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절 논란, 사실은 무엇일까

  • 기자명 이고은 기자
  • 기사승인 2017.08.17 05:2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시점으로 본 연설을 하면서 다시금 ‘건국절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1948년으로 봄으로써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주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뉴라이트 진영을 중심으로 점화돼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2017년 8월 15일 문재인 대통령 광복절 축사 장면. 유튜브 화면 캡처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광복절을 맞아 ‘광복 63년 및 대한민국 건국 60년 경축사’를 통해 “건국 60년,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고 말했다. 이에 진보 진영은 건국 60주년에 초점을 맞추면서 역사를 왜곡하려 한다고 비난한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2015년 광복 70주년, 2016년 광복 71주년 경축사에서 각각 “건국 67주년”“건국 68주년”이라고 표현해 논란을 이어갔다. <뉴스톱>이 건국절 논란과 관련한 쟁점들에 대해 팩트체크했다.

 

1. 임시정부는 국가 3요소(국민, 영토, 주권)를 충족 못해 국가가 아니다?

대체로 거짓. 자유한국당은 1919년을 건국 시점으로 본 문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발언에 대해 비판하며 ‘국가의 3요소’를 그 근거로 들었다. 뉴라이트 계열 사회학자 출신인 류석춘 혁신위원장은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게 성립하려면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듯 국민, 영토, 주권이 있어야” 하며 “그 기준에서 1948년 건국은 자명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홍준표 대표 역시 “나라의 3대 요소는 영토, 주권, 국민”이라며 “1919년 상해임시정부 당시 우리나라가 (이를) 충족한 상황이었나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의 3요소’는 오늘날 광범위하게 통용되는 법학자 게오르크 옐리네크(Georg Jellinek)로부터 출발한 학문적 개념이다. 이는 1933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발표된 ‘몬테비데오 협약(Montevideo Convention)’ 으로 발전해 국제법상 신생국가를 승인하는 근거로 적용되어 왔다. 이 협약은 미주국가회의에서 채택된 것으로, 미주 대륙에서 어떤 나라가 독립국이라고 주장할 때 국제법상 어떤 경우 국가로 승인할 수 있을지 의논해 발표했다. 여기에서 국가가 성립하는 요건으로 항구적 인구(a permanent population, 국민), 명확한 영역(a defined territory, 영토), 정부(government, 주권), 타국과의 관계를 맺는 능력(capacity to enter into relations with other States, 외교) 등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부하 영남대 교수의 논문 ‘국가와 문화적 기본권-독일의 국가·사회 이론과 관련하여’에 따르면, 게오르크 옐리네크의 국가 3요소론은 “정치적 통일성의 형성과 국가창조의 복잡한 과정을 소홀히 하고 단지 개별적이고 정적인 동인(動因)만을 총합하였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한계도 있다. 국가의 3요소론이 국가에 대한 여러 가지 학술적 견해 중 한가지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국가 3요소의 국제법적 뿌리로 여겨지는 몬테비데오 협약이 체결된 1930년대는 식민국과 반식민국이 만연하던 시기다. 협약의 내용을 적용하면 당시 모든 식민국은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게 되며, 모든 식민국의 독립운동은 내란 및 반국가 행위로 규정된다. 강대국의 지배 논리를 강화하는 데 사용된 셈이기 때문에 몬테비데오 협약은 “국가에 대한 견해일 뿐”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국가의 3요소에 대한 국제법적 근거는 임시정부가 건립된 이후인 1933년에 등장했는데, 임시정부에도 소급 적용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임시정부 수립 당시 한반도는 주권을 일제에 불법적으로 강탈당한 특수한 경우였으며, 국가 3요소를 기준으로 삼아 건국 시점을 논하는 것이 온당한지에 대한 논란거리가 남는다. 또한 임시정부는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의 형태로 대한민국을 수립한 경우로, 망명처인 중국이 국가 승인을 보류했다는 점에서 국가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견해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자신의 전후처리 문제로 미국의 눈치를 보던 상황이었는데 세계2차대전 전후로 혼란스러웠던 국제 정세 상, 당시 국제법이라는 기준을 오늘날까지도 적용해야 할 문제인지 역시 논란이다.

위와 같은 사실들을 근거로 볼 때, 국가의 3요소에 따라 임시정부를 국가로 볼 수 없다는 견해는 결국 '해석'의 문제로 남는다. 뉴라이트 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되어 온 건국절 논란은 구속력 없는 국제법적 기준에 따른 것이며, 결과적으로 정치적 논쟁의 사안인 셈이다. 오히려 구속력을 가가지는 국내 및 헌법적 정통성을 따지는 것이 오히려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2. 초대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8년 건국설을 지지했다?

거짓. 1948년을 건국 시점으로 봐야 한다는 이들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서 ‘국부’라는 점을 강조한다. 보수 진영이 1919년 건국을 부인하고 임시정부 및 동북지역의 무장항일투쟁 역사를 깎아내려온 것은 이 전 대통령이 1948년 분단 단독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이른바 ‘이승만주의’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919년 이승만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 일왕에게 보낸 ‘건국 통보문’은 “우리는 대한민국이 독자적이고 독립적인 주권국가임을 공식 인정해 주기를 바라며 이에 부합하지 않는 모든 조약상의 약속들은 무효로 간주될 것이다”, “1919년 4월 23일 한국이 완전히 조직된 자주통치국가가 됐음을 당신, 그러니까 일왕에게 공식적으로 통보하라는 한국민의 명령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건국 통보문'. 출처 : 한겨레신문 기사

이밖에도 이 전 대통령은 1948년 대통령 취임 선서, 제헌국회 개회사, 국무총리 임명안, 대법원장 임명승인안 같은 정부 문서에 ‘대한민국 30년’이라고 표기했다. 때문에 1948년 건국설을 지지하는 보수 세력의 ‘국부’인 이 전 대통령조차 1948년 정부 수립을 ‘건국’이 아닌 ‘임시정부 계승과 재건’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3. 제헌헌법은 1919년을 건국의 원년으로 보고 있다?

진실.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전문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라고 표현하고 있다. 기미년인 1919년은 대한민국 ‘건립’의 해이며, 1948년은 ‘재건’의 해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 역시 제헌국회 개회사에서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기미년(1919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民國) 임시정부의 계승에서 이날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하며 민국 연호는 기미년에서 기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1948년 수립된 제헌국회가 새로운 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1948년 9월 1일에는 최초의 관보가 나왔는데, 발행일자가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다. 1919년을 대한민국 건국 원년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관보 1호. 출처 : 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rule/htm/0/03.htm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