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느 여행지가 가장 좋았나요?

  • 기자명 탁재형
  • 기사승인 2019.07.0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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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또 여행 팟캐스트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짐작하시겠지만 “어디가 가장 좋나요?”다. “저는 4인 가족의 가장이고 이번 여름 시즌에 열흘 정도 가족 휴가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다 물놀이를 좋아하고, 예산은 3백만원 정도입니다. 이런 경우 어디로 떠나는 게 제일 좋을까요?” 정도의 정보가 담긴 질문이라면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를 줄 수 있지만, 무작정 어디로 떠나는 게 제일 좋냐는 물음엔 말문이 막히고 만다. 마치 개그맨에게 “웃기시다면서요? 어디 한 번 웃겨 보세요”라고 하는 경우 같달까.

그래도 어찌되었든 이런 류의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하는 길을 가고 있는지라, 질문하는 사람이 멋적지 않을 정도의 대답을 개발해 들고 다니는 중이다. 힌트는 존경해 마지 않는 사진작가 김홍희 선생님의 것으로부터 얻었다. 그분은 “지금껏 가본 곳 중에 어떤 곳이 가장 좋았어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장난기어린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마, 사랑에 빠졌던 곳.” 아, 이 경쾌함. 나의 경험에서 무단히 당신의 행선지를 길어올리려 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의 체험으로 그 곳을 최고의 여행지로 만들라는 선방(禪房)의 죽비같은 시원함. 질문자의 말문이 막히게 만드는 그 정도의 펀치력은 없지만, 내가 개발해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다녀온 곳이요.” 나는 여행컨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다. 내 여행 컨텐츠가 불러일으킬 수 있는 최고의 효과는 타겟을 여행바이러스에 노출시켜, 정신 차려 보니 그 곳으로 떠나고 있게 만드는 일종의 ‘여행 연가시 감염증’일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컨텐츠의 발화자인 나부터 그 곳이 최선의 장소라고 믿고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방금 전 취재를 마치고 온 곳이 최고였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내 대답의 로직인데, 김작가님의 대답에 비하면 한참 비루하다. 아무래도 다른 대답을 더 찾아봐야겠다.

Photo by Clarisse Meyer on Unsplash

이번 휴가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가?’라는 질문을 화두삼아 인터넷을, 서점가를 배회하고 다닐 것이다. 명쾌한 답을 드릴 수는 없지만 행선지를 고르는 대원칙이라면 적당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고 표현한다. 출발의 원점과 지향하는 목적지가 포함된 표현이다. 어디로 떠날지 정하기 위해선, 무엇으로부터 떠나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여행의 원점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인천국제공항? 부산항? 내비에 등록된 우리집?

여행의 출발점으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살기 위해, 재미와는 상관없는 일상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일상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끔씩 그 밖으로 나가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고 돌아와야 한다. 따라서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여행은, 철저히 ‘비일상’을 목적지로 해야 한다. 일상과는 다른 것을 보고, 일상에서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던 감각들을 일깨워 일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에 여행의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얼마나 멀리 떠나야 ‘먼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남미 파타고니아에 가고, 네팔 히말라야의 오지 속으로 들어가야 ‘먼 여행’인 것일까? 여행의 출발점이 일상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멀다’는 개념 역시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잠깐의 산책으로도 일상과는 전혀 다른 감각들을 깨워낼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충분히 먼 여행을 떠난 것이다.

이런 원칙을 세워놓고 나면, 어디로 떠날지를 고르는 문제는 부쩍 쉬워진다. 내가 추천하는 장소는 이런 곳들이다. 먼저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일상적이지 않은 감각이 느껴지는 곳들로 떠나보기 바란다. 이를테면 광활하다는 표현으로도 불충분한 몽골의 초원이라던가, 설산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히말라야의 고산 마을같은. 좋아하는 장소 중에, 네팔의 포카라가 있다. 해발 1천미터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페와 호수를 사이에 두고 안나푸르나 산군(山群)과 마주한다. 맑은 날이면, 병풍처럼 늘어선 설산들이 호숫가에 거꾸로 투영되는 장관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여기서 느껴지는 감각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경험하려 해도 불가능한 것이다. 1천미터 높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8천미터의 산들이 보인다. 하늘로 장장 7km를 솟아오른 벽이다. 늘 보던 산, 늘 보던 자연이 주던 인상을 가볍게 돌파해, 찰나처럼 짧게 살다 가는 나라는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완벽히 깨닫게 해준다. 산으로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그 감각은 나를 압도해 자연의 품에 온전히 안긴 느낌이 된다. 평생을 섬길 군주를 발견한 중세의 기사와 같은 감정이랄까.

Photo by Mesut Kaya on Unsplash

다음으로는 일상의 상식이 깨어지는 곳들을 생각할 수 있겠다.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옆동네에서도, 우리는 상식의 파괴를 경험하곤 한다. 같은 대상을 놓고 다른 어휘를 쓰기도 하고, 물건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하고,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것이 어느 폭 이상을 넘어가면, 우린 당혹감을 느끼고, 자신의 가치체계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분노를 폭발시킨다. 하지만 적어도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자기 상식이 깨어지는 순간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철석같이 옳다고 믿던 것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곳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라는 사람의 식견과 배포는 차원이 다르게 커지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호텔 방을 구하려는 여행자가, 로비에서 묻는다. “두 유 해브 어 룸?” 직원은 아마도 만면에 웃음을 띠며, 고개를 옆으로 까닥일 것이다. 알쏭달쏭한 제스쳐다. 잘 모르겠다는 의미인지, 내 알 바 아니라는 뜻인지 불분명하다. 내 영어를 못알아들었나 싶어, 제스쳐를 곁들여 스타카토로 한 번 더 묻는다. “두. 유. 해브. 어. 룸.” 이번엔 아까보다 더 큰 미소를 지으며 더 큰 각도로 고개를 옆으로 까닥인다. 여행자는 지금 장난하는 거냐며 분노를 터뜨린다. 방이 없으면 고개를 가로젓고, 있으면 앞뒤로 끄덕일 것이지, 옆으로 까닥이는 것은 무어냐며 직원을 윽박지른다. 그는 비일상의 경계에서, 일상에 의존해 행동하고 있다. 고개를 옆으로 까닥이는 것은 서남아시아에서 긍정을 의미한다. 새로운 상식이 적용되는 세계에서, 자신의 상식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이는 방구석을 한치도 떠나지 않은 것이나 진배없다. 철석같이 믿고 있던 세계가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경쾌한 파열음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 나아가 보자. 거기에 당신의 목적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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