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대항쟁과 김수환, 87년 6월항쟁의 마중물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7.12.3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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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이어> 

영화 <1987>을 본 아들은 궁금한 점이 많았다.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한국 역사를 정확히 알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2부 글은 1987년 상황에 대한 아들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때 사회 분위기는 어땠어요?"

1987년보다 한 해 앞선 1986년은 매우 우울한 한 해였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졌다. 전편에서 언급한 성고문 사건은 그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86 아시안 게임을 성공리에 치른 뒤에는 더 기세가 등등했다. 급기야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다. 학생운동을 양분하고 있던 ‘자민투’ 세력은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정권에 강력히 맞서야 한다고 봤고 ‘애학투련’ 결성을 시도한다. 그 집회 장소가 건국대였다. 그런데 이 애학투련의 결성을 기다린 건 자민투 학생들만이 아니었다.

.원천봉쇄가 일상이던 시절 이상하게도 경찰은 학생들의 건대 진입을 막지 않았다. 10월 28일 오전 7시부터 녹색 제복의 ‘안드로메다 군단’ 전경들이 배치돼 있었지만 출입은 지극히 자유로웠고 학생증 검사조차 없었다. 그것은 그물이었다. 멋모르고 들어온 물고기들을 가득 채운 후 한 번에 쑥 들어올려 만선을 노래하기 위한 그물이었다.

건대항쟁에 참가한 학생들이 건물 옥상에 올라가 "살인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10.28 건대항쟁 기념사업회

집회까지 마음 푸근하게 치르고 집에 갈까 말까를 고민하던 시간, 경찰은 행동을 개시했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건국대학교를 들이친 것이다. 대경실색한 학생들은 학생회관과 단과대 건물로 쫓겨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지만 준비 없는 농성의 끝은 뻔했다. 대학생들이 홑겹 잠바로 10월 말의 한기를 버티며 초코파이 하나를 수십 명이 나눠 먹던 10월 30일, 정부는 저 유명한 ‘금강산 댐 공사를 통한 북한 수공 음모’를 폭로(?)한다.

63빌딩 반이 잠기고 국회의사당이 그 돔 지붕만 남기고 물에 찰랑이는 모습을 그림으로, 미니어처로 보여 주는 가운데 국민들의 대북 경각심은 높아졌고 정부는 10월 31일 건국대학교 각 건물에 있던 학생들을 강제진압, 체포한 뒤 무려 1288명을 구속시켰다. 말이 1288명이지, 이들을 조사할 경찰서조차 북새통을 이룰 정도의 사상 최대 구속 사태였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거창한 이름이 붙는다.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 사건”

글자 그대로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1986년에서 1987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은 그렇게 추웠다. 1288명을 빼앗긴 학생운동은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또 이슈를 잡아 가두 투쟁을 나가면 시민들이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경찰에 넘기기까지 했다고 한다. 기껏 그들을 위해 투쟁하노라 목울대 세우던 학생들이 ‘민중’들 발에 걸려 나동그라진 뒤 경찰에 끌려갔으니 그 심경도 어지간히 하수상했으리라. 그 겨울의 한복판에 박종철이 죽었다. ‘참고인’으로서 끌려갔고 선배의 행방만 못이기는 체 불면 무사히 집에 돌아와 밥 잘 먹고 졸업 잘했을 서울대학생, 호주머니 털어 ‘도바리’ (수배 중 도피 행각의 은어)치는 선배에게 건네고 누나가 짜 준 목도리까지 걸어 주며 “형 추워 보여요.” 라고 웃던 그 착한 청년이 물지옥의 공포 속에 세상과 이별해야 했던 것이다. 그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세상의 냉기는 더욱 곤두서는 듯 했으나 얼음장 속에서는 분노의 간헐천들이 솟아나고 있었다. 아무리 강하게 쥔 주먹 속에서도 모래는 새어오는 법이다.

1986년 10얼 31일자 경향신문.

“탁 치니 억” 당시 나는 고3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며칠 뒤 1교시, 갑자기 선생님이 출석부를 들더니 있는 힘껏 교탁을 쳤다. 60명이 숨을 죽이는 가운데 선생님은 우리를 보더니 허탈하게 말씀하셨다. “탁 쳤는데 와 억하고 안 죽노.” 아이들은 일제히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길지 않았다. 웃을 일이 아니었던 걸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2월 7일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의하는 집회가 전국적으로 열렸다. 부산은 번화가에 있던 대각사라는 절 앞에서 시위가 있었다. 영화 보러 갔다가 먼발치에서 시위를 구경하게 됐는데 한 늙수그레한 신사가 목놓아 부르짖었다. “종철아. 종쳐라.” 부산 억양으로는 ‘종철아’와 ‘종 쳐라’가 구분이 된다. 그 신사는 어떤 종을 치고 싶었을까. 아버지는 자식의 죽음 앞에 할 말이 없었으나 “우리는 할 말이 많다.”고 이 악무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했다.

 

“종교계 인사들이 많이 나오던데 실제로 그랬나요?”

천주교, 기독교, 불교, 성공회 할 것 없이 종교인들의 뜨거운 현실 참여는 87년 6월을 달아오르게 만든 우둥불 (들이나 산에서 노숙을 할 때 지피는 불)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순간은 영화 <1987>에 등장하듯 1987년 5월 18일에 있었던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고문경찰관 축소 조작 폭로 기자회견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많다. 원천봉쇄된 속에서도 87년 6월을 열어젖힌 6.10 대회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에서 치러졌고 6.10을 이끈 재야 인사들과 야당이 힘을 합친 국민운동본부는 향린교회 (영화에는 향림교회로 나오는)에서 발족했다. 언급했듯 부산의 시위 단골 장소는 도심 속의 절 대각사였다. 그러나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은 1987년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나왔다.

1987년 1월 26일 박종철 추모미사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이런 정권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에 대한 중대한 양심문제를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아, 김수환 추기경>, 김영사

이날 보통 사람들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속을 뒤집는 발언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아니 물론 그날은 사람들은 몰랐다. 보도지침 여전히 뾰족했던 즈음, 언론에서 그 발언을 제대로 보도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오히려 그 후에 유명해진 이날의 이야기는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아니 눈 질끈 감고 제 새끼들 챙기기에 부산한 장삼이사로서도 참아내기 어려운 창끝을 들이밀었다. 그 전환점의 주인공은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1987년 1월 26일은 월요일이었다. 하지만 이날 명동성당에서는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미사가 열렸고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기록되는 한 영원히 남을 강론을 남긴다. 두 손을 모으고, 때로는 흐느끼던 그의 교우들 앞에서, 그리고 성당 밖 선술집에서 욕지거리 내뱉으며 술잔만 비우던 무력한 사내들을 향하여, 고문 받고 죽어간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님을 안도하면서도 슬퍼하던 어른들의 머리 위로. 조금 길어도 읽어 보시라.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지난 1월 14일 하늘마저 노할 경찰의 포악한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학 고 박종철군의 참혹한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솟구쳐오르는 의분 속에 온나라의 모든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할 말을 잊고 하늘만 바라 보고 있는 어제, 오늘입니다.

민주 국가, 법치 국가, 정의 사회라는 대한민국 안에서 백주에 한 젊은이가 경찰에 연행된지 수시간 후 시체로 변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오늘의 우리 현실을 한없이 아파하면서,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각자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과거에 대한 뼈 아픈 반성과 앞으로의 나아갈 길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미사의 제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중략)

오늘 이 성전에서 근본적으로 박종철 군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이 정권에 대해 우선 하고 싶은 한마디 말은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하는 것입니다. 이번 박종철 군의 참혹한 죽음은 우연한 도발적 사고가 아닙니다. 이번 고문 사건은 지난해 6월에 있었던 천인공노할 부천 경찰서 권 양의 성 고문 사건과 역시 재작년 9월에 있었던 전 민청련 의장 김근태 씨에 대한 경찰의 잔혹한 고문 사건, 이 밖의 연속적으로 일어난 수많은 고문 사례들 중의 하나이며, 다른 한편으로 헤아리기 힘들도록 많은 수의 양심인들이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략)“

당시 성당에 있었던 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는 78학번 회사원이었다. 유신 치하에서, 80년 광주에서, 그리고 그 후 전두환 정권 하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깨지고 허리가 부러지고 숨이 막혀 갔던 아벨들의 존재가 떠올라 왔고 떠올랐고, 본인 역시 무심한 카인으로서 자기 먹고 살 일 챙기고, 부지런히 일하여 저금 쌓고 내 집 장만을 위해 줄달음치면서 “내가 그들하고 뭔 상관이냐.” 냉소하던 스스로가 미치도록 부끄러웠다고 한다. “어쩌면 내가 카인의 후예다 아니 카인이다.” 

부산에서 일어난 한 시위에서는 수십 명의 목사들이 길거리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데모 노래는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 등의 운동권 삘 나는 찬송가도 부르지 않았다. 녹음기처럼 부르는 노래는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예수쟁이’들의 찬송가였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겠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우리 앞에 누가 서리요.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승리를 얻겠네.” 그래도 목사들이라 그런지 전경들이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 대신 사과탄을 터뜨리고 최루가루를 머리 위에서 뿌려 댔다. 그러나 목사들은 눈물콧물을 뿌리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목 놓아 악을 썼다. “예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승리를 얻겠네.” 불경한 말이겠으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예수는 박종철일 수도 있었다. 박종철은 무심히 일상을 살며 독재에 순응하던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은 나약함과 나태함에 묻혀 살던 수많은 ‘나’들을 각성시켰다. 종교인들이 그 앞에 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월 항쟁 이전에도 데모는 많았나요?”

많았다. 너무나 많았다. 앞서 얘기한 2월 7일 투쟁은 박종철의 49재날인 3월 3일로 이어졌지만 정권이 우려할만큼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또 한 번 자신감을 얻은 전두환이 자충수를 둔 것이 4.13 호헌조치 발표였다. 통제할 수 있고 밟을 수 있고 밀고 나갈 수 있다는 오만함의 상징이었다. “현행헌법으로 정권 이양하겠다.”는 것은 “내 친구에게 정권을 넘기겠다.”는 선언과 다름 아니었고 사람들의 속을 뒤집고 헤집어 놓는다. 거기에 영화 <1987>에 등장하는 정의구현사제단의 고문 경관 축소 조작 폭로가 정권의 이마와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기름을 퍼부었다. 그리고 1987년 5월 23일. 전혀 새로운 형태의 데모가 종로 바닥에 등장한다.

1987년 5월 23일 탑골공원 앞. 뻔히 아는 얼굴들이 모른체 하면서 긴장한 발걸음을 옮기고 경찰의 감시의 눈동자도 칼날처럼 번득이던 오후 2시였다 (혹자는 3시로 기억한다) 마침내 누군가 시위를 시작했고 태극기가 종로 거리에 펼쳐졌다. “나와! 나와!” 학생들은 일시에 거리로 몰려들었다. 보통은 대오를 형성하고 행진을 하거나 경찰에 맞서야 할 테지만 학생들은 뜻밖의 행동을 전개한다. 대오를 형성한 뒤 일제히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버린 것이다. 흐리고 간간히 비가 오던 날씨는 장대비로 바뀌어 팔짱 깍지 끼고 드러누운 학생들 위로 들이부었다.

연행이 기정 사실이었던 일종의 ‘자살적 시위’였기에 1학년들을 시위에 참여시키지 않은 과나 서클이 많았다. 1학년들은 인도에 서서 선배들이 누운 채 하늘을 향해 내뻗는 팔뚝들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경찰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잠깐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본연의 자세를 되찾고 연와대열로 뛰어들었다. 방패질이 시작됐고 군홧발이 어지러이 내려찍혔다. 광주항쟁 기념 주간이었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그러나 노래는 비명으로 틀어막혔다. 악착같이 버티던 학생들의 팔짱은 우악스런 발길질에 풀려 나갔고 머리채 잡히고 곤봉을 맞으며 끌려갔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나섰다.

1987년 5월 23일 종로에서 벌어진 연와시위.
최규석 <100°c>에 묘사된 연와시위.

이 시위는 최규석의 만화 <100℃>에도 잘 묘사돼 있다. 학생들을 지켜보던 한 시민이 빗 속에 우산을 접는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차도로 내려가서 백골단의 머리를 우산으로 후려친다. “왜 학생들을 때리는 거냐. 학생들이 뭘 잘못했어.” 그러자 사람들이 합세한다. “애들 풀어줘. 죄없는 애들을 어디로 끌고 가려고? 또 죽이려고? 우리 보는 데서 죽여 봐!” 영화 <1987> 영화 엔딩에는 한 아주머니가 분노에 차서 경찰을 뒤쫓으며 따지고 드는 실제 장면이 나온다. “왜 잡아가요? 말해 봐요. 왜 잡아가요?”

그 와중에 학생들은 곤죽이 되도록 맞으며 끌려갔다. 끌려가는 선배들을 보고 울부짖던 1학년들이 경찰들에게 달려들다가 나란히 닭장차에 처박히기도 했고,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1학년더러 너희들은 참가하지 말라고 했지 않냐며 호통 치는 선배도 있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연행됐다. 바로 7개월 전 무려 1200명이 넘는 학생들을 동시에 구속시킨 전력이 있는 정부인지라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수백 명의 학생들을 버스에 태우긴 했는데 그들을 제대로 조사할 경황이 없어진 경찰이 거의 모두를 훈방으로 내보낸 것이다. 죽고자 하면 산다는 이순신 장군의 명언이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랄까. 새벽녘까지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왔다. 당시 대학생들이 부르던 노래 가사처럼 “쏟아지는 빗발 뚫고 오던 무거운 어깨”를 겯고 “약속한다 그대를 딛고 전진하는 새벽”을 맞으며 “어느 새 닥친 조국의 아침 그대를 기억”하면서.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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