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슬리퍼-스릿파-쓰레빠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7.08.28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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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환의 한글 팩트체크

'쓰레빠'를 많이 신는다. 쓰레빠, 여름에 참 편하다. 뭐 여름 뿐만 아니라 사계절 편하다. 집안에서도 질질 끌고 다니기 좋고, 더러는 집밖으로도 신고 나간다. 그런데 “발음이 쓰레빠가 뭐야? 슬리퍼지”라고 지적하는 분들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다. ‘쓰레빠’라는 것은 영어 슬리퍼에서 왔다.

영어사전을 확인해보자. 

slipper 1. (보통 slippers) (실내·무도용의) 가벼운 덧신, 슬리퍼(carpet slipper)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에도 괄호 안에 영어가 들어가 있는 걸 보면 분명히 영어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슬리퍼는 원래 ‘실내에서만 신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슬리퍼 (slipper): 실내에서 신는 신. 뒤축이 없이 발끝만 꿰게 되어 있다.
¶ 슬리퍼 한 켤레/슬리퍼를 신다/슬리퍼를 끌며 거실을 돌아다니다.

 

사실 요새 젊은이들은 슬리퍼를 많이 신는다. 젊은이들은 영어하고 친숙하다. 반면에 나이 좀 드신 분들은 쓰레빠를 많이 신고, 발음도 ‘쓰레빠’가 편하다는 말도 많이 한다. 어렸을 때부터 쓰레빠와 고락을 함께해 온 정 탓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슬리퍼를 신기도 하고 쓰레빠를 신기도 한다.

그런데 영어 ‘슬리퍼’가 어떻게 해서 ‘쓰레빠’가 됐을까? 영어에서 바로 한국어로 들어왔다면 ‘슬리퍼’라고 얼마든지 발음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이것도 미국이나 영국에서 한국으로 직행한 것이 아니고 일본을 경유해서 오다 보니 발음이 ‘쓰레빠’가 되었다.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또 하나의 의문이 남는다. 일본 사람들은 ‘쓰레빠’라고는 안 하고, ‘스릿파(スリッパ)’라고 발음한다. 일본사전을 확인해보자.

スリッパ (slipper)
足の先を滑り込ませて履く、留め金やひものついていない洋室内の履物 (발 앞을 미끄러지듯이 넣어서 신는 걸쇠(호크)나 끈이 없는 양옥 실내에서 신는 신발)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경로를 다시 정리하면 ‘슬리퍼-스릿파-쓰레빠’다. 일본의 가나문자로는 ‘슬리퍼’라고 표기할 수 없고, 한국인들에게도 다소 익숙한 ‘マクドナルド(마꾸도나루도=맥도날드)’처럼 ‘スリッパ(스릿파)’가 영어 ‘slipper’의 최선을 다한 표기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수한 한글 덕분에 ‘슬리퍼’라고 원음에 가깝게 표기한다. 세종대왕께 다시 한 번 감사드려야 하는 순간이다.

일본어 ‘스릿파’는 한국에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쓰레빠’로 소리가 강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뜨거운 된소리 사랑 탓이다. 영어로 할 때는 ‘가스 혹은 개스’나 ‘버스’라고 하면서도 우리끼리 이야기할 때는 ‘까쓰’, ‘뻐쓰’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으로 하나 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쓰레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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