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은 단식끝에 순국했다?

  • 기자명 정재환
  • 기사승인 2017.09.11 0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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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기 충신 최익현이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고 단식 끝에 사망했다는 얘기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주요 언론매체의 칼럼을 통해 반복재생되고 있다. 이는 사실일까? <뉴스톱>이 팩트체크했다. 

면암 최익현은 우국충정과 항일투쟁의 상징이다. 을사늑약 이후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일본과 싸우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나라가 망했는데 백성만 어찌 홀로 있을 수 있겠는가. 솥 안의 고기는 곧 삶길 것이요, 대들보 위의 제비는 곧 불탈 것이니, 죽음만 있을진대 어찌 한 번 싸우지 않겠는가. 살아서 원수의 종이 되는 것보다 죽어서 충의의 귀신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 초상화. 출처:위키피디아

면암의 출사표다. 면암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아니 죽기를 각오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책임과 회한은 그를 전장으로 이끌었다. 태인을 출발한 면암 의병은 한양을 향해 북상했다. 일제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군부를 압박해 전주, 광주, 안동의 진위대로 하여금 태인의병을 진압하고자 했다. 의병 해산을 명한 고종의 조칙에도 완강히 저항하던 면암이었지만, 남원 진위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일본군과는 싸워도 같은 동포와는 싸울 수 없다”며 의병을 자진 해산하고 의병장 임병찬, 고석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일제는 조선 민중의 동요와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 고조를 막기 위해 면암을 대마도에 유폐시켰다. 8월 27일 오전 서울을 떠난 면암은 8월 28일 아침 이즈하라(嚴原)항에 도착하였다. 대마도경비보병대대장 소좌 소에지마(副島以辰)는 수용소에 도착한 면암에게 관을 벗고 경례를 하도록 명령했고, 격노한 면암은 오히려 꾸짖으며 탈관을 거부하였다. 소에지마는 일본이 주는 밥을 먹었으니 일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며 면암을 총검으로 위협하였다. 이 사건으로 면암은 단식에 들어갔다.

 

내가 왜와 30년 동안 싸워왔으니, 저들이 나를 해치는 것은 조금도 괴이하지 않다. 또한 나는 나라가 위태해도 부지하지 못하고 임금이 욕을 당해도 죽지 못하였으니, 내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들의 음식을 먹고 그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도 의가 아니니, 지금부터는 단식하고 먹지 않을 것이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단식으로 굶어 죽는 것도 또한 운명이다.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은 면암의 순국비가 서 있는 슈젠지를 찾는다. 일제와 싸우다 순국한 면암의 비 앞에 서면 절로 숙연해진다. 대부분의 가이드들이 면암이 단식 끝에 순국했다고 설명한다. 단식 끝에 순국했다는 설명은 면암의 죽음의 의미를 더욱 사무치게 느끼도록 만든다.

 

대마도에 있는 최익현 순국비

하지만 사실은 이와는 좀 다르다. 면암은 대마도경비보병대대 병영 안에 있던 감옥에서 1907년 1월 1일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흔히 말하듯이 ‘단식 끝에 순국했다’면 무려 4개월을 생존한 것이다. 아무 것도 먹지 않고 4개월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단식 3일째 되던 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소에지마가 면암을 찾아와, 전날의 실수를 사과하면서 단발과 변복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고, 면암의 안위를 걱정하던 임병찬과 먼저 끌려와 있던 홍주 9의사가 간곡하게 만류한 끝에 그날 저녁부터 죽을 먹기 시작했다.

면암은 74세의 고령으로 대마도 유폐생활의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1907년 1월 1일 (음력 1906년 11월 17일) 마침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박민영의 대한선비의 표상 최익현)

단식 끝에 절명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서 면암의 죽음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의병을 일으킬 때부터 이미 면암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면암이 있었기에 후손들은 당당하게 가슴을 펼 수 있다. 참고로 이이화 선생과 ‘다음백과’는 면암이 12월 30일에 순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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