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보호무역주의' 미 트럼프도 10건...WTO 제소 실효 있다

  • 기자명 문기훈 기자
  • 기사승인 2019.07.2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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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무역기구(WTO) 일반 이사회가 오늘 열린다. 앞서 정부는 자국산 소재 세 종류(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수출 규제 조치에 나선 일본을 WTO에 제소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23일부터 이틀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WTO 일반 이사회는 그 전초전 격이다. 정부는 일반 이사회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단에게 수출규제 조치의 부당함을 알릴 계획이다.

하지만 WTO 제소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정치권과 일부 전문가에게서 꾸준히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도 그 중 하나다. 17일 <[팩트 체크] 정부, '일본의 수출 규제' WTO에 제소하겠다는데…> 제하 기사에서 WTO 분쟁 해결 절차와 현황 등을 설명하며 국제기구를 통한 문제 해결이 실효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정부 대응이 어떤 효과를 거둘 지 파악하려면 WTO 분쟁 해결 절차와 통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진영 논리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고려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WTO 제소의 실익과 한계를 뉴스톱에서 조명해 본다.

 

1. 일반 이사회에서는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

▶미중 무역갈등도 일반 이사회 의제로 다뤄 

조선일보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를 논의할 WTO 일반 이사회는 어디까지나 ‘총회’ 성격의 형식적인 행사다.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지도 않거니와 개별 사안에 대해 소상하게 입장을 밝히기 어려운 구조다. 일반 이사회에 이례적으로 고위급 인사를 파견하여 ‘여론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정부 방침을 비판한 것이다.

일반 이사회에서 의사결정이 어렵다는 조선일보 주장은 사실관계를 살짝 뒤틀어 WTO 제소 자체가 무의미하게 보이게 하려는 시도다. 우선 WTO 분쟁 절차에 대해 살펴보자. 제소가 이루어지면 먼저 분쟁 당사국은 협의 요청 사유를 서면으로 일반 이사회에 통보한다. 양자협의가 결렬됐을 시 이사회는 당사국의 요청에 따라 분쟁 해결을 위한 패널 설치 (1심에 해당)를 명령한다. 패널이 조정안을 내놓으면 이를 역총의 (reverse consensus) 방식으로 추인한다. 이 때 일반 이사회는 “분쟁 해결 기구 (Dispute Settlement Body; DSB)”라는 이름으로 열리게 된다. 분쟁 해결과 관련해서 실질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은 패널과 상소 기구지만 이를 설치하고 승인할 권한을 가지는 것은 일반 이사회다. WTO가 일반 이사회를 “최고 의사 결정 기구 (highest-level decision-making body)”라고 규정하고 있는 이유다. 즉, 일반이사회는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지만 분쟁해결을 위한 패널 설치라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일반 이사회가 직접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일반 이사회가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기사를 쓴 것이다. 

확인 결과 WTO 일반 이사회에서도 민감한 분쟁 사안에 대한 당사국들의 논쟁이 수 차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미-중 무역 갈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작년 7월 26일 열린 WTO 일반 이사회에서는 미국의 요청으로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규탄하는 내용의 의제가 상정됐다. 논의 과정에서 두 나라 대표단 사이에 매우 구체적인 논쟁이 펼쳐졌음을 발언록 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에 개최된 일반 이사회에서도 대립이 계속되는 것을 두고 블룸버그는 “본래 정적이고 형식적이던 WTO 일반 이사회가 엄청난 논쟁의 장으로 변모했다 (Even the WTO’s normally staid, procedural general council meetings have become epic rhetorical showdowns)”고 평가한 바 있다.  실제로 미-중 갈등을 분기점으로 변화한 일반 이사회의 성격을 감안한 듯 한일 양국 모두 회의에 고위급 인사를 파견한다. 본격적인 소송에 앞서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조성하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그림1> WTO 분쟁해결 절차. 출처: 외교부

 

2. 절차 오래 걸리고 상소 기구도 ‘개점 휴업’?

▶ 대체로 사실이지만 WTO 제소는 대책 중 하나

최종 판결에 이르는 과정이 워낙 오래 걸리므로 국내 산업계의 피해만 커질 것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2심을 관할하는 상소 기구가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라 더욱 그러하다. 미국이 WTO 체제에 대한 항의에 의미로 상소위원 선임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쪽이 상소할 경우 판결이 언제 나올 지 기약이 없으므로 제소해 봐야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WTO의 분쟁 해결 절차는 수 년이 걸리는 ‘장기전’이 맞다 (그림 1 참조). 제소가 이루어질 경우 당사국들은 최대 60일간의 양자 협의를 거친 뒤 2심에 걸친 소송 절차에 돌입한다. 1심은 WTO 산하 분쟁조정기구 (Dispute Settlement Body; DSB)에서 선정된 3인의 패널에 의해 내려진다. 분쟁 당사국의 의견을 수렴해 권고안을 내는데 12개월 정도 걸린다. 당사국 가운데 한 쪽이 판정에 불복해 상소할 경우 7인으로 구성된 상소 기구 (Appellate Body)로 넘어간다. WTO 법규 상으로는 90일 이내에 판결이 내려지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몇 년 이상 소요되기도 한다. 지난 4월 한국 승소 판결로 마무리된 ‘후쿠시마산 수산물 분쟁’도 판결까지 총 4년이 걸렸다. 상소위원 임명이 미국의 거부로 미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대로 간다면 올해 12월에는 7명 중 한명만이 남게 되므로 정상적인 상소심 진행이 불투명하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온전히 WTO 제소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미국과의 협의 등 다양한 방안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림2> 연도별 WTO 제소 건수. 출처: WTO

 

2018년에만 38건...제소에 의한 '강제협의' 가능성

문제는 많은 언론이 이러한 절차적인 한계를 ‘WTO 무용론’의 근거로써 자의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최종 판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주장이 WTO 제소가 아무런 실익이 없다는 결론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일방주의 노선의 대두와 상소심 무력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2018년 WTO 제소 건수는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은 38건이었다 (그림 2). 다자주의에 회의적인 트럼프 행정부만 해도 지난 17년 1월 취임 이후 10건이나 WTO에 제소했다. 상소심이 위기에 처한 만큼 1심에 해당하는 패널 설치가 전에 비해 활발히 이루어졌음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 3). 이는 상소기구의 최종 판결을 상대국에게 관철시키는 것만이 목표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정치와 무역을 연계시키는 전략에 대한 우려가 전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우리의 입장을 공론화하여 일본의 국제적 평판을 떨어트리고 국내 여론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가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은 실무협상을 촉구하는 우리 정부의 요청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WTO에 제소가 이루어지게 되면 가장 먼저 당사국들은 최대 60일동안 양자 협의에 나서야만 한다 (그림 1 참고). 독자적인 대화를 통한 해결이 아직 요원한 상황에서 제소에 의한 ‘강제 협의’ 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그림 3> 차례대로 연도별 WTO 제소, 패널 설치 (1심에 해당), 상소 의뢰 건수

 

조선일보는 정부가 WTO 회원국 대부분이 우리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 낙관하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WTO 일반 이사회에서 대다수 국가가 한국을 지지해 주거나 일거에 문제가 즉시 해결될 것이라 주장한 정부 인사는 아무도 없다. 모두 국면 전환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자외교 노력의 의의를 설명하는 데 그치고 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전략을 다변화해야 한다. 양자협의의 틀에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는 한편, WTO를 필두로 한 다자체제의 이점을 살려 문제 해결을 꾀하는 것 역시 필요한 시점이다.

*2019년 7월 23일 오후 12시 20분 1차 수정: WTO 제소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 "일반 이사회에서 의사결정이 어렵다는 조선일보 주장은 사실관계를 살짝 뒤틀어 WTO 제소 자체가 무의미하게 보이게 하려는 시도다...."로 시작되는 문단을 추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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