티븐스는, 심지어 일본의 지배는 대한제국에게 이득이라는 막말까지 했다. 이에 공립협회가 스티븐스를 찾아갔지만, 그가 망언을 계속해 폭행 사건까지 발생했다.

결국 공립협회는 스티븐스를 암살하기로 했고, 그 일에 나선 것이 전명운이었다. 그는 3월 23일 스티븐스가 페리 선착장에 나타난다는 정보를 얻고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권총은 불발됐고, 그는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가격했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어깨를 맞아 작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놀라운 건 스티븐스 역시 총에 맞아 쓰러졌다는 것. 뜻밖에도 총을 쏜 사람은 또 다른 한국인인 32세 장인환이었다.

장인환은 3월 21일 전명운과 마찬가지로 스티븐스의 망언을 접하고 격분, 스티븐스를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페리 선착장에서 총을 발사하려던 찰나 전명운을 발견했고, 그가 암살에 실패하자 총을 쐈다. 장인환이 쏜 총탄 한 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빗맞았고, 두 발은 스티븐스에게 명중했다. 결국 스티븐스는 이틀 후 사망했다.

두 사람은 재판에서 “조국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며 당당함을 잃지 않았고, 그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동한 대한민국 교민들은 현재 우리 돈으로 3억이 넘는 돈을 변호사 비용으로 모금했다. 전명운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지만, 장인환은 2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두 사람이 사전 공모 없이 암살을 감행했다.’는 내용은 위 매체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독립TV’, ‘TRUST NEWS 등등 많은 채널을 통해 소개되었고 널리 유포되었다. 2019년 2월 23일 방송된 YTN의 ‘자유를 위한 투사들... 장인환과 전명운을 기억하다’에서도 두 사람의 동시 거사를 우연한 일로 설명했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함께 애국단체 대한보국회의 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거사를 모의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일제의 침략이 정당하다며 거짓을 알리려 하자 목숨을 걸고 막아야겠다는 마음이 우연히 같았을 뿐입니다.

 

똑같은 내용을 전하는 다양한 영상과 글을 보면서 거듭 드는 생각은 ‘어떻게 서로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사전 약속도 없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어떤 절대자의 의지와 힘이 작용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유용한 지식 칼럼/역사&사건’에 대한 글을 작성하고 있는 블로거 ‘키스 키스세븐’의 글에서는 일관된 다른 자료들과 달리 “어떤 자료에서는 두 사람이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라고도 하고, 어떤 자료에서는 이미 2년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도 합니다.”라고 운을 떼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단 말인가? 어떤 자료는 무엇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것일까?

그렇지만 두 사람이 사전에 모의를 했다는 자료나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후반부에 가서 “신기한 것은, 전명운과 장인환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 우연이었다는 것입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은 전명운과 장인환이 각자 준비한 것일 뿐 미리 모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장에서 거사를 벌이고서야 상대가 와 있었던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라고 여느 매체와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과연 스티븐스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 전명운과 장인환의 공모인가, 아니면 신비스러운 단독거사인가? 101년 전 두 사람의 거사가 공모였는지, 우연히 발생한 것이었는지는 1988년 단국대의 김원모 교수가 발표한 논문 「장인환의 스티븐즈 사살사건 연구」 하나만 찬찬히 읽어도 알 수 있다.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김원모 교수의 글을 해당 내용을 중심으로 발췌했다.

1908년 3월 20일 친일 행위를 일삼던 대한제국의 외교고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스티븐스는 페어몬트 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한국 지배가 정당함을 주장했고, 이에 분노한 재미한인단체인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3월 21일 ‘공동회’를 열어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공동회는 독립투쟁의 결의를 굳건히 하면서 4인의 대표를 선출하였고, 대표 4인은 페어몬트 호텔로 스티븐스를 방문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스티븐스가 기자회견 내용 중 고칠 것이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흥분한 정재관이 스티븐스의 멱살을 잡고 가슴을 쥐어박았으며, 스티븐스가 마룻바닥에 쓰러지자, 대표들은 일제히 의자를 들어 스티븐스의 머리를 난타했다.

3월 22일 제2차 공동회가 열렸을 때, 대동보국회의 장인환과 공립협회의 전명운도 참석했다. 이때 장과 전은 스티븐스를 사살하기로 결심했고, 총과 스티븐스의 사진을 준비했으며, 스티븐스가 워싱턴행 대륙횡단철도를 타기 위해 오클랜드 페리부두선창으로 갈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페리부두를 거사 장소로 택했다.

두 사람은 3월 23일 아침 일찍부터 오클랜드 선박대합소인 페리빌딩에서 스티븐스가 오길 기다렸다. 9시 30분 자동차에서 스티븐스가 내리자, 키가 작은 전명운이 스티븐스에 접근해 손수건으로 감싼 권총을 꺼내 발사했으나 불발이었다. 당황한 전명운은 스티븐스에게 달려들어 총자루로 면상을 갈기고 달아났다. 뜻하지 않게 급습을 당한 스티븐스가 정신을 차리고 전명운을 추격하려는 순간, 3발의 총성이 울렸다. 스티븐스의 뒤에서 장인환이 발사한 총탄 중 한 발이 전명운의 어깨에 맞았고, 나머지 두 발은 스티븐스의 오른쪽 어깨뼈와 복부에 명중했다.

저격 실패 후 총을 맞고 도주하던 전명운은 이스트가 북쪽 모퉁이에서 맥그라드 경관에게 잡혔고, 장인환은 페리빌딩 맞은편에서 오엔스 경관에서 체포되었다. 총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항만응급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전과 장이 사전 공모에 의한 공범일 것이라는 심증을 갖고 대면 심문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소부터 서로 면식조차 없다면서 공모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수사가 시작되고 전명운은 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성명은 전명운, 연령은 25세. 이곳에서 공부하는 한국유학생이다... 며칠 전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한국 사정에 관해 신문기자 회견을 가진 바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스티븐스는 “한국민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환영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나는 그의 발언을 듣고 그를 죽이고 나도 자결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의 사진 한 장을 구해서 내 호주머니에 넣고 페리빌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하차하자 권총 발사를 했으나 불발이었다. 그래서 권총 자루로 그의 면상을 치고 달아났다. 이때 등 뒤에서 권총 발사 소리가 났다. (장을 가리키며) 나는 이 사람을 모른다. 내 거사 계획에 대하여 어느 누구와도 상의한 일이 없다.

 

병원에서 총상을 입고 어깨를 치료받고 있던 전명운을 방문한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신문 기자들에게도 ‘총을 놓다가 고장 나서 나가지 않는 고로 턱 밑을 냅다 지르고 상황이 급박하여 도망치고자 하는 즈음에 뒤에서 오는 총알을 맞았으며 스티븐스의 뒤에서 총을 놓은 장인환 씨는 우연히 거기서 만난 것이오. 당초에 알지 못하는 일’이라 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은 두 사람을 공범으로 간주하고 수사를 했으나, 장과 전은 공동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면서 단독거사임을 주장했고, 경찰은 공범사실에 대해 증거불충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살인미수혐의로 구속 기소된 지 97일 만인 1908년 6월 27일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보석되었고, 장인환은 1909년 1월 2일 캘리포니아 고등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제2등살인죄’로 2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이 김원모 교수가 밝힌 사건의 전모다. 전명운과 장인환은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의 회원으로서 거사 전부터 알고 있었고, 함께 스티븐스 사살을 공모했으며, 사살 당일 선박대합소인 페리빌딩에서 함께 스티븐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건 후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한 것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전에 살인사건을 모의한 공범으로 중형을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한 거짓 진술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며 공모하지 않았는데도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목적을 갖고 스티븐스를 처단했다는 신비스러운 이야기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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