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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스키부대는 정말 소련군 전차 포신에 총을 들이밀었나핀란드 '스키부대 신화' 보도한 조선일보 칼럼 검증

문재인 대통령이 북유럽을 순방중이던 지난 6월 15일 조선일보에 '[터치! 코리아] 대통령이 핀란드서 꼭 봐야 했던 것'이란 칼럼이 실렸다. 이 칼럼은 약소국이 인접한 강대국에게 지나치게 얕보이지 않으려면 결연하게 맞설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과거 구소련에 맞서 2차례나 전면전을 벌여 싸웠던 핀란드를 그런 모범적인 사례로 들고 있다.

사례 제시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없다. 하지만 핀란드군이 압도적인 소련군을 상대로 해서 어떻게 싸웠는지를 묘사하는 아래 단락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1939년 10월 소련은 핀란드와 발트 3국에 영토 일부의 양도를 요구했다. 핀란드만 거절하자 소련은 다음 달 12만명이 지키는 이 나라를 50만 병사로 침략해 석 달 만에 무릎 꿇렸다. 겨울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에서 소련 탱크에 맞선 핀란드 대전차병 70%가 죽었다. 정작 질린 쪽은 소련이었다. 육탄으로 탱크에 뛰어들어 포신 속에 총을 들이미는 핀란드 스키부대의 용맹함에 치를 떨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어보니 핀란드 병사 한 명 죽을 때, 소련 병사 여덟이 전사했다. 이어진 또 한 번의 전쟁까지 포함해 핀란드인 10만명, 소련군 50만명이 사망했다. 소련은 그 후 핀란드를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유럽연합 가입도 눈감아줬다."

과연 핀란드군은 “스키부대가 맨몸으로 전차에 뛰어들어 포신 속에 총을 들이미는” 강렬한 의지로 소련군에게 맞섰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핀란드 병사들에게 조국을 지키겠다는 결의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전차 포구에 총을 들이밀고 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럼 핀란드군이 어떻게 소련군 전차와 맞섰는지, 소련-핀란드 전쟁의 좀 더 상세한 양상과 함께 알아보자.

겨울전쟁(Winter War)의 발발 배경

전쟁이 시작된 배경은 위 기사에서 요약한 바와 같다. 제정 러시아의 붕괴와 함께 독립한 핀란드를 다시 자기 세력권에 넣으려고 계획한 소련은 핀란드에 영토 일부를 할양하고 소련이 중요한 항구와 도시에 주둔군을 둘 수 있게 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핀란드는 수백 년에 걸쳐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번갈아 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독립적인 권리들도 빼앗기고 철저하게 러시아에 동화되는 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다 제정 러시아가 전쟁과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독립할 기회를 잡았다.

핀란드인들은 겨우 얻은 독립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같은 위협을 받은 발트 3국은 국경을 맞댄 소련군을 막아낼 전망이 전혀 없었지만, 다행히 핀란드에는 자연이 제공해 주는 방어벽이 있었다. 국경선인 라도가 호수와 길도 없는 북극의 숲이 방어구역을 좁혀주었다.

파죽지세의 소련군

1939년 11월 30일, 소련군 54만 명이 핀란드에 대한 전면 침공을 개시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전선인 카렐리아 지협에 투입한 병력만 25만이었다. 이들은 길어야 열흘이면 핀란드가 무릎을 꿇을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진격했다.

사진1. 소련군의 침공계획

당시 핀란드 인구는 약 370만으로, 핀란드군은 보조부대인 여군 10만과 민병대 10만을 포함해 50만 가까운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쥐어짜 낸 병력 중에 실제 일선에 나갈 수 있는 전투병력은 그중 절반인 15만에 불과했다.

부족한 건 사람만이 아니었다. 핀란드에는 무기도 부족했다. 전투기나 폭격기는 114기밖에 없었고, 전투 가능한 전차는 10여 대밖에 없었으며, 연료는 한 달 분이 고작이었다. 침공하는 소련군은 4천 기에 가까운 전투용 항공기와 8천 대가 넘는 전차와 장갑차를 투입했다.

숫자가 적으면 성능이라도 더 좋아야 할 텐데 그렇지도 못했다. 전투기는 소련군보다 10년 이상 뒤처져 있었고, 폭격기는 손꼽을 만한 대수밖에 없었으며, 총이나 대포는 19세기에 만든 것들도 있었다. 최신 대공포나 대전차포 같은 것도 거의 없었다.

사진2: 핀란드군이 사용하던 FT-17 전차. 시대에 뒤져도 너무 뒤진 탓에 결국 전차보다는 땅에 묻어서 벙커나 토치카로 쓰거나, 견인차로 사용했다.
사진3: 소련군의 T-26 전차

그나마 소련군의 주목표인 카렐리아 지협에는 1939년 여름에 구축한 ‘만네르하임 선’이라는 요새화된 방어선이 있었다. 총사령관 구스타프 만네르하임의 이름을 딴 이 방어선은 대전차 장애물과 호, 벙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나마 시설물 대부분은 흙과 나무로 축조되고 단단한 철근콘크리트 벙커는 많지 않았다.

핀란드군은 주방어선인 만네르하임 선에 10만 병력을 배치하고, 국경과 이 선 사이에 3만여 명을 배치해서 적이 요새선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늦추려고 했다. 교통로가 부족한 라도가 호 이북에는 소련군도 별로 오지 않으리라 보고 남은 2만 명과 민병대를 배치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유감없이 사용했다. 카렐리아 지협으로 들어오는 25만여 명 외에 라도가 호를 북쪽으로 우회하여 만네르하임 선을 후방에서 공격할 조공으로 15만여 명이 따로 움직였다. 그 북쪽에서는 핀란드 중부지방을 파고들어 스웨덴 국경을 향하는 9만 5천 명, 북극해로 나가는 핀란드의 출구를 차단하는 5만 5천 명이 있었다.

개전 후 1주일 동안 핀란드군은 연전연패했다. 소련군 폭격기는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인 핀란드 도시들을 폭격했고, 방어선에 배치된 핀란드군 병사들은 처음 보는 전차에 겁을 먹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대전차포도 제구실을 못 하고 그대로 짓밟혔다.

7일 동안 거침없이 진격한 소련군은 만네르하임 선을 코앞에 두고 정지했다. 그것도 방어에 나선 핀란드군에 막힌 게 아니고 휴식과 재편성, 물자보급을 위해 스스로 정지한 거였다. 다른 3개 방면 공격을 맡은 소련군 부대도 다들 순조롭게 진격했다.

수많은 핀란드 시민들이 소련군을 피해 후방으로 피난했다. 잔뜩 흥이 오른 소련 지도부는 전선 사령관들에게 너무 신이 나서 진격하다가 스웨덴 국경을 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내리기까지 했다. 누가 봐도 핀란드는 패배하고 있었다.

핀란드의 반격, 그리고 전반전의 대승리

여유만만한 소련군이 10일 동안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핀란드군도 전력을 재정비하고 전력을 재수립할 기회를 얻었다. 핀란드군은 강력한 소련군을 막아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함을 깨닫고 자신들이 가진 강점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바로 핀란드의 자연과 사람 자체였다.

핀란드군은 더 이상 소련군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았다. 밤에 소련군이 자고 있을 때 야습을 가해 혼란을 조성한 뒤 철수하고, 숲속에서 좁은 길을 이동하는 소련군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핀란드인들에게 스키와 사냥은 국민 스포츠였고, 이들은 눈 위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숲속에 매복했다가 총탄을 퍼부어 소련군을 쓰러트렸다.

사진4: 핀란드군 스키부대
사진5: 3개월 남짓한 겨울전쟁 기간 동안에 스코프도 없이 소련군 500명 이상을 저격하고, 기관단총으로도 200명 이상을 사살한 역사상 최강의 저격수였던 시모 해위해

주전선이 휴식에 들어간 사이 진격을 계속하던 소련군 조공부대들은 핀란드군의 전술 변경 때문에 큰 타격을 입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탄환이 날아드니 진격하지도 못하고, 부대 간 연결도 유지하지 못했다. 교통로 부족으로 보급도 끊겼다.

여기에 결정타를 먹인 존재가 핀란드의 겨울 추위였다. 러시아도 춥다고 하지만 북극권인 핀란드의 겨울은 러시아 “따위”를 능가했다. 더구나 이 전쟁에 동원된 소련군 병사들은 훨씬 따뜻한 우크라이나, 캅카스, 중앙아시아 등 소련 남부 출신들이 많았다.

추위 속에서 본대와 연결이 끊기고 소부대로 고립된 소련군 병사들은 삽시간에 얼어 죽거나 핀란드군에게 섬멸당했다. 핀란드군은 이렇게 고립된 소련군 소부대를 모티(장작)라고 부르며 각개격파했고, 이 악천후 속에서는 소련군 전차도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12월 17일, 카렐리아 전선에서 소련군 주력이 진격을 재개했다. 이 부대만 승리한다면 다른 전선에서의 패배는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10일 전과 달랐다. 최선을 다해서 싸운 핀란드군은 3일 만에 소련군 전차 239대를 파괴하고 12대 이상을 상처 없이 포획했다.

막무가내로 펼친 인해전술 탓에 병력 손실도 막대했다. 소련군은 다시 전투를 멈추고 한 달 동안 병력을 재편성해야 했다. 핀란드군은 가장 중요한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다른 전선에서도 승리는 이어졌다. 핀란드군의 전과는 놀라웠다. 소련군 2개 사단을 섬멸, 3만 명 가까운 적군을 쓸어내면서 아군은 불과 수백 명의 손실밖에 내지 않기도 했다.

날씨에 힘입어 심기일전한 핀란드군의 분투로 1940년 1월 초에는 라도가 호 북쪽에 펼쳐진 모든 전선에서 소련군의 진격이 멈췄다. 신출귀몰하는 핀란드군과 핀란드의 겨울 추위 앞에서 진격은 불가능했다. 핀란드인들이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 한 전반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사진6: 모티 전술에 궤멸된 소련군이 남긴 잔해

어쩔 수 없었던 후반전의 패배, 그리고 연장전

한 줌도 안 되는 핀란드군에게 소련군이 패배하자 크렘린은 발칵 뒤집혔다. 바로 사령관이 교체되었고, 신임 사령관은 이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확실히 만들기로 했다.

소련군은 새 공세를 위해 9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다. 전차, 항공기, 대포도 대규모로 증강하고 충분한 양의 보급물자도 준비했다. 그리고 핀란드가 펼친 방어전술을 분석하여 이를 깨트릴 방법을 고안했다.

지상군이 한 달 가까이 전력을 재편성하는 동안 소련 공군과 포병은 핀란드군 후방을 향해 엄청난 규모로 포격과 폭격을 가했다. 핀란드군이 전력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후방 기지를 없애버리고 보급로를 끊을 목적이었다. 물론 요새선 자체도 표적이었다.

재편성을 마친 소련군은 2월 1일부터 만네르하임 선에 대한 사전 공세를 시작했다. 철저히 준비한 소련군은 방어선을 차분히 분쇄해 나갔다. 병력에 여유가 있으니 여러 부대를 교대로 투입하면서 적에게 쉴 틈도 주지 않았다. 핀란드군의 사상자는 급증했다.

2월 11일에 드디어 소련군 주력이 공세에 나섰다. 핀란드군은 최선을 다했지만, 근본적으로 전력이 너무 부족했다. 물러나고 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정면으로만 밀어붙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진공로로 삼지 않았던 핀란드만과 라도가 호 위로 우회부대를 보냈다. 호수인 라도가 호는 당연하지만, 염분이 적은 내해인 발트해 역시 겨울이면 얼어붙는다. 소련군은 얼음 위로 전차와 보병을 진격시켰다.

핀란드군도 이런 경우를 대비해 몇몇 섬에 수비대를 두었지만, 바다가 육지가 된 상황에서 소규모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파상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우회를 성공시킨 소련군은 전선에 있는 핀란드군 주력을 완전히 포위할 상태를 갖춘다. 여기에 그동안 핀란드의 강력한 우군이 되어주던 겨울 추위도 끝나고 있었다.

이제 핀란드군에게 희망은 없었다. 이미 전사자 2만 5천, 부상자 4만 3천 명이라는 피해를 내고 있었고 방어선은 뚫렸다. 낡은 무기에 쓸 탄약조차 떨어졌고 도와주는 나라도 없었다. 3월 6일, 핀란드는 모스크바에 대표단을 보내 정전협상을 시작했다.

정확히 1주일 뒤인 3월 13일에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핀란드는 영토의 12%, 산업 능력의 10%를 잃었다. 이로 인해 소련에 대한 강렬한 원한을 품게 되었고, 이는 15개월 뒤 두 번째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를 계속전쟁(continuation war)이라고 한다.

핀란드가 독일과 ‘공동교전국’이 되어 계속전쟁에 뛰어든 이유는 간단했다. 소련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독일 외에는 소련과 싸우려는 나라가 없었다. 독일의 무기 원조 덕분에 핀란드군의 장비는 훨씬 좋아졌다.

독일은 1941년 6월 22일에 대소 공격을 시작했고 핀란드군은 3일 뒤에 공격을 개시했다. 9월까지는 겨울전쟁에서 빼앗긴 땅을 회복했고 12월까지는 방어선을 더 효율적으로 구축하기 위한 약간의 땅을 얻었다. 그리고 2년 반 동안 핀란드군은 더 진격하지 않았다.

핀란드는 자신이 서구 연합국에게 독일과 같은 침략자로 낙인찍힐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핀란드에게 독일과 손을 끊거나 최소한 진격을 멈추라고 압력을 가했다. 사실 핀란드가 더 공격하고 싶었다고 해도 레닌그라드를 구출하려는 소련의 반격을 감당하면서 뭘 이루기는 어려웠다. 독일군이 중부 및 남부전선을 주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북부전선에 배치된 전력이 부족했고, 이미 2만6천 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더 나온 상태이기도 했다.

핀란드는 이대로 현상을 유지하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승승장구하며 소련 땅으로 진격한 독일군은 차츰 다시 밀려났다. 마침내 1944년 여름에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에 다시 나타났고, 핀란드 정부는 또 한 번의 선택을 해야 했다. 항전할지, 강화를 맺을지.

소련군은 여전히 대군이었고 그 전력은 1940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핀란드군은 최선을 다해 싸워서 적을 막았지만, 열세임은 분명했다. 새로 대통령에 취임한 만네르하임은 소련과 강화를 맺기로 했다. 전투에서 핀란드군이 아직 강력함을 확인한 소련도 강화에 동의했다.

9월 19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1940년 3월의 선으로 되돌리고, 전쟁 배상금 3억 달러를 부과하며 핀란드군을 41,500명으로 축소하는 등의 조건이었다. 비록 아직 핀란드 영토에 남아 있는 독일군을 직접 몰아내야 했지만, 이 강화조약 덕분에 소련군은 핀란드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독일군도 핀란드가 단독강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음은 알았고, 노르웨이로 철수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함께 싸웠던 정도 있어서 독일군의 철수 초기는 비교적 평화로웠다. 하지만 북극 지방의 열악한 교통 환경 때문에 독일군이 쌓아두었던 보급품 수송에 시간이 걸렸고, 결국 소련군이 요구한 시한 한에 철수하지 못하게 되었다.

소련군이 독일군 추격을 빌미로 핀란드에 진입할 기미를 보이자 핀란드도 마음이 급해졌다. 재촉이 심해졌고, 충돌이 발생했다. 격분한 독일군은 아직 손에 쥐고 있던 핀란드 영토를 초토화하면서 물러났고, 핀란드군은 어제까지 전우였던 독일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45년 1월까지 벌어진 이 라플란드 전쟁(Lapland War)으로 핀란드의 2차 대전은 끝났다.

전쟁이 완전히 끝났을 때 핀란드는 전사자와 실종자 8만 6천 명을 냈다. 이들과 맞서 싸운 소련군 전사자와 실종자의 숫자는 최소 40만에서 48만에 달한다. 기사에서 주장한 8배보다는 적지만, 5배만 해도 엄청난 전과인 건 사실이다.

소련군은 왜 겨울전쟁에서 고전했을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적을 너무 얕보았고, 경험과 대처능력이 부족했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1937년부터 1938년 사이의 대숙청이다. 이때 많은 장교가 숙청당해서 그 이전에도 질이 그렇게 높지 않던 장교단이 신출내기로 채워지면서 질이 급하락했다. 군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면서 적에 대한 정세 파악도 하지 못했고, 작전 및 보급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으며 상황변화에 대한 대처능력도 부족했다.

한 해 전의 폴란드 분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폴란드가 양면공격을 받고 망해가느라 두드러지지 않았을 뿐이다. 이렇게 역량이 부실해지니 독립을 지키려는 핀란드의 저항 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으며, 작전 수행을 위해 필요한 준비도 충분하지 못했다.

이 글의 단초가 된 전차 문제만 해도 그렇다. 개전 초기 소련군은 지형 파악도, 제대로 된 엄호도 없이 핀란드군 진영으로 전차를 밀어 넣었고, 소련군 전차가 어떻게 전선을 돌파하면 기다리고 있던 핀란드군 대전차 특공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하지만 기사에서와 같은 육탄 공격 따위는 없었다.

포신 속에 아무리 총을 쏴도 전차는 부서지지 않는다. 포탑 안에 있는 승무원을 다치게 할 수도 없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시도한 군대는 일본군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전차병을 죽이겠다고 총검으로 전차 관측창을 찌르거나 일본도로 전차를 베는 짓을 정말로 시도했다.

핀란드군 대전차 특공대는 전술이 달랐다. 전차의 궤도와 바퀴 사이에 통나무나 쇠막대기를 끼워 넣어 전차를 멈춰 세우고, 폭약과 화염병으로 공격해서 파괴했다. “차체를 타고 올라가 포신 속에 총을 들이미는” 행동은 하지도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더 간단한 방법으로는 늪지나 호수의 얼음 위에 위장망이나 풀을 깔아놓는 방법도 있었다. 소련군 전차병이 땅인 줄 알고 그대로 전진하면 얼음이 깨지면서 전차가 내려앉았고, 핀란드 특공대원들은 간단히 전차를 파괴하거나 나포할 수 있었다.

덤으로 말하자면 화염병의 영어식 이름인 ‘몰로토프 칵테일’이 바로 겨울전쟁에서 유래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소련 폭격기들이 헬싱키를 비롯한 민간인 거주구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행동을 크게 비난했는데, 그러자 소련 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몰로토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소련군은 민간인을 폭격하지 않는다. 우리 비행기가 투하한 것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핀란드 인민을 구제하기 위한 빵이었다.”

기가 막혔던 핀란드인들은 소련 폭격기를 ‘몰로토프 아저씨’, 소이탄이 든 케이스를 ‘몰로토프의 빵 바구니’라고 불렀다. 그리고 ‘빵’을 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칵테일’을 만들어 소련 측에 돌려주었다. 이 ‘칵테일’은 겨울전쟁 내내 가장 효과적인 대전차병기로 쓰였다.

하지만 1940년 2월에는 소련군도 보병으로 전차를 엄호하거나 전차들끼리 서로를 엄호하게 함으로써 핀란드군 특공대의 전차 공격을 차단했다. 이후 계속전쟁 때는 독일이 로켓을 쏘는 대전차무기를 대량으로 보내준 덕에 굳이 소련군 전차에 근접하지 않아도 공격할 수 있었다.

덤: 핀란드의 유럽연합(EU) 가입을 소련이 허락?

위 기사는 핀란드의 저항에 탄복한 소련이 핀란드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을뿐더러 심지어 “유럽연합 가입까지도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사실과 다르다. 핀란드는 1952년에 출범한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ECSC)도, 1958년에 출범한 유럽 경제 공동체(EEC)도, 1967년에 출범한 유럽 공동체(EC)도 가입하지 않았다. 이런 기구에 가입하는 것 자체가 서방 진영에 가담하겠다는 확실한 의사표시였기 때문이다.

유럽 공동체는 1993년 11월에 마스트리히트 조약 발효와 함께 유럽연합으로 바뀌었다. 핀란드가 유럽연합에 가입한 때는 1995년 1월 1일로, 소련이 해체된 1991년 12월 26일로부터 정확히 1,101일째 되는 날이었다.

*2019년 6월 19일 오전 10시 45분 1차 수정: <사진5> 시모 해위해 사진이 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교체했습니다.

임영대 팩트체커  steinhof@naver.com  최근글보기
역사작가다. 역사를 주된 주제로 ‘슈타인호프의 함께 꿈꾸는 둥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청소년을 위한 파닥파닥 세계사 교과서>, <한국전쟁 전략, 전술, 무기>, <서프라이즈 세계 역사 미스터리> 등의 역사 교양서와 <봉황의 비상>, <이순신의 나라> 등의 소설을 썼다.

임영대 팩트체커  steinho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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