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 북위를 배신하고 북연왕 풍홍을 '차지'하다

  • 기자명 안정준
  • 기사승인 2019.06.0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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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연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 사건>

● 화룡성에서 마주친 맹수들

고구려의 의향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북위의 황제인 태무제였다. 북위는 아직까지 요하 동쪽의 고구려라는 세력과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외교 접촉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나라가 한반도와 요동 등지를 포괄한 많은 영토와 인민을 통치하는 가운데, 결코 만만찮은 군사력을 보유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 북위가 대군을 요서로 진공시켜 북연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 경우, 과연 고구려가 어떻게 반응하고 나올 것인가. 태무제가 마음 한구석에 불안한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있을 즈음, 갑자기 북위 조정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고구려의 장수왕이 보낸 사신단이었다.

435년 6월, 장수왕은 북위에 사신단을 보내 황제 태무제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고, 가져온 많은 토산품을 바쳐 올렸다. 고구려 사신들은 북위의 태무제 앞에서 지극히 공손하게 처신하는 가운데, ‘국휘(國諱)’ 즉 북위 황제의 조상들 계보와 이름 글자를 알려달라고 간곡히 요청하기까지 했다. 당시 중국왕조에서는 지존인 천자와 그 조상들의 이름에 해당하는 글자는 문서에 함부로 적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고구려가 북위 황제 일족의 이름 글자를 알고 싶다고 요청했다는 것은 곧 북위를 황제국으로 받들겠다는 의사를 밝힌 정치적 행위로 해석된다. 고구려가 북위와의 적극적인 외교 의지와 동시에 황제의 뜻에 순순히 따르겠다는 뜻을 밝혀온 것이다.

이에 북위의 태무제가 크게 기뻐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고구려 사신에게 북위 황실의 계보와 이름자를 적어 주게 한 것은 물론, 곧바로 고구려로 사신을 파견하여 장수왕을 ‘고구려왕’으로 정식 책봉하는 절차도 밟게 했다. 이렇게 양국 간에 공식적으로 조공-책봉 관계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동북방의 강국인 고구려가 북위의 강대함을 인정하여 자발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이상, 이제 북위의 북연 정벌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436년, 드디어 북위의 대군이 북연 왕조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출정했다. 북위의 태무제는 꼼꼼하게도 고구려에게 미리 자신들의 출정 사실을 미리 알렸다. 이는 사전에 요하 인근에서 군사를 일으키는데 대한 양해를 구한 것으로서, 「이번에 출정한 우리의 대군은 단지 북연의 풍홍을 잡으러 갈뿐이며, 너희의 영토를 침공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라」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우리가 북연을 치러 갈 것이니, 어느 누구도 감히 이 일에 개입할 생각은 하지 마라」라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렇게 단단히 채비를 마친 북위군은 출정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연의 서쪽 경계선을 뚫고 파죽지세로 진군하였다. 무서운 기세의 북위군 앞에 북연의 백랑성을 비롯한 주요 군진들이 줄줄이 떨어졌다. 아마도 대부분의 북연 방어진들은 북위군의 압도적 전력 앞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항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제 북위군은 최종적으로 북연의 수도인 화룡성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당시 북위군의 사령관이었던 아청과 고필은 북연의 오랜 수도였던 화룡성으로 천천히 진격하면서 성 안에 고립된 풍홍 일당을 어떻게 항복시킬지 여부만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풍홍이 버티고 있던 화룡성에 다다른 북위군 눈앞에는 아주 뜻밖의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갈로맹광(혹은 갈로와 맹광 두 사람으로 보기도 함)이라는 장군이 이끄는, 자그마치 수만 명이나 되는 고구려군이 화룡성의 동쪽 편에 길게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북위군 수뇌부는 ‘작전 지침서’에 없는 뜻밖의 상황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북위 조정에서는 출정하는 북위군에게 요하 건너편에 있는 고구려를 되도록 자극하지 말 것을 당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바로 그 고구려군이 북연의 영토, 그것도 최종목표인 화룡성의 맞은편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북위와 고구려군은 화룡성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되었다. 북위군은 전력이 서로 엇비슷한 고구려군을 만만하게 제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주적인 풍홍의 북연군이 화룡성 내에 대기하고 있던 상황에서 의중을 알 수 없는 고구려군을 먼저 자극한다는 것은 크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고구려와 풍홍 사이에 사전에 어떤 밀약이 오고갔는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반대편의 고구려군 역시 상황을 가만히 관망할 뿐, 북위군을 섣불리 자극하지 않았다. 이렇게 성문이 굳게 닫힌 화룡성을 가운데 두고, 양쪽의 대병력이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눈,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삼자간의 숨 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을 깬 소란은 북위측도, 고구려측도 아닌, 바로 화룡성 내부에서 일어났다. 화룡성 내부에서 풍홍에 반대하는 세력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북연에서 관직을 지낸 곽생이라는 인물을 필두로 하여 고구려로의 망명에 반대하는 많은 유력자들은 북위에 계속 대항하는 풍홍의 조처에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성 밖에 고구려와 북위의 대군이 모두 와있는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고구려쪽으로 형세가 기울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이에 성 내부에 있던 풍홍 반대파 세력들을 규합하여 풍홍 휘하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반란군 세력은 제일 먼저 화룡성의 서쪽 문을 활짝 열어서 북위군이 들어오도록 유도했다. 북위군이 반란군의 유도에 따라 신속히 성안으로 진입했다면 화룡성은 북위군과 반란군에 의해 곧바로 장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풍홍의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북위군의 수뇌부는 갑작스레 화룡성 내부가 소란스러워지고 성문이 활짝 열린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북연군의 복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 내부로 진입하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북위측의 천재일우의 기회가 눈앞에서 날아가 버렸다.

한편 성 안에서 반란군과 싸우던 풍홍 세력 역시 언제 북위군이 내부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긴급히 화룡성의 동쪽 문을 열어 고구려군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러자 성 밖에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갈로맹광의 고구려 기병들이 쏜살같이 달려서 화룡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군과 반란군(풍홍 반대파)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반란군은 성문을 통해 꾸역꾸역 들어오는 고구려의 대군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반란군의 주모자 곽생은 고구려군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반란군 일당은 수적 열세에 몰린 끝에 성 안에서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렇게 갈로맹광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화룡성과 풍홍 세력을 모두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자, 이제 화룡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북위의 입장에서 본다면 화북 통일의 일환으로 요서 지역을 차지하러 온 이상, 외부세력이 화룡성을 빼앗아 가는 상황을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구려가 만약 화룡성을 차지해 영역으로 삼는다면 이는 곧 북위와의 전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구려군 역시 애초에 군사적 방어가 쉽지 않은 화룡성 지역 자체는 큰 미련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먼저 망명을 요청해왔던 풍홍과 그의 주민들을 확보해 본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고구려군의 지휘관인 갈로맹광은 어차피 북위군에게 내주어야할 화룡성 지역을 대대적으로 약탈할 것을 지시했다. 화룡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전연-후연-북연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수도로서 매우 번성한 도시였다. 풍홍 당시에도 수십만의 주민이 거주하던 상태였고, 성 내부에는 자연히 수많은 사찰과 저택들이 즐비했다. 또한 왕궁 내에는 많은 갑옷과 무기, 금은보화가 가득했다. 약탈 명령을 받은 고구려 병사들은 여기저기 달려들어 이 오랜 수도의 재물들을 쓸어 담고 도시 전체를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했다. 대저택에 들어가 미녀들과 값비싼 물건들을 끄집어 내오는가 하면, 사찰에 들어가 금동으로 된 불상들을 끌어내리고, 석탑을 무너뜨려 거기 붙은 금은 장식과 옥구슬 하나까지 떼어내 자루에 담았다. 또한 궁궐의 무기고를 열어서 병사들의 해진 갑옷과 무기류까지 전부 새것으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구려군은 화룡성의 궁궐에 크게 불을 질렀다. 이때 성 내에 화재가 크게 일어 무려 열흘 동안이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를 곁에서 모두 지켜보았을 북연왕 풍홍의 심경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 수도로 삼아야할 곳이었으므로, 고구려군의 무지막지한 약탈을 중단시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그저 봉사활동 차원에서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당도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풍홍이 불만이 있었더라도 고구려군을 제어할 힘도 갖지 못했으며, 동쪽의 고구려땅에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서는 향후 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던 처지였다. 별다른 대안은 없었다. 결국 풍홍과 북연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왔던 궁궐과 가옥, 건물들이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화룡성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풍홍 보다 더 참담한 심경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성 밖에 우두커니 서 있던 북위군 수뇌부였다. 이들의 임무는 북연왕 풍홍을 사로잡고 예하의 많은 주민들을 거느린 채 당당하게 수도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곧 그들의 손에 떨어질 것은 까맣게 숯 덩어리가 되어버린 화룡성 궁궐과 아무도 살지 않는 빈 땅덩어리뿐이었다. 동쪽에서 굴러들어온 ‘무뢰배’의 만행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북위군은 화룡성을 빠져나간 고구려군 행렬을 맹렬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의 퇴각 작전에는 북연왕인 풍홍과 더불어 수십만에 달하는 엄청난 수의 북연 주민이 함께하고 있었는데, 그 전체 행렬의 길이가 무려 80리에 달했다고 전한다. 제대로 방비하지 않는다면 기동력이 뛰어난 북위 기병들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이때 고구려군의 지휘관 갈로맹광은 꾀를 내어 북연주민을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부녀자들에게까지 궁궐에서 탈취한 갑옷을 입혀서 행렬의 정중앙에 배치했다. 일부러 군세를 크게 보이는 동시에 내부에도 철저한 방비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북연군과 고구려 보병으로 행렬의 주변을 둘러싸서 양 옆을 지키게 한 뒤, 가장 취약한 맨 뒤에는 갈로맹광 자신이 직접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북위군의 추격병들을 경계하였다.

고구려군은 대오를 지킨 채 천천히 동쪽으로 이동했다. 북위군은 고구려군을 계속 추격하면서 호시탐탐 빈틈을 노렸으나 대열의 주변에서 엄중하게 방어진을 구축한 고구려군을 쉽사리 공격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북위군은 생각해야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조정에서 처음 받았던 지침대로라면 고구려측과 심각한 마찰을 빚어선 안 되는 것 아닐까’

‘행여 고구려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할 경우 요하 동쪽으로부터 또 다른 고구려 지원군이 달려오는 것은 아닐까’

 

융통성 없는 북위군 지휘부는 우왕좌왕하다가 고구려군이 요하를 건너는 순간까지도 끝내 공격을 실행하지 못하고 말았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북위군 사령관인 고필이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예하 장수들의 적극적인 공격을 막았다고도 전한다. 그러나 수만 명의 고구려군을 눈앞에 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북위군 지휘관이 한가하게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아마도 북위 조정에서 작전 실패의 책임을 고필 등 해당 지휘관에게 엄중하게 묻는 과정에서, 그들이 술에 취해있었다는 식의 다소 과장된 혐의를 덧씌운 결과는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하게 된다. 아마도 고필이 공격을 말렸다는 것은 추격하는 북위군 내부에서도 고구려군을 공격하는 데 대한 찬반 의견이 양쪽으로 갈렸던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하튼 퇴각 후 고국으로 돌아간 북위군의 두 지휘관 아청과 고필은 극도로 분노한 황제 태무제의 호출을 받았다. 고위 장군으로서 한때 북량국 정벌전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북연 정벌전에서도 백랑성을 함락시키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고,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왔던 두 장수였다. 그러나 이들은 화룡성에서의 대실패를 문책당한 결과, 관직을 모두 박탈당하였으며, 마음대로 전역도 하지 못한 채, 문졸(門卒), 즉 창을 들고 성문 앞을 지키는 하급 병사의 직무를 담당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두 사람 가운데 아청은 큰 충격으로 인해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자택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  땅에서 권토중래(捲土重來) 불가능하다

 

풍홍은 그야말로 우여곡절 끝에 요하를 건너 고구려땅에 무사히 도착했다. 북연이 처해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들을 감안할 때, 그가 외교적 수단을 통해 최강국인 북위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내부의 반란세력들을 모두 물리친 가운데, 많은 주민들을 이끌고 고구려로의 이주를 성사시켰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대단한 수완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는 영토를 모두 잃었음에도 북연이라는 국가체의 생명줄을 여전히 유지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다만 둥지를 벗어나 들판에 홀로 떨어진 이상,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숲속에서 어떻게 생존해 가야할 지는 그에게 남겨진 또 다른 과제였다. 특히 풍홍의 목줄을 쥐고 있던 고구려는 ‘키다리아저씨’ 마냥 편지 보낸 소녀를 몰래 후원하며 만족해하는 그런 천사 같은 캐릭터가 아니었다.

고구려가 북위군을 따돌리고 풍홍과 수십만의 주민을 데리고 가자, 북위 황제 태무제는 대노하여 즉각 장수왕에게 사신을 보냈다.

 

“북연왕 풍홍을 조속히 송환하라!”

 

책봉국의 황제가 조공국의 신하에게 명령하는 형식이었다. 노기 어린 명령에 고구려가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고구려 장수왕은 북위측의 요구에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마땅히 풍홍과 더불어 함께 황제의 덕화(‘王化’)를 받들겠습니다.”

 

외교적으로 애써 예의를 갖춘 완곡한 말투지만 답변이 다소 모호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 알아보기 쉽게 풀이하면 이렇다. “마땅히 풍홍과 더불어”라는 말은 곧 “나(장수왕)는 풍홍과 함께 있겠다”, 즉 풍홍을 보내지 않겠다는 말이다. 또 이어서 “황제의 덕화를 받들겠다”고 하는 것은 “이전처럼 천자국에 대한 예의를 갖춰줄 테니 계속 친하게 지내자”라는 의미이다. 즉 고구려는 북위에 풍홍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당시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외교는 사실상 ‘형식’에 불과했을 뿐, 천자국의 실질적인 규제를 동반한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분노한 태무제는 즉각 기병을 모아 고구려를 치고자 했다. 그러나 주변의 대신들이 적극적으로 뜯어말리고 나섰다. 당시 북위는 북연을 멸망시키는 등 군사강국이긴 했으나, 아직까지 화북지역을 장악한지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에 있었다. 각지에서 항복해온 여러 부족의 수장들은 겉으로는 북위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겠노라 맹세했지만, 향후 천하의 정세가 변동될 경우 언제든 이탈해버릴 위험이 남아있었다. 즉 아직까지 이들은 북위의 주민으로 완전하게 녹아든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북위가 건국되기 이전에 이미 전진(前秦)이라는 왕조가 화북의 5호 16국 분열시대를 일시적으로 끝낸 적이 있었다. 뛰어난 정치를 펼쳤던 전진의 황제 부견은 서기 383년에 남쪽 장강(양쯔강) 일대에 터전을 잡고 있던 동진(東晉)을 통합해 천하통일을 달성하겠다는 일념으로 무려 8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런데 비수(淝水)라는 강가에 이르러 맨 앞에서 공격을 이끌던 부견 휘하의 선발대가 동진군과 싸우다가 크게 패해서 흩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부견이 이끌고 온 80만의 대군 가운데는 예전에 항복해왔던 수많은 부족단위 군사집단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부견의 직속 부대가 붕괴되면서 더 이상 자기들을 무력으로 제어할 대상이 없어졌음을 깨닫고는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지로 도망쳐버렸다. 화북의 안정화와 부족 간의 융합을 기다리지 않고 섣불리 대규모 군사원정을 일으켰던 전진은 결국 이때 흩어진 부족들이 세운 독립세력들에 의해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화북 일대를 통합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북위 태무제 입장에서도 과거 부견의 실패가 결코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북위를 둘러싼 국제정세도 문제였다. 북위는 주변에 많은 적들을 두고 있었다. 동쪽의 고구려도 결코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만약 그런 고구려와의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주적인 남쪽의 송나라라든가, 북쪽에서 호시탐탐 화북일대를 노리던 유연, 그리고 서쪽에서 강력한 기병을 이끌던 토욕혼 등의 세력들이 사방에서 북위를 침공할 우려가 있었다. 즉 북위는 7세기에 통일왕조였던 수․당 제국이 주변 세력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최종적으로 온 국력을 기울여 고구려 정벌을 추진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정세 속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결국 북위 태무제의 고구려 공격 논의는 신하들의 만류에 의해 중단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모든 일들이 고구려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북위의 개입 가능성이 적어지면서, 고구려 영토 안의 풍홍에 대한 처우는 전적으로 고구려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그제서야 고구려는 서서히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풍홍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땅인 평곽이라는 지역에 도착하자, 장수왕은 풍홍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멀리까지 와서 노숙을 하니 군사와 말이 얼마나 피로하겠느냐.”

 

풍홍은 난데없는 ‘용성왕’이라는 호칭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용성이라는 것은 곧 북연의 수도였던 화룡성을 말한다. 본래 북연의 천왕이었던 풍홍을 화룡성이라는 한정된 지역의 관할권자로 부르면서 그 권위를 잔뜩 깎아내린 것이다. 이는 장수왕이 풍홍과의 서열을 분명하게 정한 첫 번째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연의 천왕이자 대외적으로는 한때 황제를 칭했던 풍홍의 입장에서 이러한 모멸적인 칭호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또한 북연이 불가피하게 고구려와 대등한 관계를 맺고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긴 했지만, 여전히 풍홍을 비롯한 북연인들은 속으로 고구려를 오랑캐라고 깔보고 무시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그 오랑캐 수장이 풍홍을 그저 ‘화룡성의 주인인 풍군’이라고 부르며 아랫사람처럼 하대하는 것이다. 풍홍을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물론 그의 아들들도 장수왕의 모욕적인 ‘위로의 말’을 들으며 매우 분개할 수밖에 없었다.

풍홍은 장수왕의 교지를 읽어내리는 고구려 사신을 무섭게 쏘아보며, “내가 연나라의 천왕이고, 황제이니라. 당장 가서 너희 왕에게 그리 전해라!”하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고구려 사신은 그런 반응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고 교지를 끝까지 읽어내려 갔다. 풍홍은 이 사신의 무덤덤한 반응을 지켜보며, 모든 것이 처음부터 고구려에 의해 미리 치밀하게 계획된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풍홍이 처음 고구려측에 사신을 보내 망명을 요청했을 당시, 장수왕이 수만 명의 군사 지원을 비롯한 매우 적극적인 원조를 약속했던 것, 그리고 고구려군이 약탈과 방화를 통해 도성인 화룡성을 사실상 재건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철저히 파괴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마치 하나의 일관된 계획 하에 진행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풍홍 앞에 서 있던 고구려 사신의 얼굴에 번진 희미한 웃음은 마치, ‘이제 다시 화룡성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하는 빈정거림으로 다가왔다. 새카맣게 타버리고 남은 화룡성 궁궐터의 잿더미 위에는 풍홍을 빼앗기고 약이 바짝 오른 북위의 군단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풍홍의 불길한 예감은 곧바로 현실이 되었다. 고구려는 풍홍과 주민들을 처음에 요하 부근의 평곽이라는 곳에 두었다가, 얼마 뒤 훨씬 통제하기 쉬운 요동반도 쪽의 북풍(北豐)이라는 곳으로 이주시켰다. 풍홍 집단이 행여 국경을 넘어 다른 곳으로 도망칠 것을 우려한 조처였다. 그리고 풍홍이 북연 주민들을 대상으로 정치와 형벌을 본국(북연)에서처럼 하자, 고구려는 풍홍을 모시던 사람들을 강제로 떼어내 다른 곳에 배치시키고, 심지어 풍홍의 태자인 왕인을 인질로 삼아 수도인 평양성으로 끌고 갔다. 즉 풍홍을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그의 망명 정부 운영을 사실상 마비상태에 빠트린 것이다.

애초에 고구려는 북연의 망명정부니 부흥운동이니 하는 따위를 용납할 생각이 없었다. 나라를 잃은 풍홍을 잘 대우해봐야 고구려에게 딱히 큰 실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북위의 잠재적 위협세력을 고구려가 키워주는 결과가 되어, 자칫 잘못하면 북위의 군사적 침공까지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애초에 고구려가 북위와의 군사적 충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들을 데려온 것은 아마도 요서 일대가 북위의 동방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북위로 흡수될 수 있는 다수의 거주민들을 데려옴으로써 요서 지역의 인구와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군사 작전의 수행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시는 경작할 토지에 비해 노동력, 즉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기였다. 고구려는 이미 5호 16국 시대부터 혼란스러운 화북 지역으로부터 넘어오는 많은 한족 이주민, 즉 농경인구를 적극 유치하는 정책을 폈다. 이들은 대부분 고구려에서 세금과 부역을 담당하는 일반 주민층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북연의 수많은 주민들을 자국의 인민으로 흡수하는 것, 그것이 고구려가 최종적으로 노린 것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고구려의 철저한 손익계산 속에는 풍홍의 입장 따위는 고려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용성왕’이라는 상징적인 지위를 던져주고 적당히 대우를 해준 뒤, ‘뒷방 늙은이’로 조용히 살다가 죽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족들을 백여 명이나 몰살시키면서 악착같이 ‘지존’의 자리에 올랐던 풍홍에게 이러한 비참한 ‘타협’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북연의 천왕으로 살아야만했고,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백성들을 이끌고 요서 지역으로 귀환해야만 했다. 그 무서운 정치적 집념 속에 또 다른 대안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풍홍은 고구려에 그대로 머물러봐야 장수왕의 음험한 계략에 놀아날 뿐, 결코 ‘권토중래(捲土重來)’의 꿈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고 또 다시 무시무시한 ‘반역’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북연 조정이 무대가 아니라, 풍홍 자신과 고구려, 그리고 또 다른 이웃나라를 거대한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갈 계획이었다. 풍홍은 자기 부하들을 불러 미리 짜둔 계획을 지시하고는 요동 반도를 통해 몰래 배를 태워 남쪽으로 보냈다. 고구려는 정작 일이 터지기 직전까지 전혀 이 일을 눈치 채지 못했다. 풍홍이라는 인물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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