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명언 팩트체크] 중립을 지킨 자에게 지옥이 예약? 단테는 그런 말한 적 없다

  • 기자명 박강수 기자
  • 기사승인 2019.10.2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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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한가지 문제점은 적혀 있는 내용 대부분이 ‘개소리’라는 것이다(One problem with the internet is that much of what’s written there is simply bullshit)

- 마크 트웨인

 

<가짜명언 팩트체크> 시리즈

① 중립을 지킨 자에게 지옥이 예약? 단테는 그런 말한 적 없다

② 동의하지 않지만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 볼테르 발언 아니다

③ 국민은 자신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선관위도 속은 명언

④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무한도전이 퍼뜨린 가짜 신채호 명언

⑤ 내 옆으로 와 친구가 되어 다오? 카뮈는 말한 적 없는 '감성명언'

⑥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 쳐준다? 한국에서만 쓰이는 앤디 워홀 명언

⑦ 소크라테스 명언으로 알려진 '악법도 법’ 사실인가 아닌가

대처는 "Design or Resign"이란 말을 한 적 없다

‘한 문장이면 누구나 범죄자’ 오용된 괴벨스

각색된 프랑수아 트뤼포의 '시네필 3법칙'

늙어서도 사회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것? 포퍼도 처칠도 한 적 없는 말

⑫ 플라톤이 말한 “정치를 외면한 대가”의 진실

⑬ 권력을 줘보면 인격을 안다? 링컨이 한 말 아니다

⑭ 링컨이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

⑮ 퍼거슨의 '트인낭'은 오역인가

⑯ "케이크를 먹여라" 마리 앙투아네트의 망언?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1835년에 태어나 1910년까지 살았다. 당연히 이 시기에는 인터넷이 없었다. ‘월드 와이드 웹(www, world wide web)’이 개발되기 약 80년도 전이다. 그러므로 “마크 트웨인이 말하길 ‘인터넷에는 온통 개소리뿐’이라더라”는 말은 또 다른 ‘개소리(bullshit)’다.

‘개소리에 대한 개소리’를 담은 위 문구와 이미지는 출처 없이 온라인을 떠도는 온갖 가짜명언들을 풍자하고자 만들어졌다. 링컨, 아인슈타인 등 사진과 이름만 바뀌어 여러 버전으로 공유된다. 메시지는 같다. “누군가의 명언이랍시고 돌아다니는 말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마라!”

문제는 가짜명언들이 두어 사람의 블로그와 소셜 계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키백과와 신문 기사, 방송, 책 등으로 퍼지며 사실처럼 굳어진다는 점이다. 출처 확인에 소홀한 미디어가 가짜명언에 가짜 보증을 서주는 셈이다. 일상이 바쁜 대다수의 사람들은 문장 하나하나의 진위를 따질 겨를이 없다.

뉴스톱에서 이러한 가짜명언을 모아 왜곡과 날조의 역사를 살폈다. 적게는 몇 년, 많게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문장들이다. 잘못된 말들이 퍼지는데 대체로 정치인과 언론이 앞장을 섰다. 전혀 출처를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들 격언의 진위를 폭로하는 기사 또한 많으나 한번 어긋난 말들의 생명력은 여전히 질기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돼 있다"(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 단테 알리기에리

 

용례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나오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 무관심과 침묵, 기계적 중립에 대한 질타로 트위터, 페이스북 등지에서 애용된다. ‘원래부터 나쁜 놈보다 더 나쁜 놈은 가만히 있는 놈’이라는 함의가 담겨 있다. 묵시록적인 수사와 강렬한 의미 덕에 여러 언론 칼럼에도 곧잘 쓰인다. 영미권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댄 브라운의 작품 <인페르노> 첫 장에도 같은 문장이 단테의 것으로 인용돼 있다. 최근엔 조국수호 집회나 조국반대 집회 어느 곳에도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문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단테의 신곡을 인용한 온라인상 게시물들. 페이스북, 트위터 캡처

 

실상

단테의 <신곡>에는 그런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비슷한 구절은 있다. 작중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의 문 초엽에 들어서는 대목으로 지옥편 3곡 34행부터 42행에 해당한다. 사방에서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에 대해 “이들은 누구입니까”라고 단테가 묻자 베르길리우스가 대답한다.

“치욕도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슬픈 영혼들이 이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있다. 하느님께 반항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았고 단지 자신에게만 충실했던 저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도 섞여 있다. 하늘은 그들을 쫓아냈다. 그들이 하늘의 빛을 가릴 테니까. 그러나 깊은 지옥도 그들을 거부하니, 그들을 보고 지옥의 자들이 우쭐해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신곡 – 지옥편>, 단테 알리기에리, 박상진 역, 민음사, 29쪽

 

<신곡-지옥편> 민음사 판본 스캔. 해당 구절의 원문으로 추정되는 대목.

 

보다시피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혹은 가장 암울한 자리)’, ‘도덕적 위기의 순간’과 같은 표현은 없다.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던 천사들이 죄값을 치르고 있긴 하지만 장소가 지옥은 아니다. 이곳은 천국도 지옥도 거부당한 자들이 자리한 지옥의 문턱 언저리일 뿐이다.

그들을 지옥의 심층부로 보내버린 이는 존.F.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역시 ‘최초’가 아니다. 이 각색의 역사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용구 전문 팩트체크 사이트 ‘쿼트 인베스티게이터(Quote Investigator, 이하 QI)’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왜곡의 흔적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발견된다. 루즈벨트는 1915년에 낸 책 <미국과 세계대전(America and The World War)>에서 단테를 언급하며 “감히 선과 악 양쪽을 모두 거부한 천사들”을 위해 “지옥의 악명 높은 장소(a special place of infamy in the inferno)”가 예비되어 있다고 썼다.

이후 해당 구절은 윌리엄.M.바인스 목사에 의해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the lowest place in hell, 1917)”이 되었다가, 영성 철학자 헨리 파월 스프링의 저서에서 마침내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the hottest places in hell, 1944)”가 된다. 그리고 이 문장과 표현이 그대로 언론 지면에 퍼져 케네디를 만난다.

케네디가 처음 해당 구절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1956년 메사추세츠주 상원의원 시절이다. 그는 ‘기독교도 및 유대인 국제 연맹’ 수상 연설에서 단테를 인용했다. “단테는 말했습니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장소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이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라고.” 이후 1958년 UPI 통신사가 케네디의 말을 ‘오늘의 발언’에 실었고 이게 마음에 들었는지 케네디는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단테 인용문’을 종종 연설에 써먹었다고 한다.

<신곡>은 기본적으로 서사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기반한 상징과 환상이 가득하다. 이를 읽는 일은 ‘해석의 영역’이다. 따라서 인용문이 정확히 같은 문장이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강조나 요약이 ‘해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지난 9월 26일 대학교수들의 ‘검찰개혁 시국선언’ 자리에도 ‘케네디의 단테 인용문’이 나왔다. 해당 구절로 말머리를 연 김호범 부산대 교수는 “케네디는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말을 이런 뜻으로 해석했다”고 덧붙였다. 케네디의 인용을 왜곡이 아닌 해석이라 본 것이다. 실제 원문의 해당 구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중립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독해에 오독과 의독이 있듯 해석도 잘못된 해석, 의도적인 해석이 있다. <신곡>에는 ‘가장 악랄한 죄악은 중립’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지 않다. ‘루시퍼가 하느님에 반기를 들 때 침묵을 지킨 천사들(<신곡> 열린책들 판본, 김운찬 역, 26쪽, 각주2)’은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케네디의 단테 인용’은 의도적인 정치적 윤색이자 왜곡이다. (시리즈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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