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정치적 올바름' 반대...그리고 진보언론의 침묵

  • 기자명 뉴스톱
  • 기사승인 2019.07.0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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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보현은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정의당 의견그룹인 진보너머 회원이며, 슬라보예 지젝이나 마크 릴라와 같은 정치철학자들의 글을 번역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다. 몇몇 사람들은 지난 4월, 우파 논객 조던 피터슨과의 토론을 통해 그를 처음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젝은 1989년 첫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으로 데뷔한 이후 왕성한 집필활동을 펼쳐 철학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그는 '에미넌트 스칼라' 제도를 통해 경희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여러 공식 석상에서 한국의 상황을 언급하는 등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슬라보예 지젝과 조던 피터슨의 토론 포스터. 좌측이 지젝, 우측이 피터슨의 사진이다.

 

진보언론의 지젝 선호

그동안 한국의 진보언론들은 슬라보예 지젝을 적극적으로 소개해왔다. 이러한 경향은 관계도 분석(그림 1)을 통해 나타난다. 진보언론인 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가 다른 언론사보다 검색어(“슬라보예 지젝”)와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보수성향의 언론인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아예 관계도 바깥에 위치한다.

<그림 1> “슬라보예 지젝”이 포함된 기사의 관계도 분석(데이터 추출: 빅카인즈)

 

진보언론의 지젝에 대한 선호는 기사 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그림 2). 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는 2000년대 초반부터 지젝에 대한 기사를 써왔고, 2012년에 그 정점을 맞았다. 특히 한겨레는 2016년부터 현재까지 「슬라보이 지제크 칼럼」을 독점 연재하여 지젝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 2> 진보언론의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기사 수(데이터 추출: 빅카인즈)

위와 같이 많은 기사를 통해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철학자가 한국에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튜브나 해외의 언론매체를 통해 퍼지고 있는 지젝의 최근 발언들은 국내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본 기사에서는 진보언론의 지젝과 관련된 보도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지젝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진보언론의 편향적 전달

지난 2016년, 한국일보는 히틀러는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되는가』를 소개했다.

“지젝이 좌파의 노선에서 저 창의적이면서 복잡한 읽기를 해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시리아난민에 대한 유럽의 반응(3장), 자본주의적 사회주의 길을 가는 중국 경제(4장), 그리스 사태(5,6장)에 대한 분석도 마찬가지로 세계의 문제는, 그러니까 자본주의에 있기 때문에 ‘자유로 가는 유일한 길은 무자비한 자본주의적 뿌리 상실이라는 영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히틀러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중

 

해당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지젝의 책은 그동안 그가 집필한 6편의 에세이를 묶어서 출판되었다. 기사는 서두에서 1장의 에세이를 언급하고 있고, 말미에서 3~6장의 에세이를 요약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기사에서 2장의 내용이 빠져있다는 점이다.

한국일보가 누락한 에세이의 제목은 「정치적 올바름의 덫」이다. 지젝은 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의해야 동의하는 것이다’라는 성관계 규칙은 오늘날 두드러지는 자기애적 주관성 개념의 모범사례다. 주관은 취약한 것, 복잡한 규칙들로 보호받아야 하는 것, 그/그녀를 방해할 수 있는 온갖 가능한 침해에 대해 사전에 경고받아야 하는 것으로 경험된다.” 지젝은 성폭력 문제에서 흔히 이야기 되는 “Yes means Yes”원칙을 비판하며, 이러한 태도가 자기애를 바탕으로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보호막이 쳐진 거대한 안전 영역에서 걸어나와 위험하고 불안전한 바깥의 삶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개입하도록 배워야 한다. 우리가 안전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환경 파괴와 새로운 전쟁 가능성에서부터 점점 늘어나고 있는 사회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앙의 위협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이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그러한 태도가 사람들을 퇴보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왜 하이데거를 범죄화해서는 안되는가』 목차 (출처: 교보문고)

 

이번에는 2017년 여성신문에 실린 오피니언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화여대 여성학 강사인 김정선은 페미니즘 언어의 역사...평등차이 그리고 진리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김정선은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보다 더 객관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상충되고 경합하는 다수의 인식주장이 있다면 주변화된 이들이 정치적 투쟁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이 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반성폭력 운동의 피해자 중심주의의 근거였다. 이런 역사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이들은 ‘피해자 제멋대로주의’라고 비아냥거렸지만, 슬라보예 지젝은 역사적으로 진리는 항상 소수의 진리였다고 말한다.”
여성신문 「페미니즘 언어의 역사...평등, 차이 그리고 진리」중

 

그러나 해당 기사에서 인용된 부분은 본문이 아닌 한국어판 서문에 실린 내용일 뿐이며, 그마저도 책의 전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인용이다. 본문에서 지젝은 오히려 소수자의 목소리에 모든 비판을 금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한계가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이 가진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기준은 어떤 입장에서 발언할 것인지에 대한 주관적 입장을 바꾸려 하지 않고 단지 발언 안에 무엇이 담길 수 있는지/없는지에 관한 규칙을 강제하려고만 한다. 가령 흑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지적하지 말아라, 레즈비언 커플이 자녀를 학대한다고 지적하지 말아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여성과 아이를 난폭하게 대해도 그 점을 물고 늘어지지 말아라…. 그러나 이처럼 말하는 내용에 제약을 걸어도 우리의 주관적 입장은 전혀 변함 없다.”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난장이, p. 147.

 

두 가지 경우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지젝의 말을 부지런히 옮겨왔던 진보 언론은 지젝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입장을 소개하는 데는 이상하리만치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나머지 지면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지젝의 최근 발언들을 직접 소개할 것이다.

 

지젝의 최근 발언 소개

지젝의 시튼홀 대학 강연 유튜브 캡쳐

지난 2018년 10월 24일, 미국 뉴저지에 위치한 시튼홀 대학교에서는 정치적 추상주의 작가로서 사무엘 베케트혹은 베케트가 대안 우파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지젝의 강연이 열렸다. 강연에서 지젝은 “나에게 정치적 올바름이란 전형적인 부르주아적 접근방식이며, 계속적으로 경제적 이슈를 모호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좌파는 실제 노동계급과 연결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며, 소수자와 제 3세계 문제만을 선호한다.”고 이야기하면서 경제적 문제보다 문화적 문제를 중시하는 좌파 일각의 행태를 지적했다.

 

또한 지젝은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 진보언론에게 큰 쟁점은 트랜스젠더 화장실에 관한 것이었다. 이처럼 평범한 노동자들에 대한 완전한 무시는 재앙이다. 그리고 내가 버니 샌더스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없었으면 힐러리가 아닌 트럼프에게 투표했을 유권자들을 집결시켰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진보언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샌더스에 대한 기대를 함께 드러냈다.

 

The Philosophical Salon 「성적 계약의 뫼비우스의 띠」에서 발췌

 

지젝의 「성적 계약의 뫼비우스의 띠」라는 칼럼에서는, “미투 운동이 구조적 약자성에 대해 집중하기 때문에, 파워 게임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다.”고 말하며 미투 운동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그리고 “학문적인 토론에서, 만약 내가 흑인 레즈비언의 나에 대한 비판에 반박한다면, 나는 대개 자동적으로 백인 동성애혐오 우월주의자로 의심받을 것이고, 인종적/성적 감수성 부족으로 죄책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오늘날 학계의 분위기를 묘사한다. 그는 또한 “그녀의 구조적 약자라는 위치가 그녀에게 권력을 주고, 백인 남성이라는 나의 구조적 위치가 사실상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고 덧붙였다.

글의 결론에서 지젝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피해자들의 고귀한 투쟁이라는 가면을 쓴 잔인한 파워 게임”이라고 진단한다. 미투 운동부터, 진보 언론, 그리고 학계에 이르기까지. 그의 비판에는 성역이 없다.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에 비판적인 좌파 지식인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좌파 지식인이다. 흔히 진보좌파 진영의 지식인들은 소수자 문제를 중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젝은 이러한 구도를 깨며 좌파가 계급과 경제의 문제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는 소수자 문제에 집중하는 일이 계급투쟁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지적도 서슴지 않는다.

지금까지 한국의 진보언론들이 지젝의 입장을 과연 온전히 전달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언론사가 특정한 성향을 가지고, 그러한 입장에 기반을 둔 기사를 쓰는 일에는 비판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진보언론이 소수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어떤 지식인을 소개할 때는 그 지식인의 의견을 가감 없이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사의 보도는 지식인에 대한 검열과 체리 피킹으로 물들 것이다.

 

쿼츠(QUARTZ) 「슬라보예 지젝은 정치적 올바름이 정확히 편견과 인종차별을 지속시킨다고 생각한다」(2015. 5. 9.) 기사 캡쳐

조던 피터슨과의 토론에서 지젝은 “당신이 좌파라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의무가 있다고 느끼지 말라. 생각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말했다. 앞으로 한국의 진보언론들이 온전한 지젝을 소개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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