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조커>의 네 가지 이름

  • 기자명 뉴스톱
  • 기사승인 2019.10.12 01: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4일 한국에서 개봉한 <조커>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할 만큼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범죄 유발 가능성이 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예를 들어 유튜브 채널 스브스뉴스는 과거 <다크나이트>의 조커를 모방한 총기난사 사건을 언급하며, <조커>로 인한 혐오주의자의 결집을 우려했다. 하지만 해당 사건의 피의자는 영화의 인물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는 사실이 이미 판명된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조커>의 어떤 점이 이러한 논란을 일으켰으며, 어떤 점을 주목해야 할지 조커의 네 가지 이름과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다.

(*영화 <조커>의 결말 등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 감상 후 일독을 권합니다.)

 

영화 <조커>의 포스터. 76회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첫 번째 이름 ‘아서’

아서 플렉. 경제적으로 그는 싸구려 아파트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저소득층이고, 사회적으로는 주변인들에게 괴짜 취급 받는 부적응자이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병력을 가지고 있으며, 정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상담 서비스와 약물 처방을 받고 있다. 그는 백인 남성이지만 고담 시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위치한다. 청소년들에게 홍보용 팻말을 빼앗기고 구타당한 아서는 팻말을 고의로 훔쳐간 것 아니냐는 고용주의 오해까지 받는다. 그러나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쓰레기통을 발로 차며 화를 푸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꿈이 있다. 바로 코미디언이 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다. 문제는 아서에게 코미디언으로서의 재능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웃음은 슬픔에 비해 훨씬 사회적인 감정이다. 사람들은 보통 웃을 땐 함께 웃고, 눈물을 흘릴 땐 혼자 흘린다. 사회성이 없는 아서에게, 커뮤니케이션의 최고급 단계인 농담에 재능이 있을 리 없었다. 영화 속에서 그가 웃기는데 성공한 사람은 단 두 명. 어린 아이와 같은 층에 사는 여자뿐이다.

 

두 번째 이름 ‘해피’

아서의 엄마는 아서에게 항상 행복하라는 뜻으로 ‘해피’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그리고 그는 나름대로의 행복을 누리려고 노력한다. 동경하는 코미디언의 쇼를 보기도 하고, 자신의 농담에 웃어준 여자와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며, 작은 클럽의 무대에 올라가 스탠딩 코미디를 펼치기도 한다.(비록 그것이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서는 동료가 건네준 권총을 아동병동에서 흘려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깨달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미친 사람 취급뿐이었다. 정부에서 제공하던 의료 복지는 중단되어 상담과 약물복용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동경하던 코미디언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조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상황은 순식간에 “Don’t forget to smile”에서 “Don’t smile”로 바뀌어버렸다.

 

세 번째 이름 ‘카니발’

영화상에서 워낙 짧게 언급되기 때문에 놓치기 쉽지만 아서의 광대 예명은 ‘카니발’이다. 문예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유럽의 카니발 전통이 ‘전복’이라는 중요한 코드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40일간의 사순절 금욕기간을 직전에 둔 기독교인들은 흥청망청 웃고 떠들며 먹고 마셨다. 그리고 카니발 안에서 성과 속, 부자와 빈자, 규칙과 무질서는 뒤바뀐다.

영화 초반부, 청소년들에게 구타당하는 아서는 자신의 생식기를 보호하려는 듯 시종일관 손으로 국부를 감싸고 있다. 그 후에 동료로부터 아서에게 쥐어진 권총은 흔히 남근을 상징하는 오브제이다. 그동안 시몬 드 보부아르를 비롯한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은 태어나고, 여성은 만들어진다’는 주장을 하곤 했다. 그러나 <조커>는 남성성이라고는 전혀 없던 주인공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것이 주어지는지 전복적으로 보여준다. 페미니즘이 비난하는 남성의 폭력적인 면모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비난의 화살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까?

영화 <조커>의 한 장면. 청소년들에게 구타 당한 직후의 아서 플렉

총을 얻은 아서는 지하철에서 금융회사에 다니는 젊은이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이전에는 가만히 맞고서도 자신을 탓했던 그가 이번에는 그들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부자와 빈자의 입장이 전복되는 순간이다. 아서 자신은 정치적 의도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아서의 행동은 부자들을 향한 대중의 분노를 촉발시킨다. 사람들은 광대 분장을 하고, 부자들에게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시장후보인 토마스 웨인은 그들을 ‘광대’라고 조롱하는데, 이것은 우파 정치 활동가 팻 로버트슨이 월 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에게 비난했던 내용을 떠오르게 만든다.

아서는 코미디에 전혀 재능 없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처지를 마음대로 비웃었지만, 정작 그가 던지는 농담에는 “웃기지 않다”, “그것은 농담거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미디어는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정하고, 무엇이 웃기고 웃기지 않은 것인지 정한다. 그리고 아서는 이러한 잣대를 전복시킨다. 실제로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조지 칼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강간에 관한 농담을 금기시한다. (중략) 하지만 모든 것은 농담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농담에서 ‘무엇을 강조할 것인가’이다.”

흔히 ‘정치적 올바름’과 ‘정체성 정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백인/남성은 강자, 흑인/여성은 약자’라는 도식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조커>에서 아서에게 심리상담을 해주는 사람은 항상 흑인/여성이다. 백인/남성인 아서가 흑인/여성인 상담사들에게 “당신은 내 말을 듣지 않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장면은 기존의 강자-약자 도식을 전복시키는 것이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이라는 칼럼에서 여성/흑인만이 여성/흑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반대로 백인/남성만이 백인/남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반대에 부딪힐 것이라고 예언하며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 바 있다.

 

네 번째 이름 ‘조커’

아서는 결국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내 삶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망할 코미디였어.”라고 말하는 대사가 그것을 상징한다. 그의 웃음 발작은 웃지 말아야 할 순간마다 터져 그를 힘들게 했지만, 사실 그 웃음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블랙코미디적인 조소였던 것이다.

아서는 스스로 ‘조커’로 불리길 자청하며, 웃고 있는 분장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는 한때 정치적인 의도를 부정했지만, 종국에는 시위의 상징이 된다. <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가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서 공포감을 선물했다면, <조커>는 빌런의 탄생 과정을 낱낱이 드러내며 관객들에게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져다준다.

 

조커의 탄생을 막기 위해서

과거 <살인의 추억>은 살인자의 시점에서 피해자를 촬영한 장면 때문에 몇몇 비평가에게 비판을 받았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은 카메라의 시선과 자동적으로 동일시되기에, 문제의 장면에서 관객의 시선과 살인자의 시선이 폭력적으로 겹쳐진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관객의 이중성을 고발한 영화도 있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퍼니 게임>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릴러 영화를 즐기러 오는 관객들이 선량한 피해자의 편에 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들이 범죄자가 저지르는 폭력에서 오는 스릴을 원한다는 점을 폭로한다.

영화 <조커>에 대한 혹평도 위의 상황과 같이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평론가들은 영화 속 조커와 동일시 될 관객을 우려하지만, 마치 자신들의 시선은 항상 순결하고 선량한 편에 선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속 응어리를 가지고 살아간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비극을 상연했던 이유는, 눈물을 통해 그러한 감정을 분출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커>는 오히려 그동안 소외된 계층의 감정을 정화(catharsis)시키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에서 조커와 같은 빌런이 탄생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관객들의 모방 범죄를 우려할 것이 아니라 <조커>가 제시하는 서사를 자세히 살피고 배워야 한다. <조커>에서 뉴스는 계속해서 쓰레기 노동자들의 파업, 쥐떼의 창궐, 장티푸스에 대한 경고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서가 고용주에게 팻말 도둑이라는 오해를 받고난 뒤에 쓰레기통을 발로 차는 장면에서, 이러한 배경을 알려주듯이 쓰레기가 잔뜩 쌓여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고(事故)는 항상 연속적으로 일어난다. 장티푸스를 막으려면 쥐떼를 막아야 하고, 쥐떼를 막으려면 쓰레기 노동자의 파업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서’가 ‘조커’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영화 <조커>의 한 장면. 길거리에 쓰레기가 방치된 채로 쌓여있다

먼저 사회적 안전망을 늘려야한다. 아서에게 정상적인 의료 복지가 제공되었다면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상담과 약물로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아서에게 의료 복지의 중단은 빌런으로 가는 길을 막는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 또한 아서와 같은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서는 왜 코미디언이 되길 원했을까? 코미디 클럽만이 사람들의 눈총을 피해 웃음 발작을 자연스럽게 숨길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어울리지 못하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도 사실은 사회에 섞이는데서 오는 안정감을 원한다. 단지 그 방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로 인하여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 뿐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일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과거에는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타지의 사람들이 동종의 인간으로 보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이야기는 낯선 이의 삶에도 자신과 같은 우여곡절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이야기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끼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커>는 사회가 이해하기를 애써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영화이다. 그들이 악당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비웃고 가르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그들을 인정해야 한다. 빛바랜 ‘민족 서사’를 들고 일어서는 우파 포퓰리즘의 거센 물결에 그들을 떠나보내길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뉴스톱은 팩트체크 기사 외에 외부필자의 시각을 담은 <칼럼>과 <기고>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의 필자 김보현은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습니다. 정의당 의견그룹인 진보너머 회원이며, 슬라보예 지젝이나 마크 릴라와 같은 정치철학자들의 글을 번역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