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중심에서 멸공, 반미, 박근혜를 '따로' 외치다

광화문 광장에서 진치고 있는 '그들'은 누구인가

  • 기사입력 2019.07.16 08:32
  • 최종수정 2019.12.09 16:24
  • 기자명 이승우 기자
광화문 광장 전경. 촬영: 이승우

광장은 민주주의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고 부자와 빈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졌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한 목소리를 냈다. 광장의 함성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고,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견인했고 2016년 박근혜 탄핵으로 이어졌다. 서울 광화문 광장은 한국사의 중요 순간을 품고 있는 '역사의 기록자'다. 

2019년, 광장은 여전히 시끄럽다. 하루가 멀다하고 집회가 열리고 누군가는 1인 시위를, 누군가는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박근혜를 부르짖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평화통일을 외치고 있다. 지평선처럼 길게 이어진 비슷한 구호의 물결은 눈을 피로하게 만든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거리 주변으로 향하게 된다. 가장자리에는 눈에 익은 천막이 진을 치고 있다. 족히 수개월은 된 것 같다. 도대체 저들은 누구이고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호기심은 발걸음을 천막으로 이끌었다. 이틀 동안 광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봤다. "무얼 원하시나요?"

세종로 공원엔 노동자들의 절규가

광화문 앞에서 광장으로 걷다보면 정부서울청사와 세종문화회관 사이 세종로공원에 3개의 천막이 보인다. 건너편에서 보면 3개 동만 보이지만, 세종로공원 안에서 보면 2개의 천막이 더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보이는 이 두 천막에는 어떠한 구호도 걸려있지 않았고, 자진철거를 독촉하는 서울시청의 계고장이 붙어있었다. 주변에는 한 때 사용된듯한 천막들과 조형물들이 뒤집어진 채 정리되어 있었다.

주인없는 천막 두 개 동의 모습. 촬영: 이승우
주인없는 천막 중 한 곳에 붙어있는 계고장. 촬영: 이승우

다른 세 천막에는 그들의 외침이 담겨 있는 현수막이 붙어있었다. ①금융노동자 공동투쟁본부의 천막은 정부서울청사와 가장 가까이에 위치해있다. 금융노동자 공동투쟁본부는 은행, 카드사 등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속해 있는 전국사무금융서비스 노동조합,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 연대한 결사체이다. 이들은 자동차, 유통, 통신 등 대형 가맹점들의 카드 수수료 인하협상에 대한 금융위원회의 태도를 비판하며 "재벌가맹점 카드수수료 갑질, 금융당국은 근절대책 마련하라"와 같은 메시지가 적혀있는 현수막을 걸고 올해 3월 21일부터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금융노동자 공동투쟁본부 바로 옆에는 ②실업유니온,영세유니온, 민중민주당 노동자위원회의 천막이 있다. 이 단체들은 3대요구실현철야농성단을 결성하고 2019년 2월 28일부터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이들의 3대요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실업자에게 매월 50만원 수당 지급하라! ▶비정규직 철폐하라 ▶권력형비리범, 친일파재산 환수하라

세종로 공원에 위치한 천막들의 모습. 촬영: 이승우

 

2017년 5월에 세워진 ③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텔지회와 시그네틱스분회의 천막은 이웃해있는 세 천막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풍산마이크로텔(현 PSMC)은 부산에 위치한 반도체 부품 제조기업이고. 시그네틱스는 반도체 패키징을 만드는 회사이다. 두 기업의 노조는 전국금속노조 산하에 있고, 2011년 민주노총 산하의 정리해고 사업장들이 연대해서 투쟁할 때부터 함께했다. 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텔 지회 문영섭 지부장의 말에 따르면, 촛불정국 이후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 질 시기에 전국의 다양한 이슈가 광화문으로 몰리면서 그 부근에 천막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의 천막도 이 때 세워진 것이다. 풍산마이크로텔지회의 경우 근거지가 부산이기에 조합원들이 교대로 서울에 올라오고 있고, 시그네틱스 분회는 여성 조합원들이라 천막에서 잠을 자지는 않는다고 한다. 두 단체는 지금도 회사의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KT 빌딩 앞엔 반미와 평화의 외침이

세종로공원에서 세종대왕상 쪽으로 걷다보면, 건너편 KT빌딩 앞에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는 두 천막들이 보인다. ④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는 반미투쟁과 통일운동 관련 활동을 주로 하는 시민단체이다. 이들은 2015년부터 광화문 광장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해 지금 장소로 천막을 옮겼다. 현재 30여명의 회원들이 교대로 천막을 지키고 있다.

KT빌딩 앞 두 천막들의 모습. 촬영: 이승우

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 대표 박교일씨는 미국의 한반도 지배 전략에 항의하기 위해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힘든 점이 있냐는 질문에 박대표는 더운 날씨, 매연과 같은 환경적인 요소보다도 행인들이 "빨갱이 새끼"와 같은 욕설을 하며 시비를 걸어올 때 힘들다고 답했다. 천막농성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박대표는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 평창올림픽 남북 공동개최 등 시민단체로서 주장해오던 내용들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천막 앞에 앉아 있는 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 박교일 대표. 촬영: 이승우
민중민주당 천막 근처 바닥에 붙어있는 홍보물들. 촬영: 이승우

 

자주평화통일실천연대 천막 바로 옆에는 ⑤민중민주당 천막이 자리잡고 있다. 2016년에 환수복지당으로 시작해 2017년에 당명을 변경한 민중민주당은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정당이다. 민중민주당은 2년 전부터 지금 자리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현재 민중민주당 천막농성(당에서는 천막이 아니라 당사라고 말한다)은 자유한국당 해체, 미군철거 요구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민중민주당 천막은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당원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다. 밤에는 '밤샘필리라이브'라는 필리버스터식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다른 단체와 달리 민중민주당은 미대사관 앞에서 '미군철거', '전쟁연습 반대'와 같은 구호를 내건 1인 시위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업무를 보고 있는 민중민주당 당원. 촬영: 이승우

 

광화문광장 한가운데엔 우리공화당 천막이

건너편 광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세종대왕상 앞, 청계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지난 6일에 다시 돌아온 ⑥우리공화당의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공화당은 태극기 집회를 크게 개최하는 정당이다. 천막 가까이 가보니, 지난달 강제철거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 주변에는 고요한 긴장감이 맴돌았다.(16일 오전 우리공화당 천막은 철거되었다.) 우리공화당은 2017년 탄핵 반대 집회에서 숨진 사람들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2019년 5월 10일 광화문 광장에 천막을 세웠다.

사진은 광화문광장이 아니라 청계광장에 있었던 우리공화당 천막의 모습이다. 촬영: 이승우

 

현대해상 앞엔 문재인 대통령 탄핵열차가

이순신 동상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건너편 현대해상 본사 빌딩 앞에는 ⑦우리공화당이 설치한 기차 조형물과 천막이 있다. 앞으로 가보니 기차는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천막은 태극기열사 사망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 곳은 집회허가 받은 서명운동입니다." 천막에 있는 현수막 문구가 눈에 띄었다. 지난 6월에 시행된 우리공화당의 광화문 천막 철거 행정대집행을 의식한 구호인듯 했다.

현대해상 빌딩 앞 문재인 대통령 탄핵열차. 촬영: 이승우

 

동화면세점 앞 한국전쟁 사진전이

탄핵열차 건너편, 전시된 사진들 위에 꽂혀있는 한국전쟁 참전국 국기들이 동화면세점 건물을 반정도 둘러싸고 있다. 야외전시장 앞으로 가보니, 매주 토요일 이 장소에서 태극기 집회를 개최하는 ⑧대한민국 애국단체 총연합과 일파만파 애국자총연합이 주관한 '6.25전쟁 사진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시는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사진과 글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촬영: 이승우

 

일민미술관 앞 박원순 아들 증인 소환 요구

야외전시장에서 동아일보 빌딩 쪽으로 가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아들 박주신씨 증인소환 촉구와 이를 지지하는 서명운동을 진행하는 천막과 야외무대가 좁은 길목을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⑨자유연대, 자유대한호국단, 턴라이트는 5.18 유공자 명단공개, 문재인퇴진과 같은 구호를 외치고 있는 단체이다. 자유연대 유튜브에 따르면 이곳 천막은 이들 단체의 '베이스캠프'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일민미술관 앞 천막들의 모습. 촬영: 이승우

 

그 옆엔 '한미합동 군사훈련' 재개 요구

우파 시민단체들의 베이스 캠프 바로 옆, 길 건너편에서 열리는 전시와 유사한 사진전이 진행되고 있다. 다른 점이라면 사진 밑에 "한미합동 군사훈련 재개를 선언하라"같은 정치적 구호가 담긴 현수막도 함께 걸려있다는 것이다. 이 행사는 태극기 집회를 개최하는 단체인 ⑩자유한미연합이 주관하고 있다. 네이버 밴드 공지에 따르면 이 단체는 이웃한 천막의 단체와 연합하여 태극기 집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자유한미연합 사진전. 촬영: 이승우

 

동아일보 앞 멸공과 예수를 외치는 사람들

야외전시장 바로 옆 동아일보 빌딩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멀끔한 천막과 신문을 나누어주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⑪멸공진리본부의 천막과 자원봉사자들이다. 멸공진리본부는 현실적인 문제를 위해 멸공을 하는 태극기부대와 달리 성경에 입각해 멸공운동을 하는 단체이다. 이 단체는 작년 8월 북한과의 협상국면을 계기로 멸공진리를 알리기 위해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멸공진리본부 담임 목회자 김정윤씨와 승리새일교회의 집사들이 교대로 이 곳 천막에서 활동하고 있다.

멸공진리본부 담임 목회자 김정윤씨는 멸공진리 운동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힘든 점이 없냐는 질문에 김씨는 자신과 동료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거나 항의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그는 천막에서 활동하면서 멸공진리 운동을 좋아해주고 호응해주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멸공진리본부 천막. 촬영: 이승우

 

덕수궁 앞엔 '박근혜 무죄석방'과 '트럼프 환영'

멸공진리본부 천막에서 마지막 행선지인 덕수궁 대한문 앞 천막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걷다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석방, 트럼프 방한을 환영하는 현수막들과 함께있는 분향소 천막이 보인다. ⑫태극기혁명운동본부(이하 국본)는 세월호 유족 불법사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재수 전 국군기무사령관을 추모하기 위해 작년 12월에 천막을 세웠다. 국본은 태극기 집회를 개최하는 단체 중 하나로, 이 단체의 천막에서는 추모행사와 더불어 박근혜 전 대통령 무죄석방과 같은 메시지들도 주창되고 있다.

태극기혁명운동본부의 천막. 촬영: 이승우.
태극기혁명운동본부의 천막. 촬영: 이승우

 

"이게 사는게 사는게 아니지,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해서 힘들어도 나오는거야 나도 편하게 살고 싶어." 익명을 요구한 국본 관계자는 평생 시위 한 번 참가해보지 않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천막에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정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나와서 이게 할 짓이냐"고 한탄하며 정권이 바뀌면 이렇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광화문 전경. 촬영: 이승우

이틀에 걸쳐 광화문과 덕수궁을 10번 이상 왕복했다. 이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마에 맺힌 땀과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몸의 일부분인냥 늘 안고 있었다. 하지만 천막에 머무는 이유에 답할 때, 이들의 목소리에서 강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평화, 통일, 멸공, 무죄석방... 내용은 모두 달랐지만 모든 대답에서 그들을 천막으로 이끈 간절함이 느껴졌다. 천막에 다녀오고 나서 깨달았다. 보이지 않던 천막들을 보이게 하고 발걸음을 천막으로 향하게 한 건 이들의 간절함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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