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미카제는 정말 연료를 반만 싣고, 약에 취해 뛰어들었나

  • 기자명 임영대
  • 기사승인 2019.08.1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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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7월 이후 계속되고 있는 한일 간의 갈등에서 나오는 특징 중 하나는 이번 사건에서 직접 관련된 논점인 강제징용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는 사안도 일본을 비난하기 위해서 활용한다는 점이다. 그중 하나가 가미카제 특공대로, 과거 일본이 보여준 잔혹성과 모순, 퇴행성을 다시 나타낸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상징적인 의미에 치중한 끝에 실제적인 사실과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 인터뷰 : 최재성 / 더불어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위원장 - “자국 기업의 피해마저 당연시하는 태도에서 '가미카제' 자살폭격이 이뤄졌던 진주만 공습이 떠오릅니다.”

 

가미카제가 폭탄을 안고 적함에 뛰어드는 자살폭격이었던 건 사실이다. 자국 기업의 손해를 무릅쓰는 지금 일본 정부의 행동이 특공대원의 목숨을 희생시켜 적에게 폭탄을 명중시키려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행각과 흡사해 보이는 것도 맞다.

또한 지난 9일 뉴욕에서 열린 재선캠페인 모금행사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베 일본 총리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에게 “가미카제 특공대가 술이나 약에 취해 있었느냐”고 물었고 아베 총리는 “아니다. 그들은 단지 조국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답했다는 외신 기사가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단지 애국심으로 연료가 반만 든 비행기에 타서 강철로 된 배(미국 군함)에 날아드는 것을 상상해 봐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언론보도에서 나온 가미카제의 이미지는 얼마나 다를까. 사실과 다른 부분은 어디일까? 사람들이 가장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진주만 공습에서는 ‘가미카제 자살폭격’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공격을 상상한 그림.

가미카제의 시초는 1944년 필리핀 전투

전쟁의 기본은 적을 죽이고 나는 살아남는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군도 처음에는 당연히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전쟁을 했다. 진주만에서도 미 태평양함대를 공격하고 무사히 빠져나오는 게 목적이었지, 자살폭격 따위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처음 가미카제 공격을 실시한 때는 1944년 10월 25일로, 대만 항공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내고 더 이상 정규 항공전을 벌일 여력을 상실한 뒤다. 세키 유키오(關行男) 대위가 지휘하는 자살공격기 5대가 미국 해군 소속 호위항공모함(적 해군과의 정면 교전이 아닌 선단 보호 등을 담당하는 소형 항공모함) 세인트 로(USS St. Lo)를 격침하고 칼리닌 베이(USS Kalinin Bay)를 대파, 다른 2척에 가벼운 피해를 주었다.

일본군이 비행기로 적함을 폭격하는 상식적인 전투 대신 폭탄을 안고 그대로 뛰어드는 정신 나간 작전을 세운 이유는 상식적인 전투가 어려워진 탓이었다. 전쟁은 일본이 처음 예상했던 기간보다 엄청나게 길어졌고, 미국은 풍부한 인력과 자원으로 일본을 밀어붙였다. 항공기를 포함하는 대부분의 무기 성능도 일본군보다 미군 쪽 무기가 우수했다.

전쟁 초기에는 그래도 조종사들의 숙련도로 커버가 가능했다. 일본군 조종사들은 일반적인 사람은 통과할 수 없을 정도의 혹독한 훈련 과정을 거친 데다 중일전쟁 참전으로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다. 실전 경험이 없는 미군 조종사들보다 확실히 우수한 인적자원이었다.

하지만 이런 베테랑 조종사들은 전쟁이 길어지자 계속 소모되어 사라졌다. 1944년이 되면 일본군 조종사 대다수는 이착륙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햇병아리들로 채워졌고, 이런 조종사가 모는 비행기가 미군의 강력한 대공방어망을 뚫고 폭탄을 명중시키기는 어려웠다.

당시 미 해군 항공모함을 공격하려는 일본군 공격기가 직면해야 했던 장애는 아래와 같다.

 

① 미 해군이 장비한 레이더가 다가오는 일본기를 포착한다.
② 전투기들이 적어도 수십 킬로미터 앞에서부터 일본기를 반복 요격한다.
③ 전투기들의 방어선을 돌파한 일본기는 레이더로 조준되는 대공포가 저지한다.

 

이런 장애를 뚫고 미군을 공격하는 건 대전 말기에 들어와 충원된 미숙련 조종사들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필리핀해 해전 중에 벌어진 1944년 6월 19일의 이른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당시, 일본군은 항공기 총 369기를 투입해서 239기를 격추당했다. 그 대가로 올린 전과는 미군기 31기를 격추하고 항모 2척,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에게 가벼운 피해를 줬을 뿐이었다.

안 그래도 속도, 방어력, 화력 등 거의 전 부분에서 성능이 떨어지는 항공기를 타야 하는데 조종사들의 실력까지 이렇게 떨어졌으니, 어차피 정상적으로 폭격하고 살아 돌아올 수 없다면 그대로 폭탄을 안은 채 뛰어들라고 해서 시작한 게 가미카제 특공대였다. 상식적인 군대라면 이 상황에서 더 효율적인 훈련 방안을 강구했을 텐데, 당시 일본군은 조종사를 폭탄을 표적에 유도하는 생체컴퓨터 정도로밖에 취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개전 전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또 그중에서 최정예 조종사들을 동원해서 벌였던 진주만 공습 당시에 ‘가미카제 자살폭격을 했다’는 주장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할 필요가 없고 하지도 않았던 일을 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 기왕 가미카제에 대해 지적한 김에 한국 사회에서 가미카제에 대해 잘못 알려진,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짧게 다뤄보겠다.

USS 에식스 (CV-9)에 자살 공격을 가하는 D4Y 스이셰이.

1. 가미카제는 원래 가미카제가 아니었다.

가미카제(神風)는 원래 일본어 음독으로 “신푸(しんぷう)”라고 읽는 게 맞다. 가미카제 특공대도 원래는 “신푸톳코타이(神風特攻隊, 신풍특공대)”였다. 그런데 전쟁 중에 미국 언론에서 실수로 훈독으로 “가미카제(カミカゼ)”라고 읽어버리는 바람에 가미카제라는 표기법이 역으로 일본까지 퍼져나가 정착되었다.

 

2. 비행기로 들이받는 가미카제보다 먼저 개발된 자폭병기가 있었다.

일본 해군 수뇌부에서는 1943년 초부터 전세를 뒤집기 위한 결전병기로서 유인자폭병기를 구상했다. 그 결과 1944년 초부터 재고로 쌓여 있던 대형 어뢰인 93식 어뢰를 개조해 사람이 탑승하는 유인어뢰를 제작했으며, 가이텐(回天) 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장비로 채용하였다. 이 어뢰가 채택된 시기는 8월 1일로, 세키 대위가 항공모함에 뛰어들기 거의 3개월 전이다. 다만 실전투입은 11월 20일로 항공기 가미카제보다 1달 늦다.

 

3. 사실 진주만에서 자폭한 조종사가 있기는 있었다.

“그럼 가미카제가 있었던 게 아니냐?”고 반박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는 절대 “자살폭격”인 가미카제가 아니다. 애초에 자폭하려고 진주만으로 날아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살공격을 벌인 조종사는 제로센 전투기를 조종하던 이이다 후사타(飯田房太) 대위다. 이이다는 미군 비행장을 공격하던 도중 대공포에 연료탱크를 맞았는데, 철수해도 연료가 없어 항공모함까지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미군 격납고에 격돌하려다가 맨땅에 추락하여 전사했다. 싸우다가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고 뛰어든 것이지, 처음부터 자폭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이이다 대위와 같이 연료가 떨어지거나 기체가 파손되어 귀환할 수 없음이 명확해지자 그냥 적에게 격돌한 조종사들은 숱하다. 심지어 일본군뿐 아니라 미군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이 경우, 처음부터 자폭할 작정이 아니었으므로 가미카제라고 부를 수는 없다.

전쟁 초기 일본군은 이런 귀환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자폭 공격을 가리켜 ‘몸으로 부딪친다.’라는 뜻인 타이아타리(体当たり)라고 불렀다.

 

4. 가미카제 특공기에는 연료를 가득 채웠다.

꽤 오래전부터 세간에는 일본군이 가미카제 특공기에 “목표까지 딱 도착할 만큼만” 연료를 넣었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부족한 연료를 아낄 겸, 조종사가 임무를 피해 도망치지 못하게 할 겸 그랬다는 것인데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특공기에는 연료를 가득 채워 출격시켰다.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1) 목표를 확실히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가미카제 조종사들은 대다수가 초급훈련만 간신히 마친 풋내기 조종사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바다 위에서 목표지점까지 날아가는 해상 항법에 대단히 서툴렀다. 툭하면 바다 위에서 헤매기 일쑤인 이들을 목표까지 안내하기 위해서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 호위 겸 안내를 맡아 따라붙곤 했지만, 도착한 목표지점에서 적군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컸다. 그러면 당연히 <돌아와야> 하니 연료를 가득 채워서 나갈 수밖에 없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조종사와 비행기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낸 전술이 아니다. 적함에 폭탄을 명중시키기 위한 전술이되 그 방법이 비인간적일 뿐이다. 적함에 뛰어들다 죽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바다에 폭탄과 비행기를 버리는 건 일본군 수뇌부에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목표를 찾지 못한 조종사는 일단 귀환한 뒤에 다시 출격하는 게 기본이었다.

첫 번째 가미카제 편대 지휘관이었던 세키 유키오 대위 역시 마찬가지다. 사실 세키 대위는 10월 25일이 아니라 21일에 처음 출격했었다. 초짜가 아니라 우수한 베테랑 조종사였던 세키 대위도 출격에서 적을 만나지 못해 3번이나 허탕을 쳤고, 4번째 출격에서야 적과 만나 돌입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 상관이나 동료들로부터 죽으러 나가서 살아 돌아온 비겁한 놈 취급을 받을 가능성은 크다. 세키 대위조차도 4번째 출격 때 일부 참모들에게 이번에도 그냥 돌아올 거면 그냥 죽어버리라는 폭언을 들었다. 하지만 정말 적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냥 돌아온 조종사를 처벌하는 조처를 내린 적은 없다. 애초에 자살 명령을 받은 사람에게 무슨 그 이상의 처벌을 내릴 수가 있겠는가?

가미카제 특공대가 적을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귀환하도록 규정했다는 건 적 함대를 발견할 때까지는 탑재한 폭탄의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만약에 안전장치가 풀려 있으면 자칫 활주로에 착륙할 때 비행기가 폭발할 위험이 있고, 비행 중에는 안전장치를 다시 걸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 적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절대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랬더니 풋내기 조종사들이 적을 발견하고도 안전장치 푸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기껏 자기 비행기를 미군 군함에 명중시키는 데 성공하고도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큰 피해를 주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한 미군 쪽에서는 로또를 맞은 셈.

2) 연료 자체가 폭발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오늘날의 제트기들은 비교적 불이 잘 안 붙는 등유를 연료로 쓰지만, 태평양전쟁 당시에는 휘발유를 연료로 사용했다. 적함에 충돌했을 때 연료탱크에 기름이 남아있으면 당연히 상대편 배에 화재를 일으켜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특공기에 연료를 덜 넣을 이유는 없다. 그나마 확실히 ‘연료를 반만 넣은’ 사례라면 오키나와 전투 당시 전함 야마토와 수반함대가 벌인 특공작전이 있는데, 이 함대는 ‘오키나와 해안에 배를 좌초시켜서 해안포대가 되어 미군과 싸워라’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오키나와까지 가는데 필요한 만큼의 연료만 넣어도 될 당위성이 있었다.

그나마 이 작전에서도 실제로는 충분히 오키나와에서 돌아올 수 있을 만큼의 연료를 넣고 나갔다. 유류 보급을 맡은 장교가 이런 멍청한 작전이 어디 있느냐면서 임의로 연료를 추가로 지급했기 때문이다. 이 연료는 저장 탱크 바닥에 깔려 있어서 펌프로 퍼낼 수가 없는 탓으로 평소에는 ‘없는 셈 치는’ 분량이었고, 담당 장교는 병사들이 직접 탱크에 들어가 양동이로 이 기름을 퍼내게 해서 야마토와 호위를 맡은 구축함들에 보급해 주었다.

이 추가로 받은 연료 덕분에 야마토 및 함께 나간 경순양함 야하기 외 구축함 5척이 미군 공습으로 격침당한 뒤에도 생존 구축함 3척이 탈출자들을 구조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

가미카제가 탑승한 제로센이 미 군함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

5. 가미카제 특공기는 조종석을 봉인하지 않았다.

4번과 더불어 널리 퍼진 오해 중 하나다. 조종사가 살고 싶은 마음에 작전을 포기하고 혼자 도망치거나 돌입 직전에 낙하산으로 탈출해 폭탄이 빗나가게 만들지 않도록, 조종사가 탑승한 후에 조종석에 못을 박거나 용접을 해서 조종사가 비행기를 떠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4번에서 이야기했듯이 특공기도 목표를 찾지 못하면 돌아와야 했다. 게다가 준비된 비행기가 말썽을 일으켜 출격하지 못할 경우도 잦았는데, 이럴 때는 출격을 취소하고 기체를 정비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려면 조종사는 내려야 하는데, 조종석을 봉인하면 무슨 수로 조종사가 내리겠는가?

이 문제는 대전 말기로 갈수록 심각해졌다. 미군이 가한 전략폭격으로 인한 피해와 숙련된 인력의 부족으로 일본의 공업능력이 갈수록 떨어졌고, 근로동원된 중학생 같은 미숙련 인력이 생산한 항공기의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기 때문이다.

인간어뢰인 가이텐 역시 입구를 봉인하지 않았다. 가이텐은 잠수함 상부에 탑재하고 가다가 잠수함이 직접 목표를 확인한 뒤에야 출격하므로 목표 미발견으로 인해 귀환할 일은 없지만, 기계 고장으로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그럴 때 조종사는 당연히 잠수함으로 돌아와야 하고, 가이텐은 다시 정비해야 한다. 당연히 출입구를 봉인할 수가 없다.

 

6. 가미카제 조종사는 술기운, 약기운으로 출격하지 않았다.

출격을 거부하는 가미카제 조종사에게 술과 마약을 먹여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출격하게 했다는 인식도 상당히 많이 퍼진 “가미카제에 대한 오해”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것 역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근본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이들이 비행기를 직접 몰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연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술이나 약물에 취한 햇병아리 조종사가 목표지점까지 비행기를 정확하게 몰고 갈 수 있을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특공대원들의 사기를 고취하기 위해서 술잔치를 열어준 예는 있다. 하지만 이것도 출격하기 전날 밤에 하는 거지, 출격하는 조종사들을 붙들어 앉혀 놓고 진탕이 되도록 술을 먹이는 게 아니다.

약물 역시 마찬가지다. 보통 거론되는 약물은 필로폰(히로뽕)으로 통하는 메스암페타민인데, 2차대전 당시 암페타민 계열 약물은 일본군만 사용한 게 아니다. 독일군과 미군도 사용했다. 장시간 비행을 해야 하는 조종사들이 많이 사용했다는 점 역시 일본군과 같다.

그 당시 암페타민 계열 약물은 각성제 내지 피로회복제로 널리 쓰였다. 특공대원들이 비행 중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암페타민을 복용하고 출격한 부분은 명백한 사실이나, 이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마약으로 인한 환각상태’로 사람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는 인식과는 거리가 멀다.

*참고문헌

승리와 패배 vol.16 - 가미가제 特攻隊 : “地獄의 使者”, A. J. 바아카, 동도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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