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 송까지 개입한 풍홍 사건...고구려는 '일촉즉발' 전쟁위기를 어떻게 넘겼나

5세기 동아시아 최대 국제분쟁, 북연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 사건 ③

  • 기사입력 2019.06.06 09:24
  • 최종수정 2019.06.13 09:38
  • 기자명 안정준
<북연왕 풍홍(馮弘)의 고구려 망명 사건>

① 북연왕 풍홍의 '권력욕'과 동아시아 국제분쟁의 서막

② 고구려 장수왕, 북위를 배신하고 북연왕 풍홍을 '차지'하다

③ 남조 송까지 개입한 풍홍 사건...고구려는 '일촉즉발' 전쟁위기를 어떻게 넘겼나

 

● 풍홍의 도박’, 남조 송나라를 끌어들이다.

풍홍의 부하들이 서신을 들고 뱃길을 통해 도착한 곳은 남조 송나라였다. 당시 송나라는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이 지역을 통해 해로로 요동반도로 왕래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송나라는 정통 한족왕조를 계승한 나라로서 북위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으며, 형식적으로나마 고구려를 조공국으로 거느린 천자국(天子國)이기도 했다.

풍홍은 송의 황제 태조(太祖)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구려의 장수왕이 자신을 속이고 북연 망명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원망하였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송나라에 갈 경우 예하의 군사들과 함께 북방의 북위를 물리치는데 제 역할을 다하겠노라고 적극적으로 어필했다.

“황제 폐하, 만약 저와 북연의 백성들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향후 저 북방의 오랑캐(북위)에 대항해 죽을힘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향후 북벌을 통해 천하 통일의 그날이 온다면 소인을 요서 지역의 작은 왕으로 봉해주시길 바랄 따름입니다.”

 

이러한 제안은 북위의 군사적 위세에 눌려있던 송나라 태조에게 나름 매력적인 제안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풍홍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군사적 능력을 갖추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한때 북연의 천왕으로서 요서 일대에서 나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이 상징적 인물을 영입할 경우, 송나라가 향후 북방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일정한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 활용하든 간에 송나라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카드를 한 장 쥐는 셈이었으므로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다만 문제는 고구려의 태도였다. 아무리 명분상 조공-책봉관계를 맺은 황제와 신하의 관계였다고 하지만, 고구려가 순순히 송나라의 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였다. 풍홍을 내놓으라는 북위 황제의 협박에 가까운 요구도 단칼에 거절했던 고구려였다. 과연 장수왕이 어렵사리 확보한 풍홍과 북연 백성들을 순순히 내놓을 것인가. 단순히 국서 한통을 달랑 써서 보내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고구려측에서 무시해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이에 송나라 태조는 일종의 무력시위를 통해 천자국의 위엄을 내비치면서 고구려를 압박할 묘안을 짜냈다.

438년 3월, 송나라를 출발한 대선단이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에 상륙했다. 갑작스러운 송나라 선박의 출현에 놀란 고구려군 앞에 송나라 장수 왕백구(王白駒)와 7천여 명의 군대가 하선하여 정렬했다. 왕백구는 고구려측에게 송나라 황제 명의의 서신을 건네주었다. 그 국서는 바로 장수왕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고구려왕은 속히 북연왕 풍홍에게 노자(路資)를 마련해주어 송나라로 보내도록 하라.”

 

고구려 조정은 난데없는 송나라군의 상륙과 풍홍을 내놓으라는 송 황제의 요구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풍홍의 은밀한 외교적 타개책에 허를 찔리고 만 것이다. 고구려 조정이 이 국서를 받았을 때 이미 왕백구의 송나라군은 풍홍과 그의 일족, 그리고 북연 주민들이 머물고 있는 북풍 지역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송나라의 7천 군대를 저지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고구려에게 있어서 송나라는 남쪽에서 북위를 견제해줄 수 있는 중요한 우방국이었다. 함부로 그들의 행동을 막아설 경우 자칫 잘못하면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주요 동맹국과의 친교가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풍홍이라는 인물을 순순히 송나라측에 보낼 수도 없었다. 송나라는 북위의 가장 큰 적대세력이었다. 북위 황제가 고구려에게 내놓으라고 요구해도 끝끝내 내주지 않았던 북연왕 풍홍을 그 적국인 송나라에게 넘겨준다면, 지금까지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북위측이 과연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고구려 입장에서는 애써 데려온 풍홍을 남에게 넘겨주고, 도리어 북위의 군사적 침공을 걱정해야만 하는 우스운 꼴이 될 수 있었다. 두 가지 상황 모두 고구려 장수왕으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송나라군이 점점 북풍에 근접하고 있던 상황에서, 고구려 역시 조만간 닥칠 최악의 상황만은 어떻게든 모면해야 했다. 물론 제멋대로 남쪽 송나라를 끌어들여 이 문제를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분쟁으로 확대시킨 풍홍의 원죄 역시 그냥 묵과할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 장수왕은 아주 위험한 군사적 도발을 시도하기로 했다. 곧이어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고구려의 유격대가 북풍 지역을 향해 신속하게 출격했다.

이렇게 왕백구의 송나라군과 장수왕이 보낸 고구려군이 모두 북풍을 향해 다가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과연 누가 먼저 도착할 것인가. 동아시아 각국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빚어진 이 사태는 이제 끔찍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는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친 것이다.

 

● 북풍에서 빚어진 대참극

 

북풍에 있던 풍홍은 초조하게 송나라 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군이 탄 함대가 요동반도에 안전하게 입항해 북상중이며, 도중에 고구려의 관문들을 별다른 저항 없이 통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는 자신의 ‘도박’이 거의 성공직전에 와있음을 깨달았다. 고구려와 송나라 간의 군사동맹 관계를 교묘히 이용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계책이었고, 그것이 사실상 성사 직전에 와있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찜찜했던 것은 고구려의 ‘침묵’이었다. 풍홍에게 긴급히 사신을 보내서 문책을 하거나, 혹은 송나라에 당도할 시에 이런저런 사항들을 지켜달라는 요구조차도 없었다.

고구려측의 무반응에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풍홍은 송군과의 조우를 앞당기기 위해 자신의 아들들을 비롯한 일족들, 그리고 북연 백성들을 이끌고 서둘러 남하하기 시작했다. 행렬이 서서히 북풍을 빠져나가려고 하던 그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풍홍이 이끌던 행렬의 측방에서 갑작스럽게 경무장 상태의 기병들이 출현하더니 창을 겨누고 달려든 것이다. 바로 고구려군이었다. 손수와 고구라는 장수가 이끄는 고구려의 유격대가 풍홍의 가마가 있는 곳을 타겟으로 삼아 무섭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본 풍홍과 그의 일족들은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풍홍 수하의 군사들은 애초에 고구려에 의해 대부분 무장을 해제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저항해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달아나는 풍홍 일족들을 발견한 고구려군에게 자비는 없었다. 고구려는 일이 이지경이 되도록 만든 풍홍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살아서 송나라로 가는 일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요하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던 북위가 기민하게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장수왕은 풍홍의 뒤를 계승할 수 있는 그의 일족들, 그중에서도 풍홍의 아들들을 모두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행여 풍씨의 자손이 송나라에 건너가서 풍홍의 뒤를 계승한 가운데 북연의 상징적인 주인을 자처한다면 또 다른 국제적 문젯거리가 될 수 있었다. 아예 멸족을 시켜 후일에 있을 분쟁의 싹을 잘라버리고자 한 것이다.

고구려군은 부대를 나누어 한편으로는 풍홍을 뒤쫓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풍홍의 아들들을 잡기 시작했다. 풍홍에게는 연령대가 다양한 10여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고구려군은 마치 초원에서 누의 무리를 뒤쫓는 사자들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풍홍의 자식들을 하나둘 붙잡아서 무참히 살해했다. 풍홍은 왕국의 후손들이 차례로 선혈을 흩뿌리며 땅바닥에 고꾸라져 죽어가는 광경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동안 악착같이 지켜왔던, 한때는 영원할거라 생각했던 천년왕조가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풍홍이 마지막으로 고구려 기병의 칼을 받고 쓰러지던 순간,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원망은 누구를 향하고 있었을까. 북연의 영토를 빼앗아 불가피한 망명을 택하게 만든 북위였을까, 아니면 자신에게 끝내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매정한 고구려였을까. 어쩌면 죽음을 앞두고서 이 모든 비극의 단초를 제공했던 자신의 끝 모를 권력욕은 아니었을까.

북풍에서의 학살극은 풍홍 일가가 몰살당하면서 모두 종료되었다. 풍홍과 함께 그의 아들 10여 명의 목은 모두 고구려군에 의해 수집되었다. 그렇게 고구려군이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 막 살육의 현장을 떠나려던 찰나, 풍홍이 그렇게도 기다렸던 송나라의 군대가 뒤늦게 북풍에 당도했다. 송군의 지휘관인 왕백구의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말 그대로 핏빛 아수라장 속에 널부러져 있는 풍홍 일족들의 시신들, 그리고 그 위에 우두커니 서 있던 고구려군이었다. 왕백구의 눈앞에 고구려 장수 고구가 풍홍의 머리를 손에 든 채 다가왔다. 고구의 얼굴에는 빈정거리는 듯한 묘한 미소가 번져있었다. 고구려측의 발 빠른 대처로 인해 상황이 이미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어쨌든 송군은 이제 아무런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그것이 양국관계를 그나마 보전하고, 별다른 외교적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었다. 그런데 당시 지휘관이었던 왕백구는 이러한 ‘타협’을 내심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그 자리에서 후대 역사학자들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돌발적인 행동을 벌이고 말았다.

 

“전군, 속히 집결하여 저 고구려놈들을 죄다 잡아들여라!”

 

아마도 왕백구는 상당히 고지식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송나라 황제가 내린 분부을 우직하게 수행하던 중, 누군가의 방해로 갑작스럽게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 데 따른 충격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정신 나간 짓이다. 북풍 지역은 고구려 영역 한가운데였고, 본국인 송나라는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있었다. 본국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고작 7천여 명의 병력만으로는 형식적인 무력시위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질적인 군사행동을 벌이는 건 너무 무모한 행위였다.

여하간 왕백구의 명령을 받은 7천여 명의 중무장한 송군은 현장에 있던 고구려 군사들을 덮쳤다. 고구려군은 처음부터 풍홍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긴급히 파견됐던 소수의 유격부대였기 때문에 대병력인 송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고구려군은 송군에게 포위되어 격파되었고, 급기야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지휘관이었던 고구가 죽고, 손수가 사로잡히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만약 왕백구가 이렇게 일을 벌인 뒤에 요동반도를 통해 재빨리 본국으로 빠져나갔더라면, 나름 객쩍게 부린 혈기로 ‘정의구현’을 실현하고 달아난 비범한 협객처럼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영화와는 달랐다. 북풍은 요동반도에서도 상당히 내륙으로 들어간 지점에 있었다. 게다가 그가 이끄는 7천명에 달하는 보병들을 전부 신속하게 이동시키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급보를 접한 고구려 조정에서 긴급하게 대규모 군단을 파견했다. 송군은 결국 고구려 대군에게 따라잡혀 포위되었다. 그리고 왕백구는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채 포박되어 장수왕 앞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송나라측도 고구려측도 미리 예측하지 못했던 희한한 해프닝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예상 밖으로 전개된 이 사태를 되짚어보는 가운데, 풍홍의 죽음과 왕백구의 신변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처음에 풍홍을 불가피하게 제거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송나라 조정과의 외교적 마찰을 어느 정도 각오했던 터였다. 그러나 왕백구의 돌출적인 행동은 오히려 고구려 입장에서 이 사태를 다소 유리하게 수습할 수 있는 하나의 돌파구를 제공해준 셈이 되었다. 관련 논의를 마친 고구려 조정은 곧 왕백구와 함께 고구려인 사신단을 배에 태워 남조 송나라를 향해 출항했다.

한편 송나라 조정은 이제나 저제나 왕백구가 풍홍을 데리고 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산동반도의 먼 바다로부터 다가온 한 무리의 선단은 기다리던 송나라 선단이 아닌, 고구려 국적의 배들이었다. 곧이어 배들이 항구에 닿을 내렸고, 여기서 고구려인들과 더불어 포승줄에 묶인 수척해진 얼굴의 한 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송군의 지휘관이었던 왕백구였다.

송나라 조정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이 사신단 일행을 맞았다. 고구려 사신들은 송 조정에 도착하자마자, 격앙된 목소리로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죄인 왕백구가 고구려에 군대를 몰고 와서 함부로 우리 장수를 죽였습니다. 이에 부득이 우리도 급히 군대를 내어 죄인을 잡아 압송해온 것입니다. 양국의 우호를 심히 저해한 이자의 죄를 속히 처벌해주십시오!”

 

고구려 사신들과 함께 돌아온 송나라 사람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들은 송 태조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풍홍은 이미 죽고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고구려측에 풍홍을 죽인 책임을 물어 사과 내지 배상을 받아야 마땅했으나, 왕백구가 그곳에서 어쩌다 고구려 장수를 쳐 죽임으로서 송의 입장도 꽤나 난처해졌다. 상황이 이러한데, 굳이 고구려와 일의 시비를 다투어 분쟁을 키워봐야 상호간에 굳건히 유지하고 있던 대북위전선(戰線)에만 금이 갈뿐, 별다른 실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저런 사정들을 모두 파악한 송 태조는 마침내 포승줄에 묶인 왕백구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왕백구 너는 짐이 부여한 임무를 망각하고 북연왕 풍홍을 호위해서 데려오는데 실패했다. 게다가 멀리 떨어진 나라의 땅에서 제멋대로 군대를 풀어 사람을 죽임으로써 양국 관계에 큰 오점을 남겼으니 그 죄악이 얼마나 막대한가. 저 놈을 당장 옥에 가두도록 하라!”

 

난데없는 황제의 호통에 놀라 눈만 껌벅이던 왕백구가 병사들에게 연행되어 감옥으로 끌려들어 갔다. 마치 외부 바이어들과의 계약협상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하게 되자, 최종책임자였던 팀장이 협상 테이블에 함께 있던 부하직원을 마구 혼내며, “너 때문에 일을 다 망쳤다!”하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상황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결국 송나라 조정은 고구려 사신들 앞에서 현장 실무자였던 왕백구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양국 관계의 파국을 막고, 적당한 선에서 이 사건을 무마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대강 나라의 체면을 살린 고구려 사신들은 송나라 조정에 거듭 감사 인사를 올리며 양국의 친선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멘트를 남기고 바로 본국으로 서둘러 돌아가 버렸다.

송나라는 고구려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며 형식상 천자와 신하의 관계에 있었지만, 이 남쪽의 천자국은 바다 건너의 신하국을 실질적으로 제어할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양국이 중시했던 것은 화북의 강자인 북위를 남쪽과 동쪽에서 같이 견제할 수 있었던 서로 간의 군사적 역할, 즉 동맹관계의 유지였다. 이미 풍홍 일족이 모두 사라진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집요한 책임 추궁이 아닌, 이전과 같은 상호우방의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430년대 풍홍 망명 사건을 둘러싼 고구려-북위-남조(송)의 관계는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상태 속에서 각국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관계(연합)가 중시되던 정황을 잘 보여준다. 5세기 당시 조공-책봉 관계는 책봉국의 압박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다. 주변국 입장에서 조공-책봉 관계 유지는 중원 왕조가 내세우는 명분을 존중한 가운데 그들이 제시한 외교적 틀을 공유한 것이었을 뿐,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상충될 시에는 과감히 스스로 탈피하는 모습도 보였다.

북연왕 풍홍의 개인적인 권력욕으로 인해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된 이 국제적 분쟁은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사의 비정하고 더러운 이면들을 그대로 여과 없이 보여준다. 서기 5세기 전반에 벌어졌던 이 거대한 국제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는 풍홍이라는 한 사내가 벌인 무모하고도 저돌적인 외교적 행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풍홍을 둘러싼 북위․고구려․송 등 당시 동아시아의 내로라라는 국가들이 바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 분쟁을 더욱 크게 확대시킨 비정한 조연들이었다고 하겠다. 각국이 모두 입을 모아 의(義)를 말하고, 리(理)를 부르짖으며, 풍홍 사건에 개입하였지만, 정작 드러낸 것은 탐욕(貪慾)이요, 남은 것은 이해(利害)뿐이었던 것이다. (시리즈 끝)

안정준   kyuri21@naver.com  최근글보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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