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5천명 몬트세랫의 '축구 돌풍' 기이한 역사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9.10.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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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축구는 최근까지 A매치 브레이크 기간이었다.

각국 프로 리그를 일시 중단하고 국가대표 팀이 소집됐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축구연맹(AFC) 소속팀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2차 예선 일정을 소화했다. 유럽축구연맹(UEFA)은 유로 2020 예선 조별리그를 진행했다. 남미와 아프리카 대표팀들은 평가전을 치렀다. 그리고 북중미카리브축구연맹(CONCACAF) 회원국들은 네이션스리그 조별 리그를 치렀다.

CONCACAF는 2019-20시즌부터 UEFA를 본따 네이션스리그를 출범시켰다, 회원국들이 3개 리그 12개조로 나뉘어 경쟁한다. 최상위 리그A 의 각조 1위 4개팀은 토너먼트로 챔피언을 가린다. 그리고 리그B와 리그C 조 1위는 다음 시즌 상위 리그로 승격한다. 반대로 조 최하위 팀은 하위 리그로 강등된다.

대륙 선수권대회인 골드컵이나 국제축구연맹(FIFA)이 주관하는 월드컵 예선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진 예선을 거친다. 역내 하위권 팀이라면 충분한 A매치 경기를 치르기 어렵다. 수준별로 리그전을 치르는 네이션스리그 시스템을 도입한 이유다. 네이션스리그에선 각 조에 속한 대표팀끼리 홈앤어웨이로 두 경기씩을 치른다. 4개국으로 이뤄진 조라면 6경기가 보장된다.

중남미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몬트세랫 축구대표팀의 경기 장면.

도미니카공화국에 승리한 인구 5천명 몬트세랫 대표팀

초대 네이션스리그 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팀이 있다. 소앤틸레스제도의 몬트세랫(Montserrat) 대표다. 10월 16일 도미니카공화국 수도 산토도밍고의 펠릭스 산체스 올림픽스타디움. 몬트세랫 대표팀은 FIFA 랭킹 157위 도미니카공화국과 리그B 4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두 팀은 도합 옐로카드 다섯 장이 나온 격렬한 경기 끝에 스코어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몬트세랫은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선 도미니키공화국에 2-1 승리를 거뒀다. 몬트세랫의 인구는 2017년 센서스에서 5215명으로 집계됐다. 인구 2000배가 넘는 도미니카공화국을 상대로 1승 무 전적이다.

몬트세랫 대표팀이 국내 언론에 처음 소개된 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다. 브라질과 독일이 일본 요코하마에서 결승전을 치른 2002년 6월 30일, 부탄의 수도 팀부에선 ‘또다른 결승전(The Other Final)’으로 명명된 경기가 열렸다. 당시 FIFA 랭킹 최하위(203위) 몬트세랫과 202위 부탄이 출전했다. 한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한 네덜란드의 광고업자들이 ‘세계 축구 최강팀을 가리는 날 세계 최약체 팀끼리 맞붙는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에서 이 경기를 기획했다. 결과는 홈 팀 부탄의 4-0 승리였다. 몬트세랫은 명실상부한 세계 축구 최약체 팀이 됐다.

몬트세랫은 1973년에야 축구협회가 결성됐고 국가대표팀의 첫 공식 경기는 1991년 5월 10일에 열렸다. 경쟁력있는 축구팀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1995년 골드컵 예선 첫 라운드에선 앵귈라를 눌렀다. 하지만 다음 라운드에서 역시 카리브해의 소국인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에 합산 스코어 0-20으로 완패했다.

대표팀의 참패 직후에 몬트세랫에는 국가적인 재앙이 닥쳤다. 7월 18일 수프리어힐스 화산이 폭발했다. 수도 폴리머스가 파괴됐고 국토 상당 부분이 화산재로 덮였다. 지금도 몬트세랫섬 남부 지역은 출입금지 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화산 폭발과 뒤따른 지진은 1997년에도 다시 섬을 덮쳤다.

몬트세랫 축구협회 로고

국가대표 축구팀의 활동도 당연히 정지됐다. 몬트세랫 대표팀이 다시 국제대회에 복귀한 건 2002년 월드컵 예선이었다. 복귀 이후 첫 15경기에서 전패를 당했고 도합 11득점 83실점이었다. 예상대로의 결과였다.

하지만 초대 네이션스리그에서 몬트세랫은 가장 주목받는 팀이다. 돌풍은 지난해 9월부터 올해 3월까지 치러진 예선에서부터 시작됐다. 첫 대회인 만큼 그룹 편성을 위해 예선전이 필요했다. 러시아 월드컵 최종 예선에 오른 멕시코, 미국 등 6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34개국이 참가해 순위에 따라 그룹을 배정하는 방식이었다.

34개국은 CONCACAF 랭킹에 따라 A에서 D등급까지 분류됐다. 몬트세랫은 당연히 D등급이었다. 대회 전 3년 가까이 한 경기도 치르지 않았다. 하지만 엘살바도르에 1-2로 패한 뒤 벨리즈, 아루바, 케이먼제도에 연승을 거뒀다. 그래서 ‘레게 보이즈’로 명성을 날리는 자메이카와 함께 리그B에 편성되는 이변을 일궈냈다. 순위가 한 계단만 높았더라면 10위까지 주어지는 2021 골드컵 본선 진출권도 획득할 수 있었다.

본 무대인 네이션스리그 리그B에서도 1승 2무 1패로 선전하고 있다. 4라운드까지 선두 엘살바도르에게는 승점 4포인트 뒤져 있다. 다음 시즌 리그A 승격은 어렵지만 리그 C 강등 가능성도 거의 없다. 4위 세인트루시아에 승점 4포인트 차이로 앞서 있다.

90년대 몬트세랫 화산폭발 뒤 영국 이주한 선수들의 복귀

몬트세랫 축구의 돌풍은 1995년의 대재앙과 때놓을 수 관계다. 화산 폭발 이전 이 섬의 인구는 1만4000명 가량이었다. 주민 상당수가 재난을 피해 모국 영국으로 이주해 영주권과 시민권을 얻었다. 몬트세랫은 행정구역상 영국의 해외 영토로 분류된다. 지금도 영국 해외영토 주민 가운데 두 번째로 본국 거주 비율이 높은 집단이 몬트세랫 출신이다. 한때 몬트세랫에 남은 인구는 1200명 수준으로 떨어졌다.

영국은 축구의 종주국이다. 영국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이주민 자녀들은 자연스레 축구를 접했다. 경쟁 수준은 몬트세랫 섬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스포츠에서 경기력은 대개 경쟁을 통해 향상된다. 이들이 지금 몬트세랫 대표팀의 주력이 됐다. 미드필더 딘 메이슨은 북런던의 이슬링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머니가 화산 폭발을 뒤 영국으로 이주한 몬트세랫 출신이다. 메이슨은 2008년부터 잉글랜드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메이슨을 비롯해 대표팀에는 잉글랜드 하부리그 소속 선수 10명이 있다. 대표팀 에이스로 꼽히는 라일 테일러는 잉글랜드 3부 리그 소속에, 2014-15시즌엔 스코틀랜드 1부 리그에서 뛰었다.

몬트세랫 축구 국가대표팀.

이주민들이 돌아옴에 따라 10년 넘게 중단됐던 자국 축구 대회도 다시 열렸다. 대표팀에는 미드필더 마크 로저스와 아이자 달리, 포워드 시겔 로드니 등 세 명의 10대 선수가 있다. 이들은 선배들과는 달리 몬트세랫 클럽인 아이디얼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30대인 ‘해외파’ 선배들이 은퇴하면 이들이 새로운 주역이 될 것이다.

몬트세랫의 돌풍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FIFA는 월드컵 본선 참가국 확대에서 보듯 국가대표 대회와 경기 수를 늘리는 추세다. CONCACAF도 12개국이던 골드컵 본선 참가국 수를 2019년 대회부터 16개로 늘렸다. 상업적인 이득을 위해 경기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약체 팀이 운이 좋아서 본선에 진출하는 경우도 생긴다. 몬트세랫에 살아본 적도 없는 선수가 다수인 ‘대표팀’에 대한 반감도 있다.

몬트세랫 대표팀의 ‘세계 최약체’ 탈출에는 여러 우연이 겹쳐 있다. 하지만 축구에서 그들이 누린 행운의 크기가 어떻든 1995년의 불행과 비교할 수 없다.

몬트세랫의 윌리 도나치 감독은 올해 9월 BBC와의 인터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네이션스리그는 미키 마우스처럼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몬트세랫 선수들에게 미국이나 캐나다 팀과 경기를 치를 기회가 생긴다는 건 엄청난 일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재건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몬트세랫 대표팀 감독은 그래서 매우 중요한 직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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