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쌔신 크리드' 게임 속 거닐며 고대를 체험하다

  • 기자명 이경혁
  • 기사승인 2018.01.25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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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faction)이라는 장르가 있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인 팩션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에 가상의 설정과 서사를 섞어 만드는, 사실 기반의 허구로 구성되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한때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소설 ‘다빈치 코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편이 소실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그럴듯한 허구를 얹어 만든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등이 팩션소설로 유명하다. 현실의 이야기에 존재하는 빈 공백을 그럴듯한 상상력으로 메워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장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어쌔신 크리드 게임시리즈에서 성당기사단원으로 나온다.

디지털게임에서도 팩션은 상당히 인기있는 장르다. 오히려 다른 매체들에 비해 게임은 팩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범주가 넓은 편이다. 실제 역사 속의 사건과 인물들을 캐릭터와 수치로 뿌려 두고 알아서 가상의 역사를 진행해 나아가는 ‘대항해시대’나 ‘문명’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부터 실제 역사 속의 사건들을 가상의 다른 맥락으로 재해석하는 '어쌔신 크리드'같은 액션 어드벤처 게임까지, 다양한 팩션게임을 제작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팩션중에서도 첫 손에 꼽을 만한 게임이다. ‘암살자의 신조’ 정도로 번역이 가능한 게임의 제목은 정확히는 중동 지방에 실존하던 종교단체인 ‘아사신’으로부터 유래된 암살단을 가리킨다. 실제 역사 속에서 셀주크 왕조와 대립하며 은거하여 주요 인사들에 대한 암살을 수행하던 이들은 암살자의 작전투입 전에 마약의 일종인 해시시를 피으먄사 ‘해시시 피우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하사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그 암살단이라는 존재로부터 뻗어나온 상상력으로 역사 속의 주요 사건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그 장면 장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암살이라는 주제로 풀어낸 인기 게임 시리즈다.

 

암살단과 기사단의 대립을 다룬 10년 시리즈

‘어쌔신 크리드’속의 가상 세계관은 주인공 격인 암살단과 그의 영원한 라이벌로 등장하는 성당기사단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역시 역사 속에 실존했던 십자군 시대의 단체인 성당기사단은 비단 ‘어쌔신 크리드’ 외의 매체에서도 수없이 음모론의 주인공(다빈치 코드의 템플기사단도 같은 단체다)으로 등장한 바 있다. 성당기사단은 ‘어쌔신 크리드’에서도 이른바 ‘에덴의 조각’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고대의 강력한 유물(환각을 보여줘 인간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을 이용해 인류를 지배하려는 음모집단으로 등장한다. ‘어쌔신 크리드’는 성당 기사단의 음모에 맞서 수 천년째 싸워 오고 있는 암살단의 시점에서 풀어나가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다.

에덴의 조각은 성경에서 나오는 선악과를 모델로 만들었다. 이걸 소유한 사람은 강력한 지식을 얻게 되고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

게임이 도입하는 팩션의 방식은 담대하면서도 흥미롭다. 태초의 인류가 신으로부터 받으면서 동시에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한 이유로 묘사되는 선악과는 게임 안에서 실재하는 강력한 아티팩트로 묘사되며, 역사 속의 수많은 인물들이 유물의 힘을 이용해 실제 역사 속의 사건들을 일으키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게임은 서술한다. 다루는 역사 속 시대 자체가 폭 넓은만큼, 상당한 실존 인물들이 게임 안에서 성당 기사단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몽골제국의 몽케 칸,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체자레 보르지아, 스페인 신대륙 정복의 프란치스코 피사로 등을 넘어 20세기의 토머스 에디슨까지도 게임 안에서 성당기사단의 일원으로 언급된다.

신의 유물을 활용해 인류를 통제와 질서 안에 가두고 지배하려는 성당 기사단에 맞서는 암살단은 모든 제도적 질서의 바깥에서 오직 스스로의 윤리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초인(Ubermansh)으로서의 가치를 추구하며 성당기사단의 음모를 막아내기 위한 암살활동을 수행한다. 팩션답게 실존인물의 상당수가 암살단 단원으로 등장한다. 당장 앞에서 성당기사단 일원으로 언급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을 맡은 브루투스가 암살단 일원이며, 중국 명대의 학자이자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도 암살단의 마스터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일본 전국시대 닌자로 이름을 날린 핫토리 한조도 암살단 소속이며, 역사 속의 연쇄살인범이었던 잭 더 리퍼는 암살단의 신조를 저버린 미치광이 살인마로 설정되었다.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의 적절한 배합을 통해 버무려진 이야기는 역사 속의 주요 사건 뒤에 자리한 갈등을 선대의 유물이라는 강력한 힘을 두고 어둠 아래에서 벌이는 권력투쟁의 산물로 해석하면서 음모론 판타지의 기본틀을 완성한다. 10여 년이 넘어가는 시리즈 동안 풀어낸 이야기가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기에 ‘어쌔신 크리드’의 기사단 – 암살단 대립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게 되었으며, ‘어쌔신 크리드’라는 팩션 기반의 게임이 탄탄한 별도의 세계관 위에서 펼쳐질 수 있게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팩션 게임의 더욱 튼튼한 기반은 사실적인 고증으로부터

단지 소설과 같은 서사매체였다면 위와 같은 인물과 사건의 설정만으로도 충분했겠지만, 디지털게임은 기본적으로 시청각에 기반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그 현실성을 구현함에 있어 시각적 구성은 서사적 구성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가 된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는 초기작인 1편부터 이 점을 소홀히 하지 않아 왔고, 가장 최근작인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에서는 세간의 찬사를 받을 만큼의 성과를 선 보인 바 있다. 

'어쌔신 크리드' 플레이어는 도시의 높은 건물에 올라가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기습이나 은신을 위해 '신뢰의 도약'을 한다. 보통은 건초더미에 떨어져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다.

‘어쌔신 크리드’ 1편은 시공간적 배경으로 예루살렘과 다마스커스 같은 중동 지방의 옛 도시를 선택했다. 진짜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세세한 고증을 거쳐 만들어진 게임 속 도시공간이 인상적이다. 길을 가다 부딪히면 한소리씩 던지며 짜증내는 시민들, 처음 보는 주인공을 향해 달려들어 구걸로 귀찮게 하는 거지들 사이를 헤집으며 경비병의 눈을 피해 때로는 건물 위로, 때로는 군중 틈으로 섞여드는 암살자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은 게임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늘 상상에만 머무르던 옛 중동 지방의 도시들을 실제로 보는 듯한 생생함에서 놀라움과 즐거움을 얻었다. 도시마다 설정되어 있는 가장 높은 포인트에 기어올라가 도시 전경을 바라보고 낙하하는 '신뢰의 도약'을 통해 게임 내 지도를 오픈하는 방식은 플레이어에게 고대 다마스커스 전체를 조망하는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선사했고, 이는 1편의 예루살렘, 2편의 베네치아처럼 시리즈 내내 역사 속 주요 도시들의 조망을 현실적으로 제공하는 시리즈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시리즈 최근작인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은 시공간적 배경으로 가장 유명하면서도 동시에 시공간적으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고대 이집트 왕국을 다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현재 이집트 수도 카이로가 아닌, 고대 이집트 마지막 왕조였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수도이자 알렉산더 시대의 유물인 나일강 하류의 알렉산드리아를 게임속에서 복원했다. 고고학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며 고증을 통해 잊혀진 고대 도시들의 복원도를 그려 온 장 클로드 골빙의 작업을 기반으로 도시 디자인과 그래픽작업을 했기 때문에 매우 자세한 도시를 엿볼 수 있다.  (장 클로드 골빙의 고대 도시 복원작업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고증으로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게임속에서 부활한 파로스의 등대.

플레이어는 알렉산더 이후 지중해 문명의 대표도시로 자리매김했던 알렉산드리아와 그 안에 존재했던 세계의 불가사의인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파로스의 등대를 대면하게 된다. 직접 외양을 보는 수준을 넘어 들어가보거나 기어올라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도서관 안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보관된 동시대의 수많은 장서들이 들어 차 있고, 알렉산드리아 대등대는 올라도 올라도 끝이 없는 수준의 높이로 플레이어에게 이것이 진정 불가사의였음을 증명한다. 실제 고고학자의 디자인을 기반으로 뽑아낸 고대 이집트의 중심도시는 어찌 보면 영화 이상으로 플레이어의 감각을 프톨레마이오스 시대로 옮겨 놓는 강한 감흥을 전달한다.

기자의 피라미드 또한 지금이 아닌 고대 이집트 시점에서 볼 수 있는 경험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은 제공한다.  게임 속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도 몇 천년 전의 건축물인 이집트 상왕국 시절의 피라미드는 이미 가운데가 도굴로 인해 구멍이 뚫린 모습으로 등장한다. 당시부터 이미 비밀과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피라미드였다는 사실을 게임 안에서 바라보는 플레이어의 심정은 색다르고 씁쓸하다. 특히나 클레오파트라 시대와 피라미드 건설시기가 사실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굉장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이 게임 속 피라미드의 모습을 통해 피부로 느껴진다. 고대 이집트의 유구한 역사가 주는 무게감이 게임의 스토리를 넘어 훅 하고 다가오는 감흥과 함께 전달된다.

실제 갤리선 전투를 그대로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해상 전투장면.

책, 사진, 영화가 아닌 역사적 체험의 매체로서 게임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의 제작사는 최근 고대 이집트를 다룬 신작의 번외편 격으로 게임 본편의 스토리를 따르는 방식이 아닌, 일종의 관광객 모드를 도입하겠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 게임 안에 구현된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이집트 세계가 주는 감흥이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발언이었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에 구현된 고대 이집트의 모습에 감동했고, 그 피드백이 굳이 전투와 암살, 퀘스트와 스토리 없이도 그저 배경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했기에 가능한 개발 결정일 것이다.

이는 기존의 책이나 사진, 영화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과는 다른, 게임만의 독특한 방법론의 유의미함을 입증한 사건이다. 비록 가상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탄탄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재구성한 고대 이집트는 그 디테일한 연출과 구성을 통해 그저 게임 속 세계를 걷기만 해도 충분한 공간으로 재탄생됐다. 미디어로서의 게임이 교육이나 여행 같은 분야에서도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가 될 수 있다. 디지털 기술 발전 덕분에 현실 기반의 허구라는 상상력의 영역을 실제 체험할 수 있는 일종의 가상공간 형태로 구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학생들이 세계사를 교실이 아닌 가상공간의 어딘가에서 직접 피라미드 사이를 걸어다니면서 배우는 시대가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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