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레스와 여운형, 조봉암과 노회찬의 공통점

  • 기자명 김수민
  • 기사승인 2019.07.31 12:4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당과 집권에 도전한 우리는, 그렇소, 사회주의자요”

7월 31일은 프랑스 정치가 장 조레스(Auguste Marie Joseph Jean Léon Jaurès)와 한국의 정치가 죽산(竹山) 조봉암의 기일이다. 세계대전을 막으려다 극우파에게 암살당한 조레스와 가장 닮은 정치인은 몽양(夢陽) 여운형이다. 좌익통합과 좌우합작, 통일국가건설의 상징으로 남은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극우파의 흉탄에 숨졌다. 그의 노선을 좌우가 갈리고 남북이 나뉘어진 이후에도 이어간 이는 '남한에 남은 반공 사회주의자' 조봉암이다. 그가 법살당한 이후 다시 본격적으로 진보정당을 건설하는 데 맨앞에 선 인물은 노회찬이다. 그는 2018년 7월 23일 운명했다. 사회주의 정치가들의 서거는 이렇게 7월 달력에 아로새겨졌다.

이들은 '사회주의자'인가. 아니면 '사회민주주의자' 혹은 '진보적 민주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인가. 그 이유는 이들 가운데 가장 먼저 태어나고 죽은 조레스가 온 생애로 설명하고 있다. 조레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사회주의의 본질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정지시킬 의사가 없다고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 혁명론은 민주주의에서 태어났기에 민주주의를 배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 조레스(좌상단, 이미지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 여운형(우상단, 이미지 출처: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조봉암(좌하단, 이미지출처: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노회찬(우하단, 이미지출처: 노회찬 재단 홈페이지)

‘PT 독재’ 바깥에서 민주주의 공화국을 품은 사회주의

조레스는 PT(프롤레타리아트) 혁명(독재)를, 경우에 따라 선택가능한 하나의 일시적 방법쯤으로 상대화시켰다. 민주주의에서 태어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독재를 연장시킨다면 "곧 국토에 진을 치고 나라의 자원을 악용하는 도당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크나큰 다수'의 '기나긴 혁명'으로 기획했다. 당시 막 혁명에 접근하던 러시아와는 달리 조레스의 조국 프랑스는 이미 혁명을 겪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과 정당, 선거, 의회는 가장 유효한 사회주의운동이 되는 것이다.

몽앙 여운형도 마르크스-엥겔스 사상에 관심을 가진 선구자였다. 그는 <공산당선언>을 1920년대 초반에 번역해서 내놓았다. 다만 여운형의 사상은 복합적이었다. 1919년 11월 27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가진 그의 명연설 일부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나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다." 그가 가진 세계주의, 기독교 신앙, 민족자결주의, 민주주의가 드러난다.

여운형은 고려공산당 활동을 하며 레닌, 트로츠키를 만났고 마오쩌둥, 호치민과도 교류했다. 그러면서도 민족협동전선을 고수했다. 그가 세우려는 국가는 공산주의국가나 공산국가의 동맹국이 아니라, 민족통일 민주주의국가였다. 그는 결국 공산당에 서지 않고, 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의 지도자로 활동한다. "마르크스주의에 찬동하지만 (...) 계급 독재에 대해서는 찬동치 않는다." 조레스가 읊었다고 해도 곧이 들릴 정도다.

조레스가 프랑스의 혁명과 공화주의 그리고 애국심을 기반으로 인민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꾼 것처럼, 여운형은 '조선의 사회주의자'이고자 했으며 통일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지향했다. 조레스가 개혁주의와 혁명주의와 생디칼리즘으로 나뉘어진 프랑스 사회주의 정치세력을 통합하였듯, 여운형도 공산당까지 껴안은 좌익합동을 추구했다. 좌우합작과 좌익합동이 실패하면서 여운형은 조레스와 같이 암살을 맞이했지만, 프랑스에서 사회당과 공산당 둘 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이 모두 조레스를 기리듯이 여운형은 남북 모든 정부의 추모를 받고 있다.

여운형 사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월북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좌익은 죽거나 탄압받고 중도파는 납북당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살아남은 '남한의 사회주의자'가 있었으니 죽산 조봉암이다. 그는 일본 유학기에 사회주의를 접하고 중국에서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며 여운형과 교류했다. 그가 해방 직후 출옥했을 때 여운형이 마중을 나갈 만큼 친밀한 사이였다. 다만 여운형의 출옥이 더 일렀듯 조봉암의 공산당 이탈은 더 늦어지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1959년 법정의 사형선고, 1989년 법정의 사회주의자 선언

조봉암은 박헌영을 비판하며 공산당을 탈당함으로써 좌익통합에 나서지 못한다. 좌우합작에 뛰어들지만 중도우파 지도자 김규식은 조봉암을 불신한다. 공산당 전력 때문이었다. 남북협상에도 참여하지 못한 그는 38선 이남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고 이승만 정권이 임명한 첫 농림부장관이 되었다. 그는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만드는 좌익의 당면과제를 '농지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한다. 사회주의자도 한국정치에서 권력을 잡아 정책을 실현할 수 있다는 커다란 징표였다.

장 조레스는 암살당했지만 후배 정치인 레옹 블룸이 프랑스 총리직에 올랐던 것처럼, 국회 부의장과 장관을 역임한 조봉암도 대통령권력에 다가섰다. 전쟁과 가난의 1950년대에 그는 '피해대중'을 대변하고 '남북통일'을 외치며 이승만에 대적하는 유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한다. 그러나 그는 막상 권력에 다가서면서 벼랑끝에 몰린다. 인촌 김성수 정도를 제외한 보수야당 인사들은 그와의 '민주대동'을 거부했고, 이승만 정권은 그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다. 옛 공산당 동지 박헌영이 북한에서 맞이한 죽음과 흡사한 귀결이었다.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협회 홈페이지 영상 갈무리

조봉암과 진보당은 4.19가 일어나기 전, 1950년대 마지막 해에 죽었다. 그후 한국의 혁신정당 또는 진보정당은 모순과 내분과 굴욕의 연속이었다. 여운형, 김규식, 조봉암의 후계자들은 각기 나뉘어 씨름을 벌였고 본디 극우적이었던 족청 이범석의 후계자들도 '혁신' 정당을 했다. 5.16 이전에는 극심하게 분열했고, 그 이후에는 사정없는 탄압을 겪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대에는 구차하게 '관제 사회주의 정당'을 하거나, 심지어 여당에 들어가 정치적으로 연명하는 인물도 있었다.

이 가운데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싹을 틔워낸 이들은 지하 노동운동 혁명가들이었다. 6월항쟁을 전후하며 인민노련(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이 출범했다. 인민노련은 '인천'보다 '인민'이 더 어울리는 전국적 지하조직이었다. 이들은 당시 학생운동의 주요 흐름인 NL(민족해방), CA(제헌의회), ND(민족민주), PD(민중민주) 등을 소부르조아적이라고 비판했다. 인민노련은 1989년 붙잡혀간 인사들의 입을 통해 법정에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외쳤고, 법정 바깥에서는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꾸렸다.

이들은 동구 국가사회주의의 붕괴와 냉전 해소, 제도권 민주주의의 출발과 기존 재야•학생운동의 쇠퇴를 겪으며, '비합전위정당'을 벗고 합법대중정당인 '한국노동당'으로 갈아입었다. 조레스와 여운형과 조봉암이 걸은 그 길을 이어서 걷기로 한 것이다. 물론 풍찬노숙이었다. 재야 명망가 선배들과 합쳐서 만든 민중당은 1992년 총선에서 해산한다. 마침 감옥에서 나온 노회찬은 '진보정치추진위원회'를 이끌며 기회를 엿본다.

 

사회주의는 비참함에 대한 연민과 분노

진정추 세력은 진보정치연합 결성, 개혁신당 합류, 기성정당인 통합민주당과의 통합과 그로부터의 이탈을 거쳐, 민주노총, 전국연합과 손 잡고 1997년 국민승리21을 창당해 대선 후보를 낸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많은 운동정파를 가장 넓게 아우른 민주노동당이 2000년에 만들어지고 2004년 최초로 국회에 진출한다. 이 모든 과정을 주도한 노회찬은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심지어 보수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사회주의자라고 밝히며, 존경하는 인물로 '레닌, 호치민, 저우언라이'를 들었다.

이후 노회찬의 선택들, 그러니까 ‘민주노동당 분당 반대 - 민주노동당 탈당 및 진보신당 창당 - 2010년 서울시장선거 독자 완주 - 진보신당 탈당 및 민주노동당•노무현 후계세력 일부와의 통합진보당 창당 - 통합진보당 탈당 및 정의당 창당 - 노원에서 동작으로의, 서울에서 창원으로의 지역 이동’ 등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각양각색일 터이며, 그 궤적에 관한 총평도 엇갈릴 것이다. 분명한 것은, 조레스와 여운형과 조봉암처럼, 노회찬은 정당과 선거, 의회와 집권 사이를 동분서주하다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시민들은 "누가 조레스를 죽였는가"라고 노래한다. 이제 7월의 마지막날 한국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여운형은 어떻게 살았는가", "조봉암은 무엇으로 살았는가", "노회찬의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레옹 블룸

 

[참고자료]

막스 갈로 (노서경 옮김), <장 조레스, 그의 삶>, 당대, 2009.

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사회주의와 자유 외>, 책세상, 2008.

이기형, <여운형 평전>, 실천문학사, 2004.

심지연, <인민당 연구>, 경남대학교 출판부, 1991.

박태균, <조봉암 연구>, 창작과비평사, 1995.

정태영, <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역사적 기원>, 후마니타스, 2007.

김철순 엮음, <사회주의자의 실천 1, 2>, 일빛, 1991.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국의 진보 3부작: 제2부 인민노련 혁명을 꿈꾸다!', 2005년 5월 1일 방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