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민족지 시대일보·중외일보 경영하며 독립자금을 대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9.08.13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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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조선인들도 사전을 갖게 된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일제하라는 제약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편찬자들이 말을 모으고, 낱말 카드를 정리하면서 오로지 사전 편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사전 편찬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후원한 민족 지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온 가슴으로 아파한 이우식, 김양수, 장현식, 김도연, 이인, 서민호, 신윤국, 김종철, 설원식, 윤홍섭, 민영욱, 임혁규, 조병식 등은 사전편찬후원회를 만들어 민족어를 모으고 정리해 보존해 지키는 편찬 사업을 지원하고 독려하며 꺼져가는 민족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경남 의령 출신의 이우식이 요즘 가치로 수십억에 해당하는 1만 원의 거금을 홀로 쾌척했다는 것은 지난 글에서 소개했습니다. 이우식은 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습니다. 1966년에 노환으로 서울에서 사거했으니 ‘추서’라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이우식을 잘 알지 못합니다.

경남 의령박물관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특별전에 전시된 남저 이우식 선생. 출처:경남 공식블로그 경남이야기

이우식은 1891년 경남 의령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요즘 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이지요. 어릴 적에는 한학을 공부했지만 동경정칙학원고등학교(正則学園高等学校)를 거쳐 동양대학(東洋大學)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신학문을 접했습니다. 1910년에 나라가 망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부귀를 누리고 일신의 영달을 꾀하며 잘 살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우식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아니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좁디좁은 고샅길을 선택했습니다.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단원으로 활동했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4일 구여순, 최정학 등과 의령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일경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 김효석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식산흥업에 힘쓰는 한편 비밀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습니다.

이우식의 사위 권경태는 추수가 끝나면 장인(이우식)은 돈을 곳간에 박스째 보관했는데, 백산 선생(안희제)이 방문해 하룻밤 묵고 가면 곳간이 텅텅 비었다며, 당시 백산을 통해 해마다 상해로 전달한 돈이 10만 원 정도였을 거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우식은 인재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1920년 진주시립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 당시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1년에는 의령공립보통학교의 증축, 의령공보야학회 등을 후원했습니다.

영화 <말모이>에서 윤계상이 연기한 배역은 조선어학회 대표 이극로다.

 

조선어학회하고의 인연은 이극로를 통해서였습니다. 이극로는 이우식의 2살 아래 동향 후배입니다. 영화 ‘말모이’에서 배우 윤계상이 연기한 조선어학회 대표가 바로 이극로입니다.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철학박사(경제학) 학위를 받고 1929년 1월 귀국해 4월 조선어연구회 회원이 되기까지 이극로의 행적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이우식과 대조적으로 이극로는 찢어지게 가난한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학으로 마산 창신학교를 나온 후, 1911년 4월 서간도로 망명했습니다. 동창학교와 무송현의 백산학교 등에서 교사로 일했고 포수단부대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이우식으로부터 상해로 와서 공부하라는 전갈을 받습니다.

 

이우식의 고향 의령에 있는 송덕비 '이우식 수재 구휼비' 모습.

 

이극로는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에서 공부했고, 독일 베를린대학에 유학해 1927년 5월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학교 안에서 타이프라이터도 찍고, 등사판을 미는 등 이런저런 잡일을 하며 1911년 조국을 떠난 지 16년 만에 이룬 성취였고, 그 뒤에는 이우식이 있었습니다. 훗날 이극로는 잡지 『조광』을 통해 고학생 신분일 때 학비를 대준 ‘이우식 씨의 후의’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극로의 재능을 알아 본 이우식의 후배에 대한 사랑과 조선의 독립을 위한 투자였습니다. 이우식의 고향 의령에는 고인을 기리는 송덕비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인협천이우식수재구휼비’입니다. 선비 협천 이우식이 1925년 여름 큰물이 마을을 덮쳐 사람들이 집을 잃고 산으로 올라가고 길바닥에서 자며 먹지를 못해 죽기에 이르렀을 때, 조와 쌀 수백 포를 전달해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던 사람들을 모두 살린 공을 기리고 있습니다.

송덕비는 본디 관직에 있는 자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삶을 편하고 풍요롭게 했을 경우 왕의 재가를 얻어 백성들이 세우는 것이지만, 더러는 송덕비의 주인공이 사람들을 강요하거나 스스로 세워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휼비’는 물난리를 당한 사람들에 대해 이우식이 느낀 측은지심과 그가 베푼 온정과 덕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966년 이우식 사후에 비문을 쓴 이은상은 “세상에 부유하고서 교만하지 아니하기 어렵고, 그보다도 귀중한 재산을 큰일과 좋은 일에 빛나게 쓰기란 더 어려운 일인데 그는 두 가지 어려움을 모두 행한 이라 우리는 그를 어진 이로 받들어 왔었다. 일찍 나라를 여읜 뒤로 동지들과 더불어 백산 상회를 세워 임시 정부를 돕고 다시 시대일보와 중외일보 등을 창간하여 언론으로 일제에 항거도 했으며...”라고 썼습니다.

 

중외일보 광주학생운동 보도.

 

이은상이 언급했듯이 이우식은 항일 언론인이었습니다. 1926년 시대일보를 경영했고, 1927년부터 중외일보 경영에 참가했습니다. 이우식이 사장이던 시절 중외일보는 광주학생운동사건에 대한 보도에서 ‘원인은 일본학생의 조선여생농락(1929.11.3.)’임을 분명히 했고, “상쟁의 원인은 고보 측에 없다고, 중학생 십수 명이 달려들어 칼로 고보학생의 코를 다쳐(1930.2.21.)”라고 사건의 발단이 ‘고보’, 즉 조선인 학생들이 다니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중학생’ 즉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들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동아일보』가 충돌의 원인에 대해 ‘기차 통학생의 사소한 감정’에 있는 것으로 두루뭉술하게 보도한 것과 매우 대조적입니다.

1942년 10월 18일 이우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의령에서 체포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물 먹이기, 공중에 달고 치기 등등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검찰은 조선어학회가 어문 운동의 가면을 쓰고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국체 변혁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기소했으며, 1945년 1월 16일 1심 법원은 이우식에게 ‘개정 치안유지법 제5조 결사 목적 수행 행위’라는 죄목으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혹은 4년)을 선고했습니다. 이우식은 이미 2년 3개월 동안이나 옥고를 치렀기 때문에 바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대정 8년 향리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 사건에 관계한 일이 있으며 일찍이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젊었을 적부터 알게 된 동향의 피고인 이극로가 제1의 첫머리에 기록한 것과 같이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그 일생을 조선 민족을 위하여 또는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열의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다년간 학비와 생활비를 제공하여 상해와 독일에 유학시키어, 동 피고인(이극로)이 조선 독립을 위하여 활동할 것을 기대하고 있던 자인데 동 피고인(이극로)이 귀국한 후에, 장래의 활동 방침을 결정하기 위하여, 6개월 동안 조선 각 지방을 시찰·여행하는 비용과 동 피고인(이극로)을 중심으로 삼은 전기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소화 6년 1월부터 동회의 간사장이 되어, 그 활동 자금을 제공하여 동 피고인(이극로)을 도와주었다. 독일 유학 중에 준 학비 등을 합하며, 동 피고인(이극로)을 위하여 지출한 금액은 총액이 8,890원에 달하는데, 다시 동 피고인(이극로)의 사업을 원조하기 위하여, (1) 소화 11년 4월경부터 소화 17년 9월경까지에 걸쳐, 경성부 창신정에 있는 당시의 그의 주택과 처소에서, 조선어학회가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삼는 결사라는 내용을 알면서 동결사의 사업인 조선어 사전 편찬의 자금으로 16,140원과, 기관지 발행할 자금으로 1,050원을 조선어학회에 제공하여 그 결사의 목적 달성을 위한 행위를 하였고...
- ‘조선어학회사건 예심종결결정문’에서

 

*참고한 글

이영모, 「나의 할아버지 남저 이우식」

박용규·배석만·이준환, 『남저 이우식의 민족 독립운동』

나주정씨월헌공파종회, 『석인 정태진 전집 (상)』

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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