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장사상륙작전은 정말 1997년에 처음 알려졌나

  • 기자명 임영대
  • 기사승인 2019.09.2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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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시작된 6월과 전쟁이 끝난 7월만큼은 아니지만, 9월도 한국전쟁에서 꽤 의미가 있는 달이다. 전쟁 초기 북한군에게 계속 패하던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이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세를 결정적으로 역전시킨 달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에는 이 인천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되어 많은 관객을 끌었다. 이후 3년이 지나고 난 올해에는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에 있었던 장사상륙작전을 소재로 한 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이 9월 25일에 개봉한다. 작전이 실제로 일어난 날보다 11일 후다.

영화 <장사리:잊혀진 영웅들> 포스터

이 작전은 학도병 772명이 ‘문산호’라는 화물선을 타고 영덕군 장사동에 상륙하여 북한군 후방을 차단하는 작전이었다. 이 영화는 비장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전을 대중에게 소개한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영화제작사 측은 물론이고 이 영화를 계기로 해서 이 사건을 매스컴에 소개한 여러 기사가 잘못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장사상륙작전의 간단한 개요

위에 링크한 기사들에서도 설명한 바지만, 장사상륙작전은 낙동강 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적으로부터 숨기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이를 위해 인민군 군복과 소련제 소총으로 무장한 학도병 772명이 일반 화물선인 문산호를 타고 북한군 후방에 투입되었다.

이런 쉽지 않은 작전에 훈련이 부족한 학도병이 동원된 이유가 정식으로 공개된 적은 없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과 이에 뒤이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던 유엔군과 국군 지휘부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첫째, 여유 병력이 없다. 당시 대한민국은 경상도 일부 지역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좁은 구역에 몰려 있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도 아직 한국에 다 도착하지 않아 병력이 넉넉하지 않았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내면서 인천상륙작전도 준비해야 하는데, 생환 가능성도 희박한 위험한 작전에 정규군을 투입할 여유가 없었다.

둘째, 국제법을 위반하는 작전이었다. 교전권에 관한 전시 국제법인 헤이그 육전조약에서는 전시에 적군의 군복으로 위장하고 적을 공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유엔군 또는 국군이 북한군 군복을 입고 적 후방을 공격하는 데 정치적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 시기의 한국군이 얼마나 형편없는 상태였는가를 감안하면, 북한군 군복과 북한군 총기 지급은 적으로 위장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정식으로 지급할 미제 군복과 총이 모자라기 때문이었을 공산도 높다. 더 급박한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는 학도병들도 군복을 못 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이니, 특공작전에 투입될 병력에게 돌아갈 군복이 없었을 가능성은 크다.

이 경우 한국군임을 식별할 수 있게 휘장 같은 것만 확실하게 달면 국제법 위반은 아니다. 백선엽 장군의 1사단이 북진하던 중에 그렇게 신품 소련제 군복을 가득 실은 화차를 노획해서 입고 있던 더러운 옷을 몽땅 갈아입고 계속 진격한 사례가 있고, 2차대전 때 독일군도 영국군 군복에 마크류만 갈아붙이고 입고 다닌 사례가 있다.

총기 역시 마찬가지다. 미군이 제공하는 총은 주전선 수요 대기도 벅차 일제 총기가 아직도 숱하게 돌아다니는 판이었으니, 남는 노획품인 소련제 총을 지급했다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다. 게다가 미제 총은 순전히 후방에서 보급해주는 탄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소련제 총은 탄약을 북한군에게 노획해서 쓸 수 있다.

3일간 작전한다고 3일분 탄약과 식량만 지급한 것도 이 작전이 비판받는 점 중 하나이다. 다만 애초에 노획총기라 보유 탄약이 충분하지 않았던데다가, 상층부에서는 탄약을 노획해서 보충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공산이 없지 않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동안 이 작전이 ‘기밀이었다’는 영화 제작진과 그에 따르는 여러 매체의 주장이 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을 자세히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장사동에 투입된 제1유격부대, 일명 「명(明)부대」의 활약은 애초에 기밀로 취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 매스컴에서는 이 부대의 활동에 대해 이런 식으로 보도가 되고 있다.

“영화 참여했던 사람으로서도 믿어지지 않더라. 가슴 아픈 역사가 이렇게 묻힐 수 있나 이해가 안 됐다. 1997년이 돼서야 유골과 잔해가 발견됐다고 하더라”고 안타까워 했다.

 

잊혀진 장사리 전투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생존 학도병들이 1980년 7월 ‘장사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를 결성하면서다. 특히 1997년 3월 해병대가 장사리 갯벌에서 좌초된 문산호를 발견하면서 장사상륙작전은 비로소 역사 속에서 부활했다.
인천상륙작전에 가려진 '장사리 전투'를 아시나요(한국경제, 입력 2019.08.23. 17:35 수정 2019.08.24. 00:33 )

 

하지만 학도병 772명의 희생은 1997년 장사리 해변에서 유골과 당시 사용했던 배가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잊혀져 있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에 참전해 올해 89세가 되신 분을 직접 만나보았습니다.

 

1997년 LST문산호 선체가 발견되며 ‘작전명 제174호’ 장사상륙작전은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영덕군장사상륙작전 및 한국전쟁 사진전시회 개최(경북일보, 2019년 05월 04일 12시 24분)

 

◆ 김준우> 돌아가기 위해서 조치원함이라고 하는 배를 하나 보내요. 보내는데 이게 너무 북한군의 저항이 심해가지고 결국에는 조치원함이 다시 돌아갑니다. 태우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여기 작전에 투입됐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사하고, 행방불명 되어버리는 일이 벌어지죠. 사실상 이게 있었는지도 몰랐어요.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1997년에 해병대에서 수색을 하다가 좌초되어 있는 문산호를 발견한 거예요. 문산호는 태풍 때문에 좌초됐었잖아요. 그걸 발견해서 이게 무슨 배냐, 조사를 해보니까 이 기록에 남아 있었던 거예요. 772 유격대의 작전명이 기록되어 있으면서 이게 실제로 있었던 작전이구나, 라는 것이 뒤늦게 재조명되면서 지금 영덕군 장사리에 가면 거기 학도병들을 기리기 위한 공동의 무덤이 조성되어 있고, 그래도 나름 이름을 찾아서 새겨놓고 잊지 말자, 라고 하면서 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장사상륙작전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수많은 흔적

여러 매체의 주장처럼 1997년에 문산호의 잔해와 그 안에 남았던 유해들이 발견될 때까지 장사상륙작전이 기밀이었다면 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어떤 매체나 출판물에서도 그 작전을 다루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9월 15일(금요일)

전황:

미국 해병대, UN, 해병대 이른 아침에 인천 상륙개시, 월미도 탈취, 오후 5시 반에 주력 공격 개시. 월미도 상륙은 미 제1해병사단, 상륙 주력부대는 제10군단, 강륙전 지휘는 도일(Doyle) 소장. 맥아더 원수도 진두지휘, 7개국 군함 261척 참가 – 미국 226, 영국 12, 캐나다 3, 오스트레일리아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한국 15. (상륙전은 지난달 콜린스 참모총장 방일 시, 도쿄에서 맥아더 원수와 협의하여 결정한 것.)

동서 양 해안 협공작전으로, 이른 아침에 한국군이 영덕 남방 장사에 상륙

출전: 한국전란 1년지,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회, 선광인쇄주식회사, 1951. B44

<사진1> 한국전란 1년지,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회, 선광인쇄주식회사, 1951. B44 (B섹션은 전황을 적은 부분이다)

이 책은 전시 중에, 국방부에서 1951년 10월 15일 자로 정식으로 간행한 공식 기록이다. 이런 책에서 우리 병력이 “영덕 남방 장사에 상륙”했다고 공식적으로 적고 있는데, 과연 이런 작전이 기밀이었을까?

기획 단계에서야 물론 기밀이었을 것이다. 그건 모든 군사작전이 그렇다. 하지만 이 작전이 실행되고 생존자들이 귀환한 이후 장사상륙작전은 전혀 비밀로 지켜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위의 책 외에, 역시 전시에 보도된 경향신문 기사를 보아도 장사동에 상륙한 명부대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부에서는 명부대(明部隊)에 종군하였던 우국청년들의 실장을 파악하고자 동 부대에 종군한 본인 또는 본인이 부재시에는 친척이나 우인이 서면으로 오는 25일까지 동 사령부에 신고하여주기 바란다고 한다. 그런데 명부대는 6.25 동란이 발생된 해인 83년도 10월 13일부터 동 20일까지 8일간에 걸쳐 적장 김무정 군단의 보급중계기지인 경북 영덕지구에 적전상륙을 감행하여 적에 일대 손실을 주고 혁혁한 전공을 수립한 부대라고 한다.

*1공화국 시기에는 공식적으로 단기를 썼다. 단기 4283년은 1950년이며, 위에서 인용한 「한국전란 1년지」도 간행년을 ‘4284년’으로 적고 있다. *작전 시행일을 10월이라고 한 것은 경향신문의 착오다.

 

장사상륙작전이 작전 실시 이후로도 계속 기밀 취급되었다면, 군 당국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참전자를 수소문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한 번으로 매스컴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다.

▲前 陸軍 獨立 第一遊擊大隊(전 육군 독립 제일유격대대) 明部隊(명부대) 戰歿將兵(전몰장병) 및 汶山號 犧牲英靈 慰靈祭(문산호 희생영령 위령제) = 十四日 下午 二時 曹溪寺(14일 하오 2시 조계사)에서 (경향신문, 1961년 9월 13)

 

기사에서 보듯이, 어디 숨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 한복판에 있는 조계사에서 위령제를 열었다. 확인된 횟수는 단 한 번이지만, 기밀로 간주되어 공개가 금지된 작전이라면 참전자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조계사 같은 곳에서, 신문에 공고까지 내 가면서 치를 수 있을까?

여기까지만 나오면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전쟁 중, 전쟁 직후에 잠깐 드러냈다가 군사정권 시기에 다시 묻어버린 것은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3공화국 시기에 국방부가 간행한 6.25 공간사인 「한국전쟁사」(1970) 3권에서는 문산호의 사진과 작전 요도까지 포함해서 무려 3페이지에 걸쳐 장사상륙작전을 소개하고 있다.

<사진2> 1970년 발행된 「한국전쟁사」(1970) 3권은 3페이지에 걸쳐 장사상륙작전을 소개하고 있다. 작전 요도가 기재된 해당 서적 650p. 전체 묘사는 648~650p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중앙일보가 1982년에 출간한 「민족의 증언」이라는 한국전쟁 관계자 증언집 2권에서는 9페이지에 걸쳐서 당시 대장이었던 이명흠(74년에 이종훈으로 개명) 대위를 비롯한 관계자 5명의 회고를 실었다.

이 책에서 이명흠 대위는 “60년 10월 10일에 772동지회를 발족하여 매년 9월 14일 하오 2시에 육군 중앙교회에 모여서 장사동에서 산화한 129명의 넋을 위한 추도예배를 올린다”는 증언도 하고 있다(민족의 증언 2권 323p).

<사진3>  1982년에 출간한 「민족의 증언」에서는 9페이지에 걸쳐 장사상륙작전을 설명했다.해당 서적에 실린 부대장 이명흠 대위의 회고 일부

 

그보다 더 뒤에 나온 책인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육군본부, 1994)에서는 26페이지에 걸쳐서 장사상륙작전에 관한 여러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더불어서 이 부대에 참여한 학도병들의 명단과 군번까지 실었다.

<사진4>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육군본부, 1994). 해당 서적에 실린 명부대 편제. 전원 학도병이 아니고, 정규 장교진이 간부로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5> 「한국전쟁시 학도의용군」(육군본부, 1994). 해당 서적에 실린 명부대 명단 및 군번 일람의 일부

 

 

국방부에서, 언론에서 이렇게 몇 차례씩이나 펴냈는데 이 작전이 과연 “1997년에 문산호의 잔해가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아무도 몰랐던” 비밀스러운 작전이 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작전은 80년대 어린이들의 반공교육을 위해 간행한 만화책에서도 태연히 묘사될 정도였다. 「반공윤리학습극화 한국전쟁」(전 15권, 최수길 프로덕션, 계림출판사, 1981)의 8권 ‘인천상륙작전’ 편과 9권 ‘북진, 북진!’이다. 다만 만화책에 묘사된 장면들은 극화되어 있어서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창작 파트도 있다.

<사진6> 「반공윤리학습극화 한국전쟁」(전 15권, 최수길 프로덕션, 계림출판사, 1981) 8권 ‘인천상륙작전’ 편. 109~110페이지. 문산호의 좌초와 그에 따른 혼란 묘사.
<사진7> 「반공윤리학습극화 한국전쟁」(전 15권, 최수길 프로덕션, 계림출판사, 1981) 9권 ‘북진, 북진!’ 편, 59페이지, 명부대의 후일담 기술

 

아이들이 보라고 만든 만화책에까지 실린 작전을, 50년 가까이 기밀로 유지되어 아무도 몰랐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이 기사에 실린 책이 전부가 아니다. 본 필자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 수기 등 기타 출판물 중에 장사상륙작전에 관해 기술한 기록물은 얼마든지 더 있다. <학도의용군>에는 집필 도중에 참고한 수기류 여러 권이 자료 출처로 제시되어 있다.

<사진8> 본 필자가 활용한 참고 서적들. 일부러 97년 이전에 출간된 것으로만 골랐다.

대원들이 “거의 다 죽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검증해 보자.

<민족의 증언>에 나온 부대장 이종흠 대위의 회고를 보면, “부산항으로 귀환한 후에 인원을 점검해 보니” 129명이 전사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한다. 여기서 귀환하지 못한 실종자를 모두 전사자로 간주했을 경우, 철수선에 타지 못하고 포로가 된 인원 39명(여기서 일부는 탈출하여 다시 본대에 합류함)을 빼면 실제 작전 중 발생한 전사자와 실종자는 90명이다. 여기 부상자 110명을 더한다고 해도 생환자가 훨씬 많다.

이는 국방부에서 당시 기록을 정리해서 낸 수치와도 들어맞는다. 한국전쟁사 3권(1970)은 “귀환한 인원은 (정규군인 및 민간인 선원 포함)677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수치가 다소 부정확할 수는 있겠으나, 영화 제작사 및 다수 매스컴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참전한 학도병이 대부분 전사했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문산호는 “잊혀져 있다가 1997년에 발견된” 것도 아니다. 인양작업에 대해 묘사한 당시의 기사를 확인해 보자.

영덕군과 영덕 장사 상륙작전 유격 동지회는 5일 당시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 앞바다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다 군함 문산호가 좌초되면서 실종된 70여명의 국군 유격대원 유해인양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지 47년만이다.

국가보훈처로부터 유해 인양 발굴비 7백10만원을 지원받아 이날 오전 시작된 발굴작업에서 해병1사단 수색대원 12명은 장사 앞바다 50여m 연안 개펄속에서 당시 침몰된 선체를 확인한데 이어 무릎뼈로 보이는 유골 1점을 발견했다.

이 기사에서 명백히 적고 있듯, 1997년에 이루어진 유해 인양은 영덕군과 생존한 상륙작전 참전자들이 ‘보훈처에 요청한 비용 지원’이 드디어 통과되면서 성사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여러 기사에서 ‘해병대가 수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인양에 참여한 인력이 해병대 수색대였다는 사실이 와전되면서 나온 가짜뉴스였다.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작전에 참여했던 생존자가 수백 명이나 있었고, 지금도 생존자(89세)가 있을 정도다. 배가 좌초한 장소도 장사동 마을 바로 앞이다. 그럼 배가 있는 위치가 잊혀서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게 도리어 이상한 게 아닐까?

더구나 대원들이 미처 회수하지 못한 시신은 장사동 주민들이 수습해서 묻어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문산호의 위치와 특공대의 활약 여부가 잊힐 수가 없는 게 아닌가?

분명히 이 작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과연 한국전쟁 때 있었던 그 많은 전투 중에,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은 전투가 있기는 할까?

아마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전투일 인천상륙작전도 맥아더가 지휘해서 인천을 공격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한강 방어전이나 낙동강 방어전도 대략 이름만 알 뿐, 상세한 전황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사상륙작전 역시 마찬가지다. 애초에 기밀도 아니었고, 생존자들이 공개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건에 대해서 마치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묻혀 있던 일처럼 보도하는 건 보도하는 매체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음을 드러낼 뿐이다. 영화사 측에서야 영화를 홍보하는 마케팅의 일환이거나, 역시 조사할 생각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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