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 업적 과장한 고구려인…능비조작은 없었다

'차이나는 클라스'가 제기한 광개토왕비문 조작설을 반박하는 최신 연구경향 ②

  • 기사입력 2018.01.23 01:18
  • 최종수정 2018.01.23 01:29
  • 기자명 안정준
1월 3일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교양 프로그램에서 서예학자인 김병기 교수가 광개토왕비문 ‘변조설’을 다뤘다. 실제로 1970년대초에 광개토왕비문의 글자들이 변조되었다는 설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팩트체크 미디어 <뉴스톱>은 2회에 걸쳐 광개토왕비 발견 이후 한중일의 '해석 전쟁'을 소개하고 '광개토왕비 조작설'의 실체를 확인한다.

<1회 기사에 이어>

1월 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장면. 김병기 전북대 교수는 광개토왕릉비 위조설을 제기했다.

신묘년조를 둘러싼 논쟁과 '능비조작설'의 등장

신묘년조의 해석을 두고 벌어지던 한・일 역사학자들의 논쟁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새로운 문제로 전환되게 되었다. 바로 기록의 해석이 아닌, 글자의 판독과 탁본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 전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1883년에 사코우 가게노부가 처음 탁본을 입수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비석의 표면에 종이를 대고 먹을 사용해 글자를 떠내는 작업인 탁본은 그 작업형태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나뉜다. 사코우가 일본에 가져왔던 탁본은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비면에 종이를 댄 뒤에 얇은 종이를 통해 비쳐 보이는 글자 획을 펜 등으로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까맣게 먹으로 칠한 방식이다. 이를 보통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탁본이라기보다는 모사본이라고 해야 맞다.

실제로 묵수곽전본은 비면의 글자모양을 그대로 떠내는 탁본에 비해서는 정밀도가 상당히 떨어진다. 다시 말해 글자 획을 그리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되기 쉽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일본에서는 비면에 먹을 두드려서 글자를 떠내는 방식의 정밀한 탁본들을 추가로 입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여러 장의 탁본들을 통해 자신들이 최초에 비문에서 판독한 글자들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학자들의 이러한 ‘믿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비면에 종이를 대고 그대로 찍어낸 탁본(왼쪽)과 묵수곽전본(오른쪽)의 비교

당시 일본에서 광개토왕비 연구를 하고 있던 재일교포 학자 이진희는 비문의 탁본을 통해 글자들을 판독하는 작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입수되었던 여러 장의 탁본들을 비교하면서 새로운 판독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였다. 비문의 같은 위치에 있는 동일한 글자들이 탁본들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탁본을 하는 작업자의 정성에 따라 같은 글자라도 조금 흐리거나 진하게 나타나는 차이는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글자 획의 위치가 달라지거나 기울기가 변하는 경우는 문제가 다르다. 동일한 비면에 정상적으로 탁본 작업을 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원인은 비면에 발라진 석회 때문이었다. 광개토왕비의 표면에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석회를 바른 흔적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어떤 목적으로 비면에 석회를 발랐던 것일까. 이진희는 1883년에 지안에서 비문의 탁본을 최초로 구해서 일본에 반입시켰던 사코우 가게노부라는 인물에 주목했다. 그는 최초에 포병 장교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후의 집요한 조사를 통해 일본 참모본부의 밀정(密偵)이었음이 밝혀졌다. 당시 일본은 중국 만주 지역으로의 군사적 진출을 앞둔 상황에서 이 지역에 스파이를 보내 다양한 정보들을 조사하고자 했다. 사코우는 바로 이때 참모본부의 명령으로 만주지역에 파견되었던 인물이었으며, 조사 과정에서 뜻밖에 광개토왕비를 발견했던 것이다.

 

재일사학자 이진희, 일본군의 광개토왕비문 변조설 제기

이진희는 1972년 10월에 위와 같은 사실들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 육군 참모본부가 광개토왕비의 글자들을 변조했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들고 나왔다. 이진희는 1883년 당시 사코우가 광개토왕비의 이용가치가 큰 것을 알고 탁본을 직접 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측에 유리하도록 신묘년조 기사 등 비문의 25글자를 변조했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1900년 전후에 일본 참모본부는 사코우가 최초 탁본의 글자들을 변조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광개토왕비가 있는 지역에 다시 사람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비면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다시 조작한 다음, 그렇게 제작한 탁본들을 일본에 차례로 들여왔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탁본들은 변조된 것이므로 이를 바탕으로 제시된 광개토왕비문의 글자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이진희 주장의 요지였다.

재일교포 사학자 이진희씨 (2012년 작고)

이 주장은 당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학자들은 이진희가 제기했던 참모본부의 조직적인 변조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비면에 석회가 발라졌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일본학자들은 비문에 석회가 발라진 경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또한 일본 내의 기존 탁본들 가운데 제작 과정에서 석회가 발라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가 없었고, 이를 근거로 이루어진 기존의 판독 글자들에 대한 신뢰도는 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 연구자들 역시 해방 이후의 혼란한 정국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나라 밖의 고구려 관련 자료들을 조사하는 데에 여러모로 한계를 안고 있었다. 또 얼마 전까지 전쟁을 치렀던 공산권 중국으로부터 원활한 자료 입수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탁본을 통한 정밀한 연구가 어려웠던 연구자들은 광개토왕비의 탁본과 판독 자체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내에서 이진희의 ‘석회조작설’을 통해 일본 측이 최초 제시했던 광개토왕비문의 판독안이 신뢰도가 떨어지게 되자, 한국 연구자들 역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됐다. 이에 비문의 일부 글자들, 특히 논란이 되어왔던 신묘년조의 일부 글자들을 형태가 비슷한 다른 글자로 바꿔서 판독하는 방안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한문은 그 특성상 문장 중간의 주어나 술어 한두 글자만 바뀌어도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가 있다. 이에 신묘년조의 일부 의심되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고, 그 내용을 왜가 아닌 고구려가 주도했던 상황으로 재해석하는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학계에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진희의 조작설이 제기된 배경은 광개토왕비가 있었던 현지에 대한 조사가 부족했던 것도 한 원인이었다. 즉 당시까지의 연구수준은 입수된 탁본들을 통한 연구에만 급급했을 뿐, 당시 비면의 상태나 현지에서 탁본을 제작하는 정황 등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는 1980년대까지 일본과 한국 모두 공산권 중국과 수교가 어려웠던 상황에서 현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사정에도 기인했을 것이다.

이에 현지 조사를 비롯해 석회가 도포되지 않은 탁본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요구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러한 학계의 요구에 주목하고 또 다른 방식의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능비조작은 없었다” 새롭게 제기된 반론들

중국학자인 왕지엔췬(王健群)은 광개토왕비가 있는 지안 현지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일 양국 사이에서 한창 진행되어온 광개토왕비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면서 현지에 머물며 연구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는 중국인이었기 때문에 당국의 허락만 구하면 지안 지역에서 오랫동안 조사를 진행하는데 문제가 없었다. 여기서 왕지엔췬 연구의 독특한 장점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는 현지에서 단순히 비문의 글자들을 판독하는 작업에만 열중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들을 일일이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농업 인구가 많았던 이 지역에는 오랫동안 대대로 살아왔던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왕지엔췬은 현지 주민들의 오랜 기억과 전승 등을 통해 1880년대 당시부터 이 지역에서 광개토왕비의 탁본이 이루어지는 과정 등을 철저하게 파헤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연구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광개토왕비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이 차례로 드러났으며, 급기야 이진희의 ‘조작설’이 흔들리기에 이르렀다.

왕지엔췬은 먼저 사코우가 탁본을 직접 제작하는 과정에서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이진희의 주장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보통 광개토왕비는 전문 탁본업자 두 명이 함께 작업을 하는데, 보름 이상의 기한을 요하는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나가던 군인인 사코우가 우연히 발견했던 광개토왕비에 달라붙어 직접 탁본을 제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사코우가 직접 탁본 제작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문제가 생긴다. 과연 사코우의 능력으로 신묘년조의 한문 문구를 일본측의 고대사 연구에 유리하도록 조작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1883년 사코우의 광개토왕비 탁본이 일본에 처음 입수되었을 당시에 일본 내의 역사학・한문학 등 관련 전문가들이 모두 달려들어서 판독과 역주 및 기초적인 연구 결과를 내기까지 수년 이상이 걸렸다. 그런데 과연 사코우가 현지에서 비문을 탁본하면서 신묘년조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이를 임나일본부설의 정황에 맞춰서 글자들을 조작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만약 어설프게 조작했다가 나중에 비문 내용에서 큰 오류나 모순점이 발견된다면 그땐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왕지엔췬은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지안 현지에서 광개토왕비의 탁본 작업을 전문적으로 도맡아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다. 초천부(初天富)・초균덕(初均德)이라고 하는 이들 부자(父子)는 원래 현지 주민이었는데 비의 탁본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고 오랫동안 이 작업을 본인들의 업으로 삼아왔다. 그런데 주민들의 관련 증언을 종합한 결과 비면에 석회를 발랐던 것이 바로 이 초씨 부자, 즉 중국인 전문 탁본업자들이었음이 밝혀졌던 것이다.

본래 광개토왕비의 표면은 1600여 년간의 비・바람에 의해 풍화되어 표면이 울퉁불퉁 고르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탁본 작업을 하면서 종이를 붙였다가 나중에 떼어낼 때 쉽게 찢어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초씨 부자가 비면을 매끄럽고 편평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비면 일부에 석회를 발라서 굳힌 뒤에 탁본 작업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탁본작업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비면 일부에 석회를 발랐을 뿐, 글자를 조작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왕지엔췬의 현지조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1980년대에 이루어진 일본학계의 탁본 조사과정에서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제작한 탁본들이 차례로 확인되었다. ‘원석탁본’이라고도 부르는 이 탁본들은 석회를 바르기 이전의 비면 글자들, 특히 논란이 되어 왔던 신묘년조의 글자들이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를 밝혀줄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정밀한 판독 작업이 다시 진행되었다.

새롭게 발견된 ‘원석탁본’의 글자들, 그리고 일본측이 기존에 석회탁본 등을 근거로 제시해왔던 글자들은 서로 큰 차이가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양자는 서로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일본측이 신묘년조를 의도적으로 조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학계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제3자인 중국인 학자에 의해 일본측의 탁본 입수과정이 소상하게 밝혀졌으며, 원석탁본을 통해 기존의 판독안이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이진희의 ‘석회조작설’은 힘을 잃었고, 일본측이 최초 제시했던 신묘년조의 판독안과 해석이 다시 주목받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논쟁은 끝난 것일까. 이후 학계에서는 마땅히 4세기 후반 당시 왜가 백제․가야․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광개토왕비문의 기록, 즉 고구려인의 진술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만 같다. 그런데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비문 연구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또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도대체 한・중・일 연구자들의 인식에 어떤 문제가 남아있었던 것일까.

 

'적국' 백제를 '속국'이라 거짓말한 고구려인의 의도

다시 광개토왕비로 돌아와 보자. 본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석에 쓰인 문자들 속에는 인간의 다양한 욕망이 숨어있다. 무덤 옆에 박혀있는 비석은 죽은 자의 유지를 받든 주변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이다. 죽은 후에 자손과 주변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봐주었으면 하는 바람들, 바로 그러한 인간의 욕망이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무덤 곁을 맴돈다. 이 때문에 비석에 쓰여 있는 글들은 죽은 이의 생전 모습을 기록한 글이지만, 때로는 실제 사실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광개토왕비는 어떨까. 우리의 위대한 조상인 고구려 왕실에서 작성했을테니 마땅히 정확하고 진실된 기억만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보아야 할까.

1918년 8월에 일본 구로이타 가쓰미가 현지조사 과정에서 발굴한 광개토왕비의 하부(받침돌) 모습.

재일교포 사학자인 이성시(와세다대)는 논란이 되는 신묘년조의 해석을 검토하던 중 내용상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일본측 해석)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바로 위 밑줄 친 부분 즉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는 기록이다. 신라는 둘째 치고 백제가 4세기 당시에 고구려에 복속하여 조공을 바쳐왔다는 언급은 무언가 미심쩍은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등이 재위했던 백제의 최전성기가 아닌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신묘년(391)의 20년 전 상황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371년 겨울 - 근초고왕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377년 겨울 10월 – 백제 근구수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다.
390년 9월 - 백제 진사왕이 달솔 진가모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쳤다. 도곤성을 함락시키고 2백여 명을 사로잡았다.
391년<신묘년> - 고구려 광개토왕이 즉위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백제가 신묘년(391)의 불과 20여 년 전인 370년대부터 고구려 영역을 군사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심지어 371년에는 고구려 고국원왕이 평양성으로 쳐들어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그 이후에도 백제는 광개토왕이 즉위하기 직전인 390년까지 집요하게 고구려의 남방을 공격했으며 고구려는 이를 막아내기에 급급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만 종합해도 백제는 고구려에 복종하는 ‘속민’이 아니라 고구려와 치열하게 싸우며 대립하고 있었던 적국(敵國)이라는 것이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는 비문 속의 진술, 즉 고구려인들의 발언을 우리가 곧이곧대로 신뢰해야할까. 논란이 되어왔던 신묘년조는 바로 이 의심스러운 진술을 전제로 하여 뒤에 이어지는 문장이다.

와세다대 역사학과 이성시 교수. 그는 광개토왕비에 과장이 있음을 밝혀내고 비문에서 당시 고구려인의 욕망을 짚어냈다.

이성시는 비문 내용, 즉 고구려인들의 발언이 사실인지 여부를 심각하게 의심하기 시작했다. 즉 최초 일본의 신묘년조 해석을 그대로 인정하되 고구려인들에 의해 작성될 당시에 이미 내용 자체가 과장 혹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들고 나온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비문에 정말 거짓말을 적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왜 거짓말을 비문에 적었을까.

보통 우리가 아는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조선시대에 작성된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은 중립을 표방하는 사관(史官)에 의해 집필된 정사(正史)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부에서도 일정한 왜곡은 이루어지겠지만 적어도 원칙적으로 대외적인 사건들에 대한 기록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 기술되어야 한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는 이러한 정사의 기록이 아니다. 장수왕이 자기 부왕이신 광개토왕의 업적을 대외에 과시하고자 작성했던 훈적비(勳績碑)인 것이다. 또한 비문은 고구려 왕가의 입장에서 과거에 일으킨 전쟁이 정당한 명분하에 치러졌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음을 국내성의 귀족과 주민에게 널리 알리는 정치 선전물이기도 했다.

 

'강해야만 했던 악당' 왜의 능력을 부풀리다

그렇다면 신묘년조를 다시 살펴보자. 그 앞부분에서는 “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고구려의) 속민으로서 조공해왔다”는 고구려 중심의 상하질서를 먼저 제시하였다. 이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당시 고대의 국제관계에서 지금처럼 국가들 사이의 대등한 관계란 없었다. 중국왕조는 주변국들에 대해 뚜렷한 군사적 우위를 지키지 못하던 시기에도 자국 황제를 중심으로 한 천하질서 하에 주변 세계를 인식하였고, 조공-책봉이라는 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역시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에 대해 고구려 중심의 상하관계에 포섭되어 있는 복속국으로서 인식하고자 했다. 즉 백제・신라는 광개토왕비문 내에서 설정된 고구려의 천하 내에 들어와 있었던 ‘속민’이었던 것이다(물론 실질적인 관계가 그러했는지 여부는 별개 문제이다).

바로 이러한 거짓말에 이어서 고구려인들은 “그런데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 □□, 신라를 파(破)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왜는 고구려인들이 생각했던 천하질서 내에 포함되지 않는, 바다 건너의 외부세력이었다. 바로 이 왜가 쳐들어와서 마땅히 고구려의 아래에 있어야 할 백제・신라를 공격해 자기들의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전하였다. 즉 비문 내에서 왜라는 존재는 고구려 중심의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도(無道)한 악당’으로서 그려졌던 것이다.

비문에서는 이러한 대외적 위기상황에서 광개토왕이 등장해 놀라운 활약을 펼친다. 즉 왕이 군대를 파견하거나 혹은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왜군을 수차례 물리쳤고, 마침내 원래의 고구려 중심 국제질서를 회복하였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고구려인들의 두 번째 거짓말이 등장한다. 바로 광개토왕을 대적하는 악당인 ‘왜’라는 세력을 비문 내에서 크게 과장했던 것이다.

비문에서는 신묘년조 이외에도 왜의 역할이 크게 부각된 기사들이 여럿 있다.

영락 9년(399년)에 (중략) 신라왕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국경(國境)에 가득 차서 성지(城池)를 부수고 저를 왜의 백성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영락 10년(400년)에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고구려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들이 퇴각하였다.
영락 14년(404년)에 왜가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방계(帶方界)에 침입하였다. (중략) 광개토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영락 9년(399)과 10년(400)에는 왜가 신라를 침공하여 그 군대가 신라의 국경에 가득 찼으며, 이 때문에 신라왕이 고구려에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영락 14년(404)에는 왜가 지금의 황해도 지역에 해당하는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해왔다고 전한다. 학계 연구자들은 위 기사들에서 각각 신라와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주체는 사실 왜가 아닌 백제(혹은 가야)였을 것이라고 본다. 즉 400년 백제(혹은 가야)의 신라 침입과 404년 백제군의 황해도 침공을 광개토왕비문 내에서는 마치 왜가 주도했던 것처럼 기록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전투에서 왜군이 백제군과 같이 참전했을 가능성은 있다. 이 당시 왜는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은 가운데 용병을 자주 보내던 상황이었다. 이때 왜군은 백제군 예하에 종속되어 활동했지만, 비문 속에서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상 하에 ‘속민’인 백제를 지우고 대신 ‘강력한’ 외부세력인 왜가 전투를 주도했던 것처럼 서술했던 것이다.

 

'정치선전물' 광개토왕비에서 끄집어낸 고구려인의 ‘욕망’

과연 고구려 왕실에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사실 신문과 인터넷이 활성화된 지금도 전쟁에 대한 정보들은 객관적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사례들이 많다. 북한은 지금도 여전히 한국전쟁을 미국과 남한이 먼저 쳐들어온 것으로 주장하고 가르친다. 5세기 초반 당시 고구려 왕실과 조정 사람들은 돌아가신 광개토왕의 무덤 근처에 왕의 업적을 과시하는 비문을 작성하고자 했다. 이들은 그 업적을 되도록 화려하게 서술하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상(像)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비문 내에 극적(劇的)으로 재구성해내고자 했다.

고구려 왕실의 주도하에 비문에 기재된 과거 전쟁의 기억, 즉 도성의 귀족과 주민들에게 고구려 왕가가 내세우고 싶었던 ‘전쟁의 추억’은 이토록 정치적으로 짜여진 각본 하에 서술되었다. 그 과정에서 왜의 실체를 비롯한 몇몇 관련 사건들이 비문 내에서 일부 왜곡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왜가 비문의 어느 문구에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조금씩 갈린다. 다만 이제 어느 연구자도 광개토왕비문이 진실만을 전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비문에서 드러난 고구려인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과 자기 ‘욕망’이며, 여기에 토대를 둔 정치적 발언 자체를 사실로 보는 것은 순진한 발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에 덧붙여 이성시는 19세기 말 이래로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을 두고 벌어진 한일 양국 연구자들의 논쟁이 사실상 역사적 사실 자체에 대한 탐구였다기보다는 근대 일본의 ‘욕망’과 이를 부정하려는 근대 한국의 ‘욕망’이 서로 대립해온 과정이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1600여 년 전 비문 작성의 당사자였던 고구려인들의 ‘욕망’을 끄집어내었던 것이다.

현재 광개토왕비의 연구는 이처럼 근대 한일 양국의 정치․외교적 가치관을 역사에 투영해왔던 과거를 반성하는 가운데, 실제 비문을 작성했던 고대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어떤 형태였으며, 그 이면에 감춰진 객관적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를 추적하는 단계에 와있다. 이러한 수준의 연구를 통해서 고대 한반도 남부를 왜가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잘못된 주장이었음은 양국 연구자들 사이에 상당한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지금 현재의 광개토왕비에 대한 연구 현황은 이처럼 과거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비롯한 식민사관의 논리에 대한 엄정한 비판을 통해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또 다른 왜곡'은 안돼

근대 일본이 광개토왕비를 과도하게 자국 중심의 역사의식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해왔던 전력은 현재 연구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사실 우리 내부에서도 지난 100여 년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빚어졌던 과도한 고대사 해석이 없지 않았다. 정인보, 신채호 등이 주도했던 민족주의 역사학의 광개토왕비 연구는 근대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한다는 정당한 목적이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내부의 근대적 가치관을 고대사에 투영하여 이해했던 오류도 범했다. 현재의 역사학 연구는 이러한 과거의 연구경향까지도 반성하고 극복하는 가운데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역사학의 연구 목적이 우리나라의 현재 정치․외교적 이익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어차피 고대사는 사료가 적고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으니 우리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은 지금 현재의 가치관이나 당장의 정치외교적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만들어내는 분야가 아니다. 역사학은 ‘현재’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할 ‘이상’을 제시하는 학문이다.

근대 광개토왕비의 연구사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과거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이 무엇을 위해 복무해왔는지를 떠올려보자. 역사 연구가 현실의 이해관계에 무조건 부합해야 한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은 우리 사회 일각의 엄연한 ‘퇴행적’ 현상일 뿐, 결코 ‘진보적’ 가치와 동일시될 수 없다. 19세기 말 이래로 광개토왕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져왔던 한・중・일간의 역사전쟁을 다시금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안정준 팩트체커는 경희대 연구교수며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안정준   kyuri21@naver.com  최근글보기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다. 고구려사 전공으로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구려 낙랑ㆍ대방군 고지 지배 연구', '6세기 고구려의 북위말 유이민 수용과 유인'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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