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 해석, '한일 역사전쟁'의 서막

광개토왕비문 조작설의 역사와 반론 ①

  • 기사입력 2018.01.22 02:24
  • 최종수정 2018.01.22 23:44
  • 기자명 안정준
1월 3일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서예학자인 김병기 교수가 광개토왕비문 ‘변조설’을 다뤘다. 실제로 1970년대초에 광개토왕비문의 글자들이 변조되었다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팩트체크 미디어 <뉴스톱>은 2회에 걸쳐 광개토왕비 발견 이후 한중일의 '해석 전쟁'을 소개하고 '광개토왕비 조작설'의 실체를 확인한다.

일본인들이 비문의 일부 글자들을 변조해서 고대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했다는 이 설은 현재도 일반인들에게 꽤 널리 알려져서 회자되고 있다. 이 ‘조작설’은 과거 일제가 식민사학의 일환으로 한국사를 왜곡・축소하려했다는 사실과 연관하여 마치 하나의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경향도 없지 않은 것 같다.

JTBC <차이나는 클라스> 광개토왕비문 조작설 제기

김병기 교수는 바로 이러한 ‘조작설’에 기반을 두고 자기 나름의 지식에 기반하여 새로운 비문 변조의 방식을 제시해본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사 전공자의 입장에서 평가할 때 그가 언급한 조작과정은 현재 역사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비문의 연구 현황을 별반 고려하지 않은 수준에서 제기된 것이다. 물론 학술적으로 논문 등을 통해 자기 설을 제시해보고 검증받는 것이야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TV 교양프로를 통해 대중들에게 비전공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여과 없이 제시하는 것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특히 김병기 교수가 서예학자로서의 ‘육감’을 중요한 근거처럼 제시하면서, "자기가 비문의 문장을 따라 쓰다가 ‘콱’ 막히는 부분이 바로 조작된 ‘그곳’이었다"는 식의 발언은 그동안 연구자들의 치밀한 학술적 고증을 통해 이루어져왔던 광개토왕비의 연구 현황을 무시하고, 대중들의 ‘무지’와 ‘환상’만을 더욱 증폭시킬 우려가 있는 대목이다.

과거 일본 역사학계는 1880년대에 재발견되었던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을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강조한 바 있다. 4세기에 일본 열도에 있었던 왜(倭)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장악해 오랫동안 지배했다는 이 설을 학술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20세기 초부터 많은 조선인 연구자들이 비문 연구에 매달려왔다. 그동안의 치열한 연구 성과와 현황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비문을 따라 쓰다가 ‘콱’ 막히는 데가 있었다"는 식의 밑도 끝도 없는 권위적인 발언은 학계의 학술적 권위를 떨어뜨리고,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이 분야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에게 비문 연구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크다. TV 교양프로그램 제작자들 역시 역사 관련 프로그램의 강연자를 섭외하고 방송 편집을 할 때 마땅히 이러한 문제들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의무 아닐까.

 

1913년에 촬영된 광개토왕비

다른 한편으로 광개토왕비의 연구 현황이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단순히 비문의 내용이 난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광개토왕비문의 해석과 ‘임나일본부’설을 둘러싼 논쟁이 단순한 학술논쟁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한일 양국 간의 근대적 가치관과 이데올로기가 고스란히 투영된, 사실상의 ‘역사전쟁’으로 비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치열한 ‘역사전쟁’의 여파는 비문에 대한 연구 현황이 일반인들에게 왜곡된 형태로 알려지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국ㆍ일본학계의 광개토왕비 연구는 실제로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임나일본부’설의 이해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 글에서는 지난 19세기 말 광개토왕비가 재발견된 이래의 연구 현황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근대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고대사 인식의 잔영(殘影)이 여전히 남아있는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 문제 역시 함께 짚어보려고 한다.

광개토왕비의 재발견, 그리고 임나일본부

5세기 초반까지 고구려의 수도로서, 또 평양으로의 수도를 옮긴 이후에도 ‘별도(別都)’로서 융성했던 국내성(國內城, 지금의 지린성 지안시) 지역은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한동안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세워졌던 광개토왕비 역시 오랫동안 잊혀진 채로 기록에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중국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이 지안 지역은 자국의 수도에서 멀리 동떨어진 변방지역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그들은 압록강 중류 유역의 돌무덤 떼나 성(城) 유적들에 특별히 관심을 갖거나 보살피지 않았다. 게다가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이후 만주 지역에는 거란과 여진족이 주로 활동하였는데, 이들 역시 지안 지역과 관련된 기록들을 자세히 남겨두지 않았다. 광개토왕비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멸망 이후 약 8백년이나 지난 조선시대에 가서야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사람들도 압록강 이북의 지안 지역은 자국의 영토가 아니었기 때문에 접근이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의 북방 진출을 경계하고 있던 명나라의 견제 등으로 조선 문인들이 그 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끼와 덩굴 등으로 뒤덮여 있는 거대한 비석의 표면을 드러내고 정식으로 글자를 종이에 뜨는 작업(탁본)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기간 광개토왕비 근처에 머물며 작업을 진행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민간인이 그곳에 가더라도 주변 여건상 그런 일을 몰래 시행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국경 너머 이 지역을 간혹 왕래하던 사람들은 눈에 띄는 고구려 성곽과 무덤들을 단지 과거 여진족이 세웠던 왕조인 금나라(1115∼1234)가 남긴 유적으로 여겼던 것 같다. 광개토왕비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여겨지는 15세기 중반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주(注)에서도 그러한 인식이 엿보인다.

동북아역사재단 <고구려 유적의 어제와 오늘(고분과 유물)>14~15쪽. 중국 지린성 지안시의 고구려 국내성 유적지의 모습이 보인다.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서쪽으로 강 건너 140리에 큰 들판이 있고 그 가운데 옛 성이 있다. 민간에서 말하길 대금황제성(大金皇帝城)이라 한다. 성 북쪽 7리에 비(碑)가 있는데 그 북쪽에 돌로 만든 고분(石陵)이 둘 있다.”

‘대금황제성’은 고구려의 도성 유적인 국내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 ‘성 북쪽 7리의 비’가 광개토왕비, ‘돌로 만든 고분’은 현재 장군총과 또 다른 왕릉으로 비정된다. 당시 조선 사람들이 현지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국내성을 비롯한 광개토왕비를 막연히 금나라 유적으로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넓은 황성 뜰은 긴 강가에 아득한데

당시의 종적은 찾을 길 막막하고

우뚝하게 천척비(千尺碑)만 남아 있네

위 글은 15세기 평안감사 성현(成俔)이라는 사람이 남긴 <황성(皇城) 교외를 바라보다>라는 시의 일부이다. 여기에도 압록강에서 지안 지역을 바라보며, 국내성(넓은 황성)의 모습과 광개토왕비(천척비)의 모습을 묘사한 구문을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에 광개토왕비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온다. 다만 이러한 기록들에서도 조선시대 사람들은 모두 광개토왕비를 막연히 금나라(여진) 황제가 세웠던 비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광개토왕비의 존재는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특히 17세기 중반의 ‘봉금(封禁)’ 조치는 광개토왕비의 발견을 더욱 지연시켰다고 할 수 있다. 만주 일대에 기반을 두었던 청나라 사람들이 중원지역으로 대거 이주하게 되면서 지안 지역을 비롯한 만주 일대가 텅 비게 되었고, 빈 경작지를 노린 많은 한족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게 되었다. 이에 1670년에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신성한 지역이었던 만주 지역으로의 민간인 출입을 금지시키는 이른바 ‘봉금 조치’를 시행했다. 이 조치는 거의 200여년 가까이 지속되었으며, 이 때문에 광개토왕비의 발견도 한참 뒷 시기로 미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915년 집안지역의 광개토왕비

이 봉금 조치는 청 말인 1876년경에 이르러서야 해제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봉금을 해제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이 지역을 다스렸다. 이를 계기로 많은 농민들이 지안 지역에 들어와 경작을 하게 되었는데, 1880년 무렵에 이르러서야 농경지 개간을 하던 한 농민이 광개토왕비를 발견해 현지의 청나라 관리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자그마치 1200여 년이 지난 이후에 비의 존재가 다시금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발견 당시 비는 온통 이끼와 넝쿨로 뒤덮여 있어서 그 일부를 제거한 뒤에야 겨우 일부 글자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비의 부분 탁본이 베이징(北京)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광개토왕비의 존재가 드디어 청나라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고증학(考證學)이 유행하고 있었고, 그 일환으로 오래된 비석의 글자들을 토대로 한 서체(書體)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청나라 사람들은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에는 별반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은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일부 글자들의 형태에만 관심을 보였을 뿐, 비문의 전체 내용에 대한 분석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지 않았다. 만약 이때부터 비문의 전체 내용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우리가 굳이 이러한 가정을 해보게 되는 이유는 비문의 전체 글자를 해독하고 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던 곳이 바로 근대 제국주의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1883년에 일본군의 중위 계급을 달고 있던 사코우 가게노부(酒勾景信)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안 지역에 들어와서 어떤 임무를 수행하다가 우연히 광개토왕비를 발견하게 되었다. 거대한 크기와 4면에 새겨진 수많은 글자들을 보고 범상한 비가 아님을 직감한 그는 광개토왕비의 전체 탁본을 구해서 이를 일본에 반입시켰다.

이렇게 반입된 탁본을 근거로 일본에서는 광개토왕비문에 대한 수년간의 분석을 진행했다. 그리고 1889년에 이르러 능비의 전체 판독문과 기초적인 연구보고를 <회여록(會餘錄)>이라는 학술지에 싣게 되었다. 바로 이 연구서를 통해 광개토왕비가 고구려 때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이 최초로 밝혀졌다. 드디어 일본 근대학자들의 비문 연구가 본격화된 것이다.

1883년 사코우 가게노부가 일본에 전했던 광개토왕비 탁본(묵수곽전본). 노란색 표시 부분은 신묘년조 문구다.

 

일본학자들의 신묘년조 해석, 그리고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반격

일본학자들은 수 년 동안의 기초적인 조사를 통해 광개토왕비의 글자들을 판독해내고, 그 전체 내용을 해석했다. 그런데 이들이 비문의 내용을 두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은 단순히 광개토왕비가 고구려비라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1880년대 당시 일본은 <일본서기>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4세기 이래 왜(倭)가 한반도 남부의 가야를 비롯한 백제․신라까지도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왜가 한반도 남부를 약 200여 년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입증할 수 있는 교차자료가 없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해 다른 어느 기록에도 왜의 한반도 남부지역 장악을 뚜렷하게 입증할만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사코우에 의해 입수된 광개토왕비문 탁본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발견되었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일본측 해석>: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 백잔, □□,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실로 놀라운 기록이었다. 광개토왕비는 당대의 1급 사료이다. 5세기 초반 당시에 고구려인이 직접 작성한 사료이기 때문에 후대에 작성된 문헌 사료들보다 훨씬 생생한 기억에 의거한 정보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료에서 왜가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 백제・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하된 백성(臣民)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진술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왜가 한반도 남부에서 실제로 활동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 아닌가.

일본학자들은 위 구절을 근거로 해서 왜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의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하여 신하된 백성(신민)으로 삼았으며, 더 나아가 한반도 남부의 지배권을 두고 북방의 강자였던 고구려와 대립할 정도의 강대한 세력이었다고 파악했다. 광개토왕비문의 신묘년조가 4세기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설, 즉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인 근거로 활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백제, 신라가 일본의 신민이 되었던 일에 대해서 혹자는 의심할지 모르겠지만, 이 비문은 고구려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고, 바로 일본의 고대 역사와 일치한다. 즉 천고에 비할 바 없는 좋은 증거이니, 역시 유쾌한 일 아닌가! (橫井忠直)”

 

당시 일본이 광개토왕비의 내용을 통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던 것은 단순히 고대의 역사에 대한 학술적인 의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당시 일본은 장차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이미 조선에 정치적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청나라, 그리고 한반도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러시아 등과 대립을 하게 되었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일본 내부의 반대여론도 있었다. 1880년대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진출의 역사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확보가 절실하게 요구되던 시기였던 것이다.

이때 발견된 광개토왕비문의 내용, 특히 신묘년조는 임나일본부설, 즉 4세기에 이미 왜(일본)의 신공황후가 ‘속국(屬國)’이었던 한반도 지역을 정벌했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17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정벌(임진왜란)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이 과거의 속국이었던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하다’는 기묘한 논리로 이어졌다. 즉 당시 일본인들은 광개토왕비라는 고대의 역사 기록을 끌어다가 자신들의 정치・외교적 이해관계를 정당화하는데 활용하였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 식민지 치하에 있던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1930년대 이래로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대표적 인물로 정인보를 들 수 있는데, 그의 견해는 일제시기 이후인 1955년에 이르러 정식 발표되었다. 정인보는 신묘년조의 행위 주체를 왜가 아닌 고구려로 보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정인보 해석: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통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정인보는 한문이 갖는 독특한 특성, 다시 말해 앞에서 반복되는 주어나 목적어 등이 문맥에 따라 종종 생략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문장 중간 중간에 (고구려의), (고구려가), (왜를)과 같은 생략된 주어 및 목적어를 끼워 넣었다. 이 새로운 해석안에 따르면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격파했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격파한 상황이 된다. 즉 신묘년조는 왜의 한반도 침략이 아닌 고구려의 왜국 정벌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북한의 김석형도 역시 고구려를 주어로 한 새로운 신묘년조 해석안을 내놓기도 했다.

김석형 해석: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백제가) 왜를 동원해 신묘년에 (고구려에) 쳐들어 왔으므로,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백잔을 격파(破)하고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이 해석 역시 중간에 주어와 목적어가 다수 생략되어 있었다는 가정 하에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한 주체를 고구려로 설정하였다. 고구려를 주어로 둔 이러한 해석들은 <삼국사기> 등에 나타난 4세기 당시의 국제정세를 고려할 때 왜가 백제・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에 신묘년조 기사에서 왜(倭)의 비중을 줄이는 가운데 고구려 우위의 상황으로 다시 해석하였고, 이를 통해 일본(왜)에 대한 한민족(고구려)의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다고 뒤바꿔 이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의 새로운 금석문 자료를 발견했을 때는 사료 그 자체에 입각한 해석이 1차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런 관점에서 순수하게 신묘년조의 한문 해석 자체만 놓고 본다면 어느 쪽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의 관점에서 냉정하게 판단해본다면 아무래도 문장 중간 중간에 주어와 목적어를 임의로 끼워 넣은 정인보・김석형 등의 해석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어 보인다. 해석 논쟁이 한창이던 당시에도 제3자 입장인 중국학자가 위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해석이 갖는 어색한 점들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학계의 광개토왕비문 연구와 이를 토대로 한 임나일본부설 주장은 195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논리적인 반박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면은 1970년대 초에 등장하는 한 재일교포사학자의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2회 기사에서 계속>

안정준 팩트체커는 경희대 연구교수며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안정준   kyuri21@naver.com  최근글보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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