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의 부정신학, 이원론, 음모론의 모순

  • 기자명 김재인
  • 기사승인 2019.09.04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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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 발표된 영화 <매트릭스>는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최근엔 <매트릭스4> 제작이 확정됐다. 이 글은 「우리가 자유롭기까지 ― SF 영화 ‘매트릭스’와 부정신학의 문제」(『이다』 제4호, 문학과지성사, 2000)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던 에세이를 수정, 보완, 증보한 것이다.

 

Ⅰ. 들어가며

 

플라톤이 잘 간파했듯이, 모든 예술작품은 근본적으로 허구(fiction)지만, 실은 독특한 존재론적 위상을 갖고 있다. 예술작품은 현실에 대해서는 가짜라는 위상을 갖는데, 진짜 세계에 비추어보면 현실도 가짜이기 때문에 이중으로 가짜라는 위상도 갖게 된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침대와 침대 그림은 존재론적 위상이 같지 않느냐고 반문해 볼 수 있다. 침대가 침대의 기능이 있듯 침대 그림도 그림 나름의 기능이 있으며, 침대의 이데아가 있듯 침대 그림의 이데아가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들뢰즈는 최초의 반플라톤주의자로 플라톤을 꼽기도 했다.

이런 이중성이 생겨나는 건, 플라톤이 도입한 허구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데아’라는 허구. 이데아를 도입함으로써 플라톤은 현실의 존재론적 등급을 한 단계 낮추었지만, 동시에 현실 존재인 침대 그림의 등급을 이중화하고 말았다. 침대 그림은 이제 현실 존재이자 현실보다 한 등급 낮은 존재로 이중화된다. 이데아론은 플라톤이 꾸며낸 허구였다. 이 허구를 SCIENCE Fiction이 아닌 Science FICTION으로서의 SF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허구는 자신이 꾸며낸 세계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든다. 현실 등급에도 속하고 동시에 현실 아래 등급에도 속하기 때문이다.이 글은 SF의 두 양상을 분석하되, Science FICTION의 예로 영화 <매트릭스>(1999)를, SCIENCE Fiction의 예로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1998)를 각각 활용할 것이다. 2016년 영화 <컨택트>는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Ⅱ. SF와 니힐리즘

 

1. 믿음과 니힐리즘의 문제

믿음이 흔들리면 삶이 위험하다, 삶의 판이 흔들린다. 삶의, 사람의 지각 변동.

사랑을 믿을 수 없다면 사랑은 달아난다. 사랑은 믿음의 땅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맹세마저도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확신이다. 애초에 약속이란 보증이 아니라 실천이다. 이토록, 믿음이라는 이기적 덕목은 모든 것에 앞선다. 믿음의 변화를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의 생성을 살펴보아야 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믿음은 단순히 주관적인 심리적 성향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경험적·진화적으로 습득된 물질적 존재 양식이다. 믿음의 진화, 즉 믿음의 강화나 변경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 믿음은 음식과도 같다. 믿음이 보수적인 까닭이 그것이다.

믿음의 최종 근거는 없다. 니체는 이를 두고 니힐리즘이라 불렀다. ‘왜?’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알 수 없다. 모든 기존 가치와 의미의 기반이 사라졌다. 삶의 조건으로서의 니힐리즘.

그러나 살아 있는 존재, 특히 인간은 스스로 그 질곡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그래서 니힐리즘은 두 방향으로 분화한다. 무(無)를 좇든지, 무를 딛고 서든지. 삶의 태도로서의 니힐리즘.

내가 이 두 가지 태도의 계보학을 작성하려는 것은 믿음의 생성을 구명하기 위함이다. 이 글에서 나는 그 두 태도를 각각 ‘부정신학’적 태도와 ‘과학-미학’적 태도라고 부르겠다.

 

2. 상식의 결정체, SF 영화 <매트릭스>

현실의 주류를 형성하는 것은 부정신학적 태도이다. 스스로는 모르고 있을지라도 부정신학적 태도는 우리 삶의 깊숙한 곳까지 침윤되어 있다. 보편적 부정신학의 상황이라 묘사할 수 있다.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 곳에서 그 점을 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가령 워쇼스키 형제 감독의 SF 영화 <매트릭스>는 어떨까?

단지 비판을 위해 어떤 텍스트를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장 좋은 비판은 무시일 터이므로. 하지만 내가 <매트릭스>를 집중적으로 다루려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매트릭스>는 상식의 결정체이다. <매트릭스>를 보면 상식의 판이 보인다. 사실 ‘매트릭스’ 자체가 ‘판’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매트릭스는 상식적 믿음의 한계이며 총체이다. 게다가 <매트릭스>는 좋은 분석 자료이다. <매트릭스>는 영화, 그것도 SF 영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트릭스>가 가장 ‘철학적인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는 점도 분석의 필요를 키운다. 뒤에서 밝혀지겠지만, <매트릭스>는 철학적으로 따져 보면 ‘아무 말 대잔치’를 펼치는 오락물 이상이 아니다.

 

3. 산업으로서의 영화와 대중적 지지

영화는 개인적 창조물도, 개인적 소비물도 아니다. 영화는 막대한 제작비를 필요로 하는 ‘산업’이다. 영화 제작이 소설 쓰기와 다른 점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영화는 자본, 즉 관객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관객과의 타협은 꼭 필요하다. 이것이 영화의 태생적 운명이다.

이런 타협은 불행한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지극히 냉정한 현실 원칙이다. 사실 예술사를 보면 후원자 없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적은 예외를 제외하면, 예술가는 왕이나 귀족이나 엘리트나 대중의 후원 속에서 살았다. 작품은 예술가의 무한한 자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제약이 따르는 현실 속에서, 꼭 그 현실에 순응하는 것은 아닌 방식으로, 때로 많은 눈치도 봐가면서, 그러나 결국 거기에서 도주하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가 대중이라는 후원자를 딛고 생존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베스트셀러 영화를 보면 대중의 정서가, 대중의 생각과 행동 양식이 읽힌다. 작품성 운운하기 전에 작품을 통해 대중과 대중성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매트릭스>는 대중을 지지 기반으로 만들어져 성공했다.

 

4. 과학 기술, 과학과 기술

한편 SF란 무엇인가? SF의 S 즉 science는 과학 기술을 가리킨다. 본래 과학과 기술은 서로 구별되는 영역이지만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과학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과학은 좌표와 함수를 통해 세계를 해명한다. 반면 기술은 적자생존의 율법을 따라 진화한 구체적이고 기계적인 실천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과학 이론이 변하더라도 이미 잘 사용되고 있는 기술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또한 과학 이론과 무관하게 기술이 발견, 발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자동차가 움직이는 물리적 원리를 모르더라도 평생 자동차를 잘 몬다. 또한 컴퓨터가 작동되는 물리적 원리를 모르더라도 컴퓨터를 잘 이용한다. 기계가 고장 났을 때 몇 가지 응급조치를 할 줄 안다면 좋은 일이다. 원리도 알고 문제도 풀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다. 하지만 모든 과학 이론을 알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다. 흔히 생기는 골칫거리를 때맞춰 해결할 줄 알면 된다.

사실 희랍인 조르바는 과학적이지 못하기도 했지만 더 깊이 보면 기술이 모자라서 건축에 실패했다. 이 차이는 낭만적으로 해석되며 흔히 간과되곤 한다. 불가능하다고 믿어지는 것이라고 해서 쉽게 포기하는 것도 문제겠지만, 실제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조르바는 과학적 지식을 결여하고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기계적 현실의 무시에 있다. 기술은 신비주의적 믿음과 무관하다. 기술은 진화론을 따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술은 과학적이다.

현대에는 기술과 과학의 상호 의존성이 더 커져가고 있다. 내가 이 글에서 ‘과학 기술’이란 말을 뭉뚱그려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그리고 기술의 어원이 희랍어 테크네(techne)라는 점도 기억해 두자. 테크네는 예술(techne → ars → art)의 어원이기도 하다. 최초에 기술과 예술은 구별되는 활동이 아니었으며, 오늘날도 제작이라는 측면에서 이 기원은 잊히지 않고 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예전에 없던 것들을 일상 사물로 만들었다. 이런 변화가 SF의 특징을 규정할 수 있게 해준다. SF는 그것이 창작된 당대 현실과 관련해서 의미를 갖는다. 해저 2만 리나 달세계 여행은 지금은 SF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현실이다. 하지만 언젠가 그것이 SF의 영역이었던 때가 있다. SF에도 심리 세계가 등장하고 사랑과 미움 같은 감정이 쟁점이 되며 사회 속 관계가 문제로 등장한다. 어떤 일상을 구성하는 과학 기술 차원에서만 SF는 다른 장르와 구분된다. 이것이 SF의 소재적 특징이다.

한편 SF는 논리적으로 우리 세계와 다른 현실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아직은 없는 우리의 현실을 다룬다. 그것은 가능한 한 과학 기술적 개연성에 근거하려 한다. 막연한 추측이나 상상이 아니라 현재 가능한 과학 기술이 SF를 뒷받침해야 한다. 하지만 SF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말하기 때문에 사건 자체뿐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는 세계까지도 더 철저하게 구성해야 한다.

보통의 경우 사건은 상식적인 세계, 다시 말해 현재 일상화된 과학 기술 차원에서 일어난다. 이 경우에는 세계보다는 사건을 구성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하지만 SF에서 사건은 세계와 동시에 구성되기 때문에 우리는 작가가 구성하는 세계에도 주목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SF를 보면 세계에 대한 상상의 구조, 믿음의 바닥까지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SF의 형식적 특징이다. SF의 매력은 이런 특징들에 있다.

드니 빌뵈브 감독이 <컨택트(Arrival)>(2016)라는 영화로 만들어 더 유명해진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는 외계 생명체와의 만남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며, 따라서 현재로서는 가설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긴 해도 이 작품이 그저 황당무계하다고만 할 수 없는 까닭은, 실제 밝혀진 물리법칙을 출발점으로 삼아 충분히 개연적인 사건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에서 더 놀라운 점은 글의 전개 방식에 있다. 외계 생명체라는 사건도 중요하지만, 당장 몇 쪽만 읽어봐도 확연히 드러나는 전시적(全時的) 시점의 서술은 꽤나 충격적이다. 처음 읽을 때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런 서술이 어떻게 가능한지가 밝혀지는 과정이 작품의 또 다른, 사실상 더 중요한 주제이다.

영화 <매트릭스> 한 장면.

Ⅲ. <매트릭스>와 부정신학

 

1.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를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

영화 <매트릭스>를 이루는 가장 커다란 틀부터 보자. <매트릭스>는 2199년의 현실을 다룬다. 그 세계는 인간과의 한판 대결에서 승리한 인공지능 컴퓨터가 지배하는 세계인데, 컴퓨터는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삼기 위해 인공 배양 장치(‘매트릭스’) 속에서 인간을 배양한다. 컴퓨터는 그렇게 배양되는 인간에게 기억과 감각을 준다. 이제 인간이 기억하고 느끼는 모든 것은 ‘매트릭스’의 프로그램일 뿐이며, 그렇게 기억되고 감각되는 세계가 바로 1999년의 시간과 공간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1999년)의 현실은 ‘가상현실’이며 우리는 지금 이곳에 있다고 오해하는 것일 뿐이다. 진실을 밝히고 매트릭스와 싸워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주인공들의 임무이다.

이런 틀은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에 대응한다. 이런 이원론은 부정신학의 전통에서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부정신학은 두 세계를 절대적으로 구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배후 세계’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의 부정신학을 따르면 전자는 피조물의 세계이고 후자는 창조주 신의 세계이다. 두 세계의 절대적 차이는 끊임없이 주장되지만, 동시에 그 차이는 끊임없이 부정된다. 진짜 세계에 도달해야 하므로 부정이 시작된다. 하지만 그 부정은 극복될 수 없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파스칼의 저 유명한 외침이야말로 부정신학의 마지막 절규이다.

부정신학은 신학 이론이 아닌 일상적 삶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일반인이야 ‘부정신학’이란 말도 들어보지 못했을 테지만, 그렇다고 부정신학과 무관할 수는 없다. 일상적 삶에 체화되어 있는 부정신학이 문제이다.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공공연하게 신을 믿는다고 말하건 아니건, 우리는 많은 경우 부정신학의 성육신(聖育神)이다. 또한 부정신학의 문제는 동양/서양의 구분과도 무관하다. 경계도 불분명한 우리의 우리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2. 매트릭스의 의미

매트릭스의 의미를 밝혀가다 보면 <매트릭스>가 부정신학의 구도와 동일한 구도에서 논다는 점이 잘 드러난다. 영화 속으로 가보자.

I. “잠을 깨, 네오… 매트릭스가 너를 소유하고 있어.” 트리니티가 해킹을 통해 네오의 컴퓨터 모니터에 찍은 글자이다. 여기에는 매트릭스의 모든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즉 매트릭스 안에 있는 것은 잠과 꿈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이 말의 의미는 뒤로 가면서 더 자세히 펼쳐진다.

II. 네오와 모르페우스가 첫 만남에서 나눈 대화를 보자. “모르페우스: 매트릭스는 모든 곳에 있네. 우리의 주위에, 물론 이 방에도 있지. 자네는 창문 너머로도, 텔레비전에서도 그것을 볼 수가 있어. 출근할 때도, 교회에 갈 때도, 세금을 낼 때도 자넨 그걸 느낀다네. 그것은 자네가 진실로부터 눈멀도록 자네의 눈을 덮어왔던 세상이야. / 네오: 어떤 진실이요? / 모르페우스: 자네가 노예라는 진실 말일세, 네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네는 예속된 채로 태어났어. 냄새를 맡지도 맛을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감옥 안에 갇힌 채 말이야. 마음의 감옥 말일세.” 실상 세상은 감옥이고 우리는 노예인데, 우리는 매트릭스 때문에 그 진실로부터 눈멀게 되었다는 것이다.

III. 몇 가지 사건을 겪고 난 후 네오는 매트릭스 ‘바깥’으로 벗어나 ‘진짜 세계’에 도착한다. 여기서 시공간과 실재의 혼동이 일어난다.

우선 시공간의 혼동. “네오: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죠? 여기는 어디죠? / 모르페우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이 언제냐는 것이지. / 네오: 언제죠? / 모르페우스: 자넨 지금이 1999년이라고 믿고 있지. 그러나 지금은 대략 2199년쯤이야. 나도 정확하게 몇 년이지 알 수 없어[…]. / 네오: 그건 불가능해요. / 모르페우스: 난 자네에게 진실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네오. 진실은 이것이라네. 자네가 살아온 세계는 거짓이었다는 것이지.”

그 다음 실재의 혼동. “네오: 이건 진짜가 아니죠? / 모르페우스: 그럼 무엇이 진짠가? 자네는 실재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자네가 느끼는 감각은… 예를 들어, 자네가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고, 보는 것, 그리고 자네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자네의 뇌에 의해 해석된 전기 신호가 아닌가? 여기는 자네가 알고 있는 20세기말의 시카고의 모습이네. 이 시카고는 우리가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신경에 영향을 미치는 시뮬레이션의 한 부분으로만 존재하고 있다네. 자네는 실제 영토에서 산 게 아니네. 컴퓨터 안에 있는 기억의 공간에서 산 것이지.” 그 동안 살아온 세계는 가짜이고 매트릭스가 줄곧 우리를 속였을 뿐이라는 것.

매트릭스는 진짜 세계와 가짜 세계를 구분해주는 준거이다. 매트릭스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배후이다. 매트릭스 안에서 벗어나 매트릭스 바깥으로, 옆으로 나와야 진짜 현실을 살게 된다(“트리니티: 진실은 저 밖에 있어, 네오. 진실은 너를 찾고 있어. 네가 원한다면 진실은 너를 찾아낼 거야.”). 진짜 세계로 가기 전 매트릭스 속(가짜 현실)에 있던 네오가 기억하고 느낀 모든 것은 가짜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는 거짓이다. 따라서 진짜 세계로 가기 전까지는 생의 의미는 없다. 누군가에, 무엇인가에 속고 있는 것일 뿐이기에. 이런 오랜 구도가 디지털 문명이라는 첨단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매트릭스>는 Science의 탈을 쓴 FICTION이다.

 

3. 감각은 감각을 반박하고, 믿음은 진실로 탈바꿈하다

진짜와 가짜의 구분은 서구에서만 해도 오랜 역사를 지닌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데카르트의 회의를 거쳐 계속해서, 우리는 실제로는 기만당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진짜에 기대어 가짜인 현재를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이 반복되어 왔다. 매트릭스와 진짜 세계의 경계에서 모르페우스는 묻는다. “현실 같은 꿈을 꾸어본 적이 있나, 네오? 꿈에서 못 깨어나면 어떻게 하지? 꿈과 현실을 구별할 수 있겠나, 네오?”

이런 의심 상황에서 진짜가 진짜라는 것을 보증해주는 증거가 필요해진다. 놀랍게도 <매트릭스>에서 구분의 기준은 ‘봄’이다. 매트릭스가 무엇인지는 말로는 알 수가 없고 직접 봐야만 알 수가 있다. 그것을 보면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살 수 없게 된다. “트리니티: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그것을 봐야만 해. […] 일단 그것을 보면 모든 것은 변할 테니까. 너의 삶과 네가 사는 세상은 예전 그대로 있지 않을 거야.” “모르페우스: 불행히도 매트릭스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말해줄 수 없네. 직접 그것을 봐야만 해.”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놀라운 일이다. 감각은 감각에 의해 반박된다니. 어떤 감각이 진짜란 말인가? 어떤 봄이 진짜란 말인가?

이런 눈속임이 일어난 것은 부정신학이 기본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네오: 아니야, 믿을 수 없어! 이건 말도 안 돼! / 모르페우스: 믿기 쉽다고 말하진 않았네, 네오. 단지 이것이 진실이라는 걸세.” 사실상 옛 믿음을 대체하는 것은 새로운 믿음인데, 모르페우스는 그것을 ‘또 하나의 믿음’이라고 부르지 않고 ‘진실’이라고 부른다. 이런 악순환이 해소되지 않는 이상, <매트릭스>는 플라톤이 설정하면서 빠진 문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못하다.

 

4. 부정신학의 본질

‘숨은 신’이라는 역설 중의 역설은 많은 문제를 내포한다. 창조주 신은 피조물 세계를 창조했지만 세계와 단절했다는 것(그러나 언제?). 단절이 필수적인 까닭은, 절대적 단절이 없이는 두 세계 사이의 구분이 없어져 하나의 세계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유일하고 온전한 신은 피조물 세계의 불완전함이 완전히 결여된 존재이다. 이처럼 신은 ‘부정의 길(via negativa)’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두 세계의 연관이라는 문제가 영원한 의문 속에 갇혀버린다. 이를 뼈마디까지 세밀히 살펴보자.

존재론적으로 신은 절대적 일자(一者)이며, 다자(多者)인 피조물 세계를 초월해 있다. 존재론적 이원론. 신만이 진짜로 존재하며, 좋은 쪽은 신의 쪽이다. 피조물의 다양성, 다수성은 가짜이며 무(無)에 다름 아니다. 이건 나쁜 쪽이다. 이 두 세계의 절대적 단절을 유예하는 다른 모든 설명은 눈속임이다. 간혹 ‘진짜 존재’의 대립으로 ‘덜한 존재’라는 표현을 호출하기도 하지만 이는 제 무덤 파기이다. ‘존재’라는 말을 일의적(一義的)으로 쓴다면 ‘덜하다’는 말은 절대적 차이를 폐기하고 정도의 차이를 지칭하는 말이 되며, 이는 절대적 차이라는 전제를 무너뜨린다. 혹은 ‘존재’라는 말을 일의적으로 쓰지 않는다면 ‘진짜 존재’는 존재의 잉여이고 ‘덜한 존재’는 존재의 부정으로 넘어간다. 따라서 피조물의 세계에서 신의 세계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무(無)밖에 없다. 달리 말해 아무것도 없다.

인식론을 보자면, 유한자인 피조물과 무한자인 신의 인식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유한자는 신을 인식할 수 없으며, 세계에 대한 유한한 인식을 아무리 보태더라도 신의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즉 신의 인식은 인간의 인식과 일의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유한자의 인식은 보존의 대상이 아니라 부정하고 제거하고 초극해야 하는 사다리와 같다. 따라서 모든 인식을 없애야만 신의 인식에 이를 수 있다. 최대한 무식해져야만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지점에서 유한자와 신의 매개를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불성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권력의 썩은 내가 난다.

끝으로 윤리학의 차원을 보면, 부정신학의 궁극적 귀결이 드러난다. 유한자인 자기 자신을 비우고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신에 이르는 길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마태복음의 가르침마저도 부족하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되어야 한다. 이 경우 사랑과 자비는 가식일 뿐이다.

이런 불가능한 기획 밑에 숨어 있는 저 지극한 욕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처음부터 그 누구보다도 큰 욕망이 바닥에 있었다고 부정신학은 정직하게 고백해야만 하리라. 이상이 부정신학의 내적 모순이다.

 

5. 집힌 천국의 상(象)과 제스처뿐인 고민

<매트릭스>가 기존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달라 보이는 부분은 진짜 세계의 상(象)이다. 전통적으로 진짜 현실, 진실의 세계는 좋은 것으로 표상되어왔다. 이를테면 천국. 하지만 <매트릭스>의 세계는 천국의 표상과는 거리가 멀다. 디스토피아. 가령 매트릭스 바깥의 진짜 세계에서 먹는 음식은 맛도 모양도 없지만 매트릭스 세계에서는 산해진미를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천국 또한 지금 이곳 세계의 부정적 상상의 집합 이상이 아니었다(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고 기만이 없는… 곳, 유토피아, 이 현실이 아닌 곳). 정직한 칸트가 말했듯, 사물 자체의 세계는 어차피 알 수 없다. 따라서 저 진짜 세계에 적정 분량의 고통이 양념으로 있다 한들 <매트릭스>의 주인공에게 무슨 문제이랴. 천국에 고통이 없다는 말은 누가 한 말인가?

사이퍼가 고뇌하고 배반하는 것은 진짜 세계의 고통과 가짜 세계의 안락함 사이의 낙차 때문인 것 같다. 그는 마치 대심문관이라도 된 듯하다. 하지만 영화에 잘 드러나 있듯 사이퍼의 고뇌와 배반은 실은 트리니티에 대한 사랑이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인물을 너무 심각하게 고려해줄 필요는 없다.

허면 네오는? 네오는 진짜 세계를 순순히 받아들이나? 세상의 진실을 알고 났을 때 네오는 “그만! 날 나가게 해줘! 난 나가고 싶어!”라고 외치고는 기절한다. 하지만 이런 고뇌는 쉽게 취소될 제스처에 불과하다. 깨어난 네오는 모르페우스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나요?”라고 묻지만, 모르페우스가 “아니. 하지만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그러고 싶나?”라고 되물었을 때 답하지 못한다. 네오는 진짜 세계(또는 진짜 세계에 비추어 알게 된 세계의 실상)가 끔찍하다는 것을 직감하지만, 매트릭스 세계 역시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트릭스를 벗어나기 직전 모르페우스는 말한다. “자네가 여기 온 것은 뭔가를 알기 때문이야. 알고 있다기보다는 느끼는 거지. 왠지 세상이 가짜 같고 거짓 같아서, 그것 때문에 괴로운 거지?” 네오는 정말로 괴로웠다. 처음 모니터에 글자가 찍혀 들어왔을 때에도 네오는 이미 ‘꿈과 현실이 뒤엉킨’ 기분이었다. 요원에게 잡혀가기 직전에 중얼거린 말은 차라리 네오의 일상, 우리의 일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나는 거지? 내가 뭘 했기에? 난 별 볼일 없는 놈이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네오는 애초부터 매트릭스 세계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세상이 괴롭고 끔찍했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Ⅳ. 플롯과 신화, 그리고 믿음의 문제

 

1. 이해 가능성과 플롯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매트릭스>는 대중을 읽을 수 있는 좋은 텍스트일 수 있다. 이때 말하는 ‘지지’란 무엇을 가리킬까? 바로 믿음이다.

이야기에 기반을 둔 모든 예술은 이해 가능성에 의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대 이야기 기반 예술의 전형이었던 비극이 개연성(즉 우리가 있을 법하다고 수긍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점을 잘 포착해내었다. 이 논점을 더 발전시키면, 필연성(일어났던 일을 다룸)을 다룬다고 얘기되는 역사마저도 이야기를 통해 서술되는 한 개연성(일어날 수 있는 일을 다룸)에 포섭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 일어났던 일을 다루는 역사도 허구적인 이야기와 구분되기 어려운 것이다.

개연성, 즉 이해 가능성은 이른바 ‘플롯’에 의해 구성된다. 즉 ‘플롯’은 이해 가능성의 지지 아래에서만 구성된다. 모든 작품이 제공하는 나름의 이해 가능성의 판이 작가와 수용자가 공유하는 믿음의 성격을 규명하는 자료가 되는 것은 이런 연유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SF는 특히 더 그러하다.

여기서 SF 영화가 영상이나 음악 등 이야기 외적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은 논외로 하자. 이해 가능성은 지성적, 논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칸트의 숭고(崇高)는 지성적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중요한 현상이다. 숭고는 이해 가능성의 지평을 넓힌다. 믿음이라는 문제를 놓고 보면, 숭고는 환경의 압박 때문에 기존의 믿음을 변경해 새로운 믿음의 판을 만들도록 자극하는 과정이다. 믿음의 진화.

<매트릭스>에 대한 관객의 열광은 이해 가능성의 지평 또는 믿음의 판이 오늘날 대체로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믿음의 테두리, 신화

다시 돌아와서, 이해 가능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믿음과 환경의 교통이라는 맥락에서 해명될 수 있다. 어떤 현상을 기존의 믿음 체계에 수용할 수 있다면 그 현상은 이해된 것이다. 안티고네가 오빠의 무덤에 흙을 덮는 행위는 ‘혈육애를 실천하는 것이 좋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고귀한 것으로 이해된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위는 ‘근친상간은 나쁘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들이 전제하고 있는 믿음들을 기반으로 경이로운 사건을 만든다면 그것은 이해 가능한 좋은 플롯이 된다.

그런데 애초에 믿음이라는 것이 환경과의 교통 속에서 성립한 것이라면 문제는 다시 허공에 뜨게 된다. 최초의 믿음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점을 얼마나 의식했는지는 몰라도, 오늘날 ‘플롯(plot)’이라 번역되는 말의 원어는 ‘신화(myth)’의 어원인 ‘뮈토스(mythos)’이다. 넓은 의미에서 신화란 믿음의 집합이며, 궁극적으로는 믿음의 믿음 또는 믿음의 테두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의 방식에 따라 신화의 성격도 아주 달라진다. 신화라고 다 같은 신화가 아닌 것이다.

 

3. 신화와 구성주의

가장 논리적이라 일컬어지는 플라톤의 철학 역시도 신화에 기반하고 있다. 플라톤의 저술은 대부분 주인공인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의 반대자,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지지파가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가 변증술(dialektike)이다. 대체로 대화의 주재자는 소크라테스이며 소크라테스 서클의 동의 속에(‘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야기는 거침없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의 반대자는 배제되거나 소크라테스 서클로 편입된다. 배제와 포함은 희랍어라는 언어, 소크라테스 서클의 신념, 소크라테스 서클 속에서의 이해 가능성 등을 잣대로 일어난다. 특히 소크라테스 서클의 신념은 대화 말미에서 소크라테스가 펼치는 신화 속에 농축되어 있다. 예컨대 주요 대화편의 말미에는 ‘우리가 이런 믿음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지하는 신화가 등장한다. 요컨대 혼돈 위에 신화의 울타리가 있고, 이 울타리 안에 철학이 견고하게 서 있는 모양새이다.

플라톤 철학의 이런 구조는 모든 철학에서 발견된다. 신화 즉 기초적인 믿음이 없는 철학은 없다. 들뢰즈는 철학의 이러한 성격을 ‘구성주의’라 부른다. 플라톤의 경우를 보면 ‘이데아’의 절대성을 주장하기 전에 ‘이데아’라는 개념을 발명해야만 했다는 것. 동시에 그 개념이 논의될 수 있는 판을 창조해야만 했다는 것. 이 판의 성격은 바로 신화에 각인되어 있다. 이때 신화는 ‘어떤’ 논리, ‘어떤’ 철학, ‘어떤’ 이해 가능성, ‘어떤’ 개연성이 딛고 있는 ‘판’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모든 인간이 서 있을 수 있는 동일한 판이 있을 수 있는가, 라는 보편성의 근거 문제가 뒤따라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고가 믿음, 신화에 기반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온통 단일한 색조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무(無)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는 여전히 궁극적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4.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니힐리즘의 문제 제기는 곧 우리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때 믿는 내용의 확실성도, 믿음의 진실성 여부도, 믿음이 진짜일 확률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다. 믿음의 무한 퇴행을 끊는 믿음이 문제인 것이다. 니힐리즘이 제기한 문제 상황에 대한 유일한 답이 그것이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하지만 앞서 암시했듯이 <매트릭스>는 이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진실을 받아들인다. 나는 ‘매트릭스의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것이 ‘유일한 진실’이 아니라는 말일 뿐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경험으로부터의 과도한 추론 때문이다. 감각으로 감각을 반박한 귀결이다.

이처럼 <매트릭스>는 Science FICTION의 전형이며, 스피노자의 용어법을 쓰자면, 상상이지 인식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상상을 인간의 일상 조건으로 파악하지만, 인식으로 승격되지 않는 상상은 배척했다. 스피노자에게 철학이란 ‘적합한 관념’, 즉 인식에 이르려는 투쟁이다. 유감스럽게도 <매트릭스>는 인식에 이르는 걸 방해하는 오락물이다. 그저 방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인식이 아닌 곳으로 우리를 이끌기까지 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Ⅴ. <매트릭스>의 음모론과 모순들

 

1. <매트릭스>의 음모론

<매트릭스>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지만, 거기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음모론이다. 음모론의 견지에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 알 수는 없지만 배후에 뭔가가 있다. 이건 속임수일지도 몰라. 숨은 의도가 뭘까. 최근 영화에 흔하게 나타나는 배경이기도 한 음모론의 기본 골격은, 언제부턴가 자꾸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음모가 있었다…, 라는 구조이다. 이런 종류의 의식은 일종의 피해망상이지만, 오늘날 그 피해망상은 더 증식되고 증폭되어 간다.

<매트릭스>에 나타나는 첫 번째 음모는, 인간에게 승리한 인공지능 컴퓨터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인간을 배양하면서 인간을 통제한다는 사실이다. “모르페우스: 기계는 새로운 에너지를 통제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필요했지. 그래서 우리의 과거를 가지고 감옥을 만들었지.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뇌에 연결시켰고,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어. 기계는 인간을 조정해서 본질을 바꾸어버린 거야, 네오. 이 건전지처럼.”

두 번째 음모는, 매트릭스 안에서는 모두가 요원이라는 사실이다. “모르페우스: 이 안에 누가 살고 있지? 직장인, 교수, 변호사, 목사, 그리고 선량한 많은 사람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체제에 너무 길들여져 있지. 그래서 이 체제를 지키려고 우리와 맞설 것이네. 그래서 매트릭스 안에선 아무도 믿으면 안 돼. 요원이야. 사이버 인간이지. 모든 소프트웨어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지. 이 매트릭스 안에선 아무도 믿어선 안 돼. 잠재적으로 모든 사람은 요원들일 수 있지.” 그래서 영화 속에서 모든 사람은, 경관, 행인, 노숙자 등은 모두 요원으로 변할 수 있었다.

이런 음모론은 현실 세계에서도 제기될 수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피해망상일 뿐이며, 그 해결책은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채로는 찾을 수 없다. 갇혀버리는 음모론.

 

2. 음모론의 두 유형

음모론이 설득력을 갖는 건 그것이 한 시대의 보편적 정서이기 때문이다. 도청, 몰래 카메라, 비밀 정보기관 같은 인위적인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는 음모론을 보편적 정서로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론, 드라마, 영화 등 대중매체가 이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 겪어 왔으며 앞으로도 겪게 될 그런 종류의 음모론이다. 세계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음모. 이것을 ‘내재적 음모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음모론은 무지와 오류추리를 바탕으로 탄생한다. 모든 일은 원인을 갖는다. 그런데 어떤 일의 원인을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이 없는 상태, 즉 니힐리즘 상황에서, 의도를 가진 존재를 배후 원인으로 설정하게 되면, 그것 역시 음모론을 이룬다. 세계 ‘전체’가 음모 속에 있다. 이 경우 초월적인 배후 세계가 상정되며, 그 세계의 의도를 통해 이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 사는 게 힘들고 갑갑할 때, 또는 어떤 이유 때문이건 더 이상 앎을 포기할 때, 우리는 이런 식이 된다. 이것을 ‘초월적 음모론’이라 부를 수 있다.

내재적 음모론은 과학을 통해 극복되거나 해소되지만 초월적 음모론은 부정신학에 귀의한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전자를, <매트릭스>는 후자를 잘 드러낸다.

 

3. 과학이냐 부정신학이냐

어떤 일의 원인을 세계 안에서 찾을 때 과학이 성립한다. 원인을 배후 세계의 의도에서 찾을 때 부정신학이 성립한다. 모르는 원인을 의도의 맥락 바깥에서 찾으려는 실천이 과학이다. 부정신학이 목적론적인 데 비해 과학은 목적론 바깥에서 성립한다.

부정신학과 과학은 원인과 결과, 우연과 필연의 관계를 상이하게 해석한다. 둘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의도나 목적과 연관시키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절대적인 차이가 난다. 또한 둘은 세계 안에서 우연을 긍정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과학은 필연 안에 우연을 포함시켜 우연들의 종합을 필연이라고 여긴다. 부정신학은 우연을 배제하며 의도나 목적을 최종 원인으로 끌어들인다. 과학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배후의 의도나 목적을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천재지변, 질병, 죽음, 전쟁 등 한계상황에서는 위안을 얻기 위해 배후 세계로 도망가기도 한다. 그럴지라도 이것은 인간적인 약함만을 표현할 뿐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증명하고 있지는 않다. 순교의 열정이 순교 행위 아닌 다른 진실을 딛고 있지 않듯이.

과학적 태도를 갖지 않는 한, 음모의 수혜자조차도 음모론의 고리 안에 있다. 음모의 수혜자는 잠정적으로 음모의 피해자이다. 은총과 천벌은 동일한 판에서 일어난다. 음모론은 무지의 판, 즉 노예를 기르는 판이다. ‘모르는 게 약이다(ignorance is bliss)’라는 사이퍼의 깨달음이 바로 부정신학의 귀결임은 앞에서도 본 바 있다. 과학을 통해 무지를 벗어나지 않는 한, 무력(無力)은 증가하고 피동성은 강화된다. 초월적 음모론, 즉 부정신학의 최대 해악이 그것이다.

 

4. 기쁜 앎, 과학과 예술의 결혼

신화를 포함해서 모든 믿음이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믿음의 내용과 방식이다. 가치와 의미의 절대적 근거가 없다는 니힐리즘의 문제 제기는, 없음을 있음의 근거로 삼는 부정신학의 방식과 없음의 없음을 긍정하는 과학의 방식으로 양분되어 분화한다.

초월적 음모론, 즉 배후 세계의 의도나 목적을 믿는 것은 부정신학적 방식의 믿음에 이르게 되며, 자기로부터의 가치 정립이라는 길을 따르면 미학적 방식의 믿음에 이르게 된다. 후자의 길에서 과학과 예술(techne)은 서로를 떠받쳐준다. 과학과 예술의 결혼, 그것이 이른바 기쁜 앎(la gaya scienza)이다. 기쁜 앎은 과학-미학적 태도를 지니는 삶의 에토스이다.

니체는 기쁜 앎과 관련해서 세 가지의 결합을 주장한다. “가인(歌人)과 기사와 자유정신의 통일.” 니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니힐리즘의 극복이며, 실존을 미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극복하고 실존을 감당할 만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5. <매트릭스>의 모순들 : 이원론과 몸

<매트릭스>에서 과학을 벗어나면서 부정신학에 귀의하는 지점을 찾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SF가 비과학적이 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매트릭스> 곳곳에서 보이는 모순들은 세계의 모순성이 아니라 <매트릭스>의 구조적 허점을 드러낸다. 순서대로 몇 가지만 지적해 보겠다.

I. 그 누구도 요원으로 변신할 수 있다. 그런데 몇몇 중요한 장면에서 그 변신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변신은 필요에 따라서만 임의로 이루어진다. 처음에 트리니티 체포 장면에서, 앞서 들어간 경찰들은 왜 요원으로 변신하지 않았을까? 영화를 다 본 다음에야 들 수 있는 의문이다. 감독은 마치 선생처럼 관객을 시험하고 있었다.

II. 잡혀간 네오가 요원의 요구를 거절하자 네오의 입을 눌어붙게 한다. 이 힘은 어디서 왔을까? 왜 다른 경우에는 이런 초능력이 발휘되지 않을까? 눈요깃거리를 찾던 제작진이 조잡한 컴퓨터 그래픽을 동원했다는 혐의만 남는다. 네오의 몸에 벌레 형태의 추적 장치를 삽입하고 떼어내는 복잡한 과정도 볼거리라는 맥락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관객의 시각적 쾌를 위한 배려.

III. 네오의 몸은 매트릭스 ‘안’에서 매트릭스 ‘옆’으로 어떻게 이동하는가? 빨간 약을 통해 몸의 위치를 추적한 후, 몸을 빼내온다. 하지만 인체 재배 공장에서 갓 나온 네오의 몸은 30년간 사용하지 않은 몸이라고 볼 수 없다. 시각과 근육을 그토록 쉽게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으로나 겨우 가능하다. 몸은 진화의 산물이다. <매트릭스>의 제작자는 진화를 모른다. 치명적인 약점이다.

IV. 네오는 모의 훈련을 통해 온갖 무술을 배운다. 마치 컴퓨터 게임에 익숙해지듯이. 그러나 사실은 배우는 것이라기보다 뇌에 기억을 집어넣는 것이다. 배움이 그렇게 쉬운 것일까. <매트릭스>는 뇌에 기억을 로딩하는 것을 배움이라고 전제한다. 트리니티가 헬기 조종법을 배우는 부분에서 이 전제는 극에 달한다. 하지만 이 전제는 초반부터 배반되고 있었다. 예컨대 모르페우스와 네오가 가상공간에서 대련하는 장면(“모르페우스: 어떻게 내가 자넬 쳤지? / 네오: 당신은… 당신은 너무 빨라. / 모르페우스: 자넨 이 공간에서 내가 빠르고 강한 것이 나의 근육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자네, 지금 공기를 마시고 있다고 믿는가? 네오. 여기는 가상이야. 마음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몸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야.”) 많은 교훈을 주는 듯한 이 대목은 배움이란 곧 기억의 로딩이라는 전제를 미리부터 깨고 있다. 여기서는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 훈련의 전부인 듯 얘기된다. 그러나 헬기 조종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애초부터 훈련이란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

V. 몸과 마음의 전도된 관계는 다음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네오: 그럼 매트릭스 안에서 죽으면, 여기서도 죽나요? / 모르페우스: 마음 없이는 몸도 살 수 없지.” 이 대화는 고층 건물 사이를 뛰어 넘는 시뮬레이션 장치에서 깨어난 네오가 그 때 받은 상처로 입에 피가 고이자 놀라서 던진 질문과 모르페우스의 답변이다. 요점은 몸이 마음의 부수물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는 점이다. <매트릭스> 내부에서 몸에 의미 있는 역할이 부여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아니 딱 한 번 있긴 한데, 거의 마지막 부분이다. 매트릭스에서 죽은 네오의 몸은 현실에서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서 네오는 매트릭스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이것은 기적이 아니라 순리이다. 그 당연함이 <매트릭스> 전체에서 거의 무시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VI. 뭔가 그럴 듯한 교훈을 주고 있는 듯한 ‘수저 휘기’ 장면도 왜곡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수저는 없고 다만 휘는 것은 마음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몸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인 몸 말이다. 영화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듯 접근한다. 그간 인류가 범했던 실수를 반복하면서.

 

6. 왜?

부정신학, 존재론적 이원론, 초월적 음모론, 진짜와 가짜의 절대적 구분은 어떤 연유로 탄생했을까?

싫었기 때문이다. 괴로웠기 때문이다. 지겨웠기 때문이다. 아팠기 때문이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이 많았기 때문이다. 복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조리 부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저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몰랐기 때문이다.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거가 현재에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 절대적 단절의 욕망이 없는 그곳을 있는 이곳보다 더 좋은 곳으로 상상해 내었다. 그리고는 속았다고, 누군가 우리를 기만했다고 자위했다. 연민에 휩싸여 저 혼자 불쌍하다고 울었다. 모든 연민은 자기연민일 뿐이다.

그렇기에 삶이라는 심급이 규정적이라고 니체는 결론 내렸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Ⅵ. 믿음과 가치

 

1. 모든 것은 진실이다

우리의 믿음이 가짜라면? 이 또한 섬뜩한 물음이다. … 그렇다면, 모든 것이 상실된다. 믿음의 대상은 물론 믿음의 주체도 위험하다. 주체 또한 믿음의 다발이므로. 이 위험이, 아니 불안이, 사람들을 진짜에 대한 열망으로 몰아갔다. 진짜와 가짜의 대립은 실존의 불안에 대한 하나의 발명품-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진짜와 가짜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가짜는 진짜와 함께 발명되고 명명된다. 두 개의 감각을 비교하고 선택함으로써, 두 개의 믿음을 비교하고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진실과 거짓이 결정된다. 어느 편이 진실로 평가되는가? 당연히, 좋은 쪽이, 좋다고 여겨지는 쪽이. 거짓은? 싫은 쪽, 싫기 때문에 나쁘다고 여겨진 쪽이다. 진실이 믿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진실을 낳는 것이라면, 모든 것은 진실이다.

베르그손이 지적한 것처럼 본래는 가짜 물음과 진짜 물음의 구분만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가짜 답과 진짜 답 사이에서만 헤맨다.

 

2. 믿음과 가치

진짜 다이아몬드와 가짜 다이아몬드가 있듯이 진짜와 가짜가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다. 물론 과학의 차원에서는 진짜와 가짜가 존재한다. 기준에 부합하는지를 측정해보면 되니까. 경도를 측정했을 때 둘은 분명히 가려진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진짜와 가짜를 너무 확대 적용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가치이다. 유리를 자르는 일과 관련해서 진짜 다이아몬드와 가짜 다이아몬드가 똑같은 기능을 한다면 그 둘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그렇다면 34,000프랑짜리 다이아몬드와 500프랑짜리 다이아몬드의 가치 차이는 어디서 올까? 하나는 보석이고 다른 하나는 아니라고? 하지만 목걸이를 보자. 가짜 다이아몬드를 진짜로 믿고 빌렸던 여자가 있다. 파티를 화려하게 마치고 나서 그걸 잃어버렸다. 진짜 다이아몬드를 사서 돌려준 후, 10년을 뼈 빠지게 일해 빚을 겨우 갚았다. 하지만 뒤늦게 원래의 다이아몬드가 가짜임을 알게 된다. 화려한 파티는 무엇이고 눈물의 10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아 시간이여!

여자가 가짜를 진짜라고 믿었던 데에 문제가 있을까? 오히려 어떤 것이 ‘가짜가 아닌 진짜’라는 믿음이 문제였다. 가짜를 진짜로 믿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것을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믿은 것이 문제였던 것. 이때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어디서 왔는가? 오직 그 여자의 믿음에서. 삶에서 작용하는 중요한 가치란 대부분 이런 성격을 띤다. 가치란 가치 부여에서 성립한다. 가치 부여, 그것은 곧 믿음의 창조이다.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믿는 행위도 허구이며 따라서 가짜이다. 니체가 간파했듯이, 가짜는 가장 바탕에 있는 권력이다.

믿음은 인식과 증거에 의해 변하기보다 다른 믿음에 의해 변한다. 물론 인식의 누적이 다른 믿음을 낳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믿음과 믿음의 관계이지 믿음과 인식의 관계가 아니다. 득세한 믿음, 힘이 실린 믿음은 곧 법이다. 많은 경우 법은 자연의 법에 기반을 둔다고 주장되지만, 자연의 법은 과학의 영역이어서 쉽게 답을 내놓지 않는다. 믿음은 행위에 의해 굳건해진다. 반복은 습관을 낳고, 습관이 된 반복이 믿음이다. 푸코가 간파한 ‘역사적 선험’이 그것이다.

 

3. 뒤집어 본 파스칼의 내기

믿음의 문제를 확률과 선택의 문제로 돌리는 것은 순서의 전도이다.

이와 관련해서 부정신학이 자행한, 부정신학의 본질을 보여주는 유명한 사기극 하나를 보자. 이른바 파스칼의 내기. 파스칼은 우리가 합리적인 선택 상황에 있다고 말한다. 즉 신이 존재할 확률과 존재하지 않을 확률은 반반이라는 것. 그런데 신이 존재할 경우, 신을 믿는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벌을 받는다. 한편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신을 믿건 안 믿건 기껏해야 본전치기이다.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을 믿건 안 믿건 달라질 게 없겠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믿는 쪽을 택하는 편이 유리하다. 따라서 우리의 합리적 선택은 신을 믿는 쪽이어야 한다. 믿으면 최소한 밑지지는 않지만, 아니 구원의 선물이 기대되기까지 하지만, 믿지 않으면 기본이 본전이요, 최악의 경우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파스칼의 추론이다.

이 내기는 철저하게 합리적이지는 못하다. 전제부터 다시 짚고 가자. 우선 신이 정말로 우리를 창조했다면 우리의 모든 것은 신에게서 왔다. 따라서 피조물은 신의 뜻을 거스를 자유의지가 없다.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경우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이제 파스칼의 내기는 의미가 어떻게 바뀔까. 우리는 신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신이 존재할 확률과 존재하지 않을 확률은 절반씩이다. 그런데 신이 존재할 경우, 신을 믿건 안 믿건 그건 우리의 자유의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신을 믿고 안 믿고는 신의 문제이며 우리는 무책임하다. 한편 신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신을 믿는 것은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는 것이고 신을 믿지 않고 마음대로 사는 편이 더 재미있다. 파스칼의 내기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마음대로 사는 편이 더 낫다는 것. 요컨대 우리는 믿고픈 것을 믿을 뿐이다.

들뢰즈는 파스칼의 내기에서 내용보다 에토스에 주목했다. 내기를 꾸며내는 데 있어 파스칼의 삶의 태도를 보는 것이 더 근본적이라고. 처음부터 파스칼은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었다.

 

4. 예언의 역설

부정신학의 틀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 <매트릭스>는 뜻밖의 이질적 요소 하나를 내포하고 있다. 예언의 역설. 예언자 오라클은 네오에게 메시아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네오나 모르페우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오라클은 다음 두 갈래길 중 두 번째 길을 예언했던 것이다. (1) 네오는 메시아이다―그리고 네오와 모르페우스 둘 다 살 길이 생긴다. (2) 네오는 메시아가 아니다―그리고 둘 중 한 사람은 죽게 된다. 형식 논리적으로 보면 (1)과 (2)는 갈림길이다. 오라클의 예언이 적중했다면 영화는 시시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기가 막힌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3) 네오는 자신을 메시아가 아니라고 믿었지만(즉 오라클의 예언을 믿지만), 자신의 목숨을 버릴 각오로 모르페우스를 구하러 떠난다. (4) 그런데 기적인지 네오와 모르페우스는 둘 다 살게 되며, 네오는 메시아임이 증명된다(즉 오라클의 예언은 틀린다).

(3)에서 (4)로 이행하는 길은 (1)과 (2)의 갈림길과는 전혀 다르다. <매트릭스>는 (1)과 (2)의 모순 관계가 (3)에서 (4)로의 변신 관계로 바뀌는 지점에 믿음, 희생, 선택 등 모호한 덕목을 집어넣는다(모르페우스는 네오 자신을 끝까지 메시아라고 믿음 → 네오는 자신을 위해, 모르페우스 자신의 믿음을 위해 희생한 모르페우스에 감동함 → 네오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선택함 → 모르페우스를 구해냄 → 네오가 메시아임이 증명됨).

모르페우스는 이 과정을 이렇게 합리화한다. “그녀[오라클]는 단지 필요한 말을 했을 뿐이야. 자네도 나처럼 알게 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모르페우스는 오라클에게 모든 권능을 부여하고 있다. 모르페우스는 네오가 오라클의 예언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4)가 일어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사태의 핵심은 네오가 오라클을 배신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유대 예언주의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5. 배신과 기만

모순의 신 야훼는 진정한 시험을 던지는 자이다. 많은 경우 야훼는 부정신학의 신이 아니라 내재적인 신이다. 가령 요나는 신의 명령을 거역함으로써 신의 뜻을 성취했다.

네오가 맞닥뜨린 상황도 비슷하다. 네오는 오라클의 말을 믿었지만, 그 믿음을 배신하고 그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 그것이 변신의 원동력이었다. 예정된 운명은 믿지 않는다. 다만 만들어진 운명을 믿을 뿐이다. 숙명론이 운명애로 바뀌는 지점. 파스칼의 부정신학적 내기에서는 이런 식의 위험과 변신은 애초부터 배제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신과 기만의 차이이다. 사실상 이 둘은 섞여있을지라도 원리상으로는 구분된다. 기만은 진짜/가짜의 구분을 최종 원리로 삼는 반면 배신은 진실-진실-진실…로의 미끄러짐을 최종 원리로 삼는다. 둘의 구분은 놀림과 놀이의 구분에 상응한다.

사랑의 문제에서 이 구분이 첨예하게 부각된다.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하며 이별을 고하는 상황을 보자. 기만의 맥락에서 해석하면 여기에는 거짓 사랑, 기만만이 존재한다. 배신의 맥락에서 해석하면 서로 다른 여러 사랑, 사랑의 생성이 존재한다. 그것이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사이의 유명한 의견 차이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컨택트>의 한 장면.

Ⅶ. 페르마의 원리와 운명애

 

1. 페르마의 원리: 순차적 인과를 넘어 목적론으로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물리법칙은 ‘페르마의 원리’이다. 작품에 설명되고 있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그 핵심을 요약해 보자. “그 어떤 가상 경로도 실제로 선택된 경로보다 시간이 더 걸려. 바꿔 말하자면, 빛의 경로는 언제나 최소 시간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로라는 뜻이지. 이걸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라고 해.”

페르마의 원리에는 기이한 점이 있다. 인간은 빛의 굴절을 인과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수면에 도달하는 것은 원인이고, 그 방향이 바뀌는 것은 결과라는 식이다. 그런데 페르마의 정리는 빛의 행동을 목표 지향적인 표현을 써서 묘사하기 때문에 기이하다. 통상적인 물리법칙은 인과적인 데 반해 페르마의 원리는 합목적적이고 거의 목적론적이기까지 하다. 의인화를 통해 달리 표현한다면 이렇다. “빛은 일단 선택 가능한 경로들을 검토하고 각각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해야 해. […] 광선은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야 해. 목적지가 다르다면 가장 빠른 경로도 바뀔 테니까. […] 목적지가 없다면 ‘가장 빠른 경로’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지지. 그리고 해당 경로를 가로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그 경로 중간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예를 들면 수면이 어디 있는지 등의 정보도 필요해. […] 그리고 광선은 그런 것들을 사전에 모두 알고 있어야 해. […] 빛은 먼젓번 지점을 향해 출발한 다음에 나중에 진로를 수정할 수는 없어. 그런 행위에서 야기된 경로는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니니까. 따라서 빛은 처음부터 모든 계산을 끝마쳐야 해.”

인간이 통상 받아들이는 물리적 성질은 “주어진 한 시점(時點)에서 어떤 물체가 가지는 성질”이며, 이런 성질은 “순차적이고 인과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어떤 순간이 다음 순간을 낳고, 원인과 결과는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을 만들어낸다.” 반면 작중 외계 생명체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물리적 속성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의미를 가지며, 목적론적인 사건 해석으로 이어진다. “사건을 일정 기간에 걸쳐 바라봄으로써 만족시켜야 할 조건, 최소화나 최대화라는 목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의 상태를 알아야 한다. 원인이 시작되기 전에 결과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페르마의 원리

요컨대, 페르마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행동이 일어나기 전에 어디에 도달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광선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선택하기 전,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2. 페르마의 원리와 SF

페르마의 원리는 잘 알려진 물리법칙이다. 하지만 이 물리법칙은 통상적인 유형의 물리법칙과 달리 인과율을 뒤흔들며, 목적론을 지지한다. 작가가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착목한 점은 물리법칙 안에서의 이러한 충돌이며, 이 충돌이 단편소설을 끌고 가는 추동력이다.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원리를 도입하지 않고 물리법칙 내의 충돌에 주목해서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점에서 「네 인생의 이야기」는 SCIENCE Fiction으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설사 인간의 이해에 바로 와 닿지 않더라도 작품에 순전한 FICTION은 없다. 나아가 양자역학처럼 인간의 지성으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자연 현상이 엄연히 존재한다. 페르마의 원리도 그런 자연 현상을 기술하는 물리법칙이다.

페르마의 원리를 ‘목적론’이라고 표현할 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여기에서의 목적은 의도나 초월성과 무관하다. 목적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목적임이 확인될 수 있다.

 

3. 자유의지와 운명애

어떤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 행동의 끝/목적(telos)을 알아야 한다면 그 행동을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만일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을 조금 비튼다면 끝도 달라질 텐데, 그렇다면 목적론은 성립하지 않는 것 아닐까? 「네 인생의 이야기」가 던지는 의문도 그것이다. “자유의지의 존재는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자유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태어날 딸이 스물다섯에 사고로 죽을 걸 알면서도, 아이를 갖자는 남편과 사랑을 나누기로 기꺼이 선택할 수 있을까? 거부했다면, 딸은 죽지 않았을 것이리라. 태어난 적도 없었을 테니. 하지만 화자-주인공은 미래를 도래하게 할 선택을 정확하게 연기(performance)하기로 결심한다.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아는 지금,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은 왜 이렇게 결심하기로 했을까? 보통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존재한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언어는 행위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오스틴이 발견하고 설이 심화한 언어행위이론에서 따르면, 수행문(performative)은 말을 통해 행위를 실현한다. “발화자가 이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말을 입 밖에 내서 말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행위의 경우, 앞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 수행문적 언어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을 실행하는 것과 등가이다.” 외계 생명체는 어떤 대화에서든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다.

「네 인생의 이야기」는 목적론을 물리법칙으로 제시한다. 헌데 앞에서 우리가 살핀 바에 따르면, 목적은 과학이 아닌 부정신학의 징표였다. 그러면 「네 인생의 이야기」는 부정신학을 표현하는 Science FICTION 아닐까? 이 물음에 답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초월성’이다. 외계 생명체가 목적론적으로 인식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주인공도 그럴 수 있다고 설정한 것은 분명 허구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행동 방식은 외계 생명체의 행동 방식을 재연하고 있기 때문에 외계 생명체를 대변할 수 있다. 관건은 외계 생명체에게 목적론은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있다.

작가가 어떤 용어를 선택했건 간에 더 중요한 것은 용법이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목적은 초월자가 설정해 놓은 것이 아니다. 선형적인 시간에서 목적은 끝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끝에 이르는 과정의 매 순간 행하는 행동이 목적을 도래하게 한다. 주인공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매 순간 행하는 최선의 결정은 누가 시켜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주인공은 앎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실천한다.

 

4. 한여름 밤의 꿈

햄릿. 꿈은 진실과 기만을 왕복 운동한다. 손에 묻은 피는 현실인가 환각인가. 죽음은 잠이고 꿈. 매 순간 모든 의문은 괴로움을 축으로 돌아간다.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괴로움이 있다. 순수 사랑의 괴로움. 이 괴로움은 햄릿의 괴로움과는 격을 달리한다. 그것은 괴로움조차도 달콤한 사랑 속으로 녹아들게 만드는 한여름 밤의 꿈이다. 여기에는 진실과 배신은 있어도 착각, 기만은 없다. 모든 것이 진실이다. 모든 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배신은 기만이 아니다. 혹은 기만은 배신의 작은 액세서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욕망과 생산의 흐름이 있는 것이지 눈속임과 눈가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꿈은 진실에서 진실로 연결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 요정들은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도록 꼬드긴다. 요정들의 실수조차도 요정들의 책임은 아니다. 그래서 숲 속 요정들은 인간들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과 더불어 노는 것이다. 놀림과 놀이의 기묘한 역전. 그것이 한여름 밤의 꿈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

Ⅷ. 나가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와 테드 창의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비교함으로써, 과학적 원리에 기반을 둔 SCIENCE Fiction과 비과학적 상상에 기인한 Science FICTION의 차이를 해명했다. <매트릭스>가 전제하는 숨은 세계상은 이 세계의 삶을 저하시키는 부정신학에서 왔다. 반면 <네 인생의 이야기>는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데, 이는 니체의 ‘운명애’ 개념과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단일하게 SF라고 칭하는 장르가 실은 두 가지 이질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글을 맺기 전에 한 가지 더 짚고 갈 사항이 있다. <매트릭스>는 세계상의 측면 말고도 ‘인공지능’에 대한 오해를 심화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현재와 근미래의 인공지능은 영화 속에서 상상된 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요컨대 인공지능은 알고리즘의 면에서나 공학적인 면에서나 ‘자율적 에이전트’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의 인공지능을 현실로 믿게 되면, 더 긴요하고 절박한 논의는 어려워진다. 반면 실제에 기반하고 있는 테드 창의 인공지능 논의는 우리의 현실을 고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인공지능을 둘러싼 <매트릭스>와 테드 창의 차이를 살피는 일은 다른 지면으로 남겨두겠다.

 

참고문헌

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동아시아, 2017.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 엘리, 2016.

테드 창, 『숨』, 김상훈 옮김, 엘리, 2019.

Deleuze, Gilles,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UF, 1962, pp. 42-43 참조.

_____________, Logique du sens, Paris : Minuit, 1969.

Deleuze, Gilles & Guattari, Félix, Mille Plateaux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2, Minuit, 1980.

Nietzsche, Friedrich, Kritische Studiensausgabe, Giorgio Colli & Mazzino Montinari (eds.), Walter de Gruyter & Co., 1999.

Ricoeur, Paul, Time and Narrative, vol 1. trans. Kathleen McLaughlin and David Pellauer.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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