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에서 하나, 다시 적이 된 '91년 단일팀'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1.3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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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의 역사 팩트체크] 남북 스포츠교류와 단일팀 역사 ②

<1부에서 계속>

1991년 2월 12일 탁구와 청소년축구의 남북단일팀 합의 선언이 나왔다. 그 동안 쟁점이 돼 왔던 남북 교차 훈련 일정 문제는 북한쪽 주장대로 일본 전지훈련으로 대체하기로 했고 공동단장을 고집하던 북한이 한 수 접어 탁구팀 단장은 북한이, 청소년축구팀 단장은 남한이 맡기로 하면서 합의가 이뤄졌다. 단일팀의 선수단기는 하얀 바탕의 하늘색 한반도 지도를 그려 넣은 것으로, 단가는 아리랑으로 확정됐다. 수십 년 동안 뜸은 들였으나 한 번도 뚜껑을 열지 못했던 밥솥이 열렸다. 당장 두 달 뒤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출전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남북이 손발을 맞추고 호흡을 골라야 했다.

1991년 사상 첫 탁구ㆍ청소년축구 남북단일팀 합의

남북 공히 세계 정상급 전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기대 수위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탁구협회는 총 7개 종목에서 남북단일팀이 3개 이상의 금메달을 따내 종합우승을 차지하리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었다. 남자 탁구의 최강 스웨덴과 중국이 버티고 있었고 여자 탁구에 관한 한 중국은 세계 최강이라는 수식어도 모자라는 우주 최강의 만리장성이었다. 그나마 개인전에서는 간혹 중국을 꺾는 개가를 올린 적도 있었지만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일에 비견할 만 했다. 

그때까지 중국은 여자 탁구 단체전 8연패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1973년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이에리사라는 스타를 내세워 한국 대표팀이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은 적도 있지만 그 이후 단 한 번도 중국은 우승컵을 놓친 적이 없었다. 이 부동의 1등팀을 2등과 3등이 뭉쳐 맞서 꺾어 보겠다는 것이었다. 남자탁구의 경우는 한결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남한의 주전 유남규와 북한의 핵심 역량 김성희는 다른 대회에서 만나 호형호제를 할 만큼 친숙한 사이였고 김성희 역시 “남규와 함께라면” 우승도 가능하다며 기대치를 높였다.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석한 남북선수들. 왼쪽부터 현정화, 유남규, 김성희, 리분희.

바깥의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사사건건 대립했던 조총련과 거류민단이 공동응원을 결의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민단 부인회와 조총련 여성 동맹 회원들은 함께 김장을 담가 ‘통일 김치’를 만들어 보냈다. 선수단에는 재일교포 학생들의 편지가 빗발쳤다. 도쿄 조선인학교 초급부 2학년 아홉 살 김경혜 양이 또박또박 써서 보낸 편지는 사상 최초로 단일팀을 경험한 7천만 남북 국민들과 해외교포들의 여망 그대로였다. “코리아 탁구 선수 오빠 언니들. 한마음이 된 우리 팀은 제일 강합니다. 나는 힘껏 응원하겠습니다.”

남자탁구 단체전에서 남자탁구 단일팀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스웨덴의 벽을 넘지 못하고 8강전에서 좌절했다. 그러나 여자 탁구팀은 쾌속 순항을 계속했다. ‘분희 언니’라는 말에 ‘정화 동무’로 맞받는 어색함 속에서도 현정화, 홍차옥, 리분희, 유순복으로 이뤄진 남북 단일팀은 승승장구하면서 결승에 진출했다. 북한 선수들이 부담을 느끼던 유럽 선수들을 무너뜨린 것은 현정화였고, 간염에 걸린 몸을 무릅쓰고 분전하여 한국 선수들을 감동시킨 것은 리분희였다. 현정화 또한 리분희를 극진히 돌보고 특식을 사 나르면서 리분희의 마음을 열었다. 마침내 4월 29일 운명의 결승전 날이 왔다.

여자탁구단일팀 세계최강 중국 꺽고 우승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중국이었다. 그 선봉에는 탁구의 마녀 덩야핑이 서 있었다. 일찍이 스포츠를 즐겼던 한국 사람들에게는 별로 떠올리기 싫은 몇몇 이름들이 있다. 이를테면 말레이시아 축구팀 골키퍼 아루무감(원숭이 같은 긴 팔로 한국 팀의 슛을 악착같이 막아내던), 중국의 여자 농구 헐크 천웨팡(진월방) 등등, 그 대열에서도 지긋지긋하게 빛나는 이름 덩야핑은 한국 선수들을 매번 좌절시켰던 ‘마녀’였고 이 마녀는 빗자루 대신 라켓을 타고 다니며 이후 세계대회 우승만 18번을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운 사람이었다. 영화 <코리아>에서는 코리아 선수들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시비를 거는 중국의 ‘덩야링’ 선수가 나오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 캐릭터의 원형이 바로 덩야핑이었다. 한국 여자 탁구의 전설 현정화에게도 그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절 은퇴하게 만든 게 덩야핑이죠. 제겐 그냥 벽이었거든요. 이길 수가 없었어요.” (동아일보 2012년 5월 7일자)

그런데 이 ‘절세마녀’가 맥없이 거꾸러진다. 마녀를 물리친 것은 남한의 에이스 현정화도 아니고 북한의 고참 리분희도 아닌 홍안의 함경도 처녀 유순복이었다. 현정화에 따르면 “약 먹은 것처럼 공을 쳤다. 한 포인트를 따내곤 한 40~50㎝씩 점프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약 먹었다는 표현이 틀리지도 않은 것이 그 후로 유순복이 언감생심 덩야핑을 물리친 적은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약’을 먹었을 것이다. 사상 최초로 재일본민단과 총련이 한데 모여 환영 만찬을 베풀고, 경기장에서 한 깃발 아래에서 백발성성한 1세부터 우리말 서툰 3세들까지 코리아를 부르짖는 그 모든 분위기가 약이 아니면 무엇이었으랴.

현정화도 질 수 없다는 듯 중국 국내 선발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신예 가오쥔을 눌렀다. 게임 전적 2 대 0. 한 번만 더 이기면 우승이 눈앞에 있었지만 역시 중국은 중국이었다. 현정화·리분희 두 에이스가 나선 복식에서 졌고 현정화마저 중국의 덩야핑에게 덜미를 잡혔다. 다시 유순복이었다. 작달막하고 동그란, 현정화처럼 매섭지도 않고 리분희처럼 노련해 보이지도 않는 뭉툭한 처녀는 세계 랭킹 2위 가오쥔을 만났다.

운명은 2세트에서 갈렸다. 유순복은 천리마의 기세로 백핸드를 휘두르고 속도전의 스피드로 스매시를 해 1세트를 따냈고, 2세트를 맞았는데 중국의 가오쥔은 2세트 들어서 막강한 ‘가오’를 잡기 시작했다. 유순복은 12 대 17까지 몰렸다. 가오쥔의 승리까지 4점을 남겨 둔 상황에서 갑자기 유순복은 또 약을 먹은 듯했다. 한 점 한 점 유순복은 거짓말처럼 따라붙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가 동점을 이뤘던 순간을 나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나 역시 ‘40~50센티미터의 점프’를 하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던 것이다. 급기야 가오쥔을 잡아버린 순간 유순복에 빙의라도 된 양 마루에 드러누워 버렸다. 눈물이 났다.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괴성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에 실려 토해지는 게 느껴졌다.

 

재일동포들은 하염없이 울면서 만세를 불렀다. 젊은이고 늙은이고 스탠드에 일어서서 무엇 만세인지 모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남북이 파견한 정보요원들, 그러니까 보위부와 안기부의 칼날 같은 기관원들도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처음으로 이룬 단일팀이 중국을 꺾고 세계를 제패하다니. 참으로 상서로운 징조로 보였고, 문익환 목사님의 시구절 “통일은 됐어!”가 귀에 아른거렸다. 단일팀의 국가(노래)로 이미 30년 전에 결정된 바 있으나 처음으로 울려 퍼지는 ‘아리랑’을 따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분단조국 47년. 드디어 그 철의 세월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거뜬히 넘은 코리아의 젊은 여성들의 손에 내동댕이쳐진 듯 보였다. 흰색 바탕의 하늘색 단일기는 가을 하늘보다도 높은 곳에서 청명하게 빛났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기억해 둘 사람이 있다. 단일팀 대표 선수였으되 평생에 못 잊을 감동을 함께 했으되 잊지 못할 아쉬움을 간직해야 했던 선수. 홍차옥이다. 후일 현정화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북한 측에서 선수 구성도 무조건 반반을 요구했어요. 단식에 나서는 이분희 선수가 컨디션이 안 좋아도 유순복이 나가면 나갔지, 홍차옥이 나갈 수가 없었어요. 복식은 남북이 하나 된 의미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이분희 선수와 제가 뛰어야 했고요. 결국 차옥이는 대회를 못 뛴 게 평생의 아쉬움으로 남았죠. 그 뒤로 우리나라가 세계선수권 우승을 못했잖아요.” (위 동아일보 인터뷰 중) 아무리 단일팀이라 해도 남북의 분단 구도는 강렬한 경쟁심과 견제 심리가 강력하게 남아 있었다. 서로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 했고 손해 본다 싶은 느낌이 들면 철저할 만큼 예민했다. 단일기는 1991년 6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또 한 번 휘날릴 예정이었지만 축구는 탁구와는 또 경우가 달랐다.

1991년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남북단일팀 선수들. 왼쪽부터 리분희, 유순복, 이에리사, 홍차옥, 현정화

청소년축구 단일팀 시작부터 삐그덕

탁구는 1대1 또는 2대2로 맞붙는 경기고 워낙 남북이 세계 상위권에 들어가는지라 대회마다 부딪칠 일도 많은만큼 그만큼 서로 안면을 익히고 정을 나눌 기회도 잦았지만 축구는 그렇지 못했다. 산전수전 겪은 국가대표도 아니고 스물 안짝의 청소년대표팀이라면 국제 무대 자체가 낯설 이들이 대부분 아닌가. 선수 선발에서부터 합동 훈련 과정에 이르기까지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행한 합동 훈련이라고 해도 남북 선수들의 숙소는 철저히 분리돼 있었다. 평양에서 식사 도중 남한 선수가 김일성 초상화를 보고 “김일성이다”라고 말하자 북한 선수가 포크를 들이대고 “가만 두지 않겠다.”고 덤빈 적도 있었다. (서동원 선수 인터뷰, 2018년 1월 18일 동아일보) 아시아 예선을 통과한 한국팀의 경우 함께 동고동락한 선수 가운데 절반은 탈락해야 하는 아픔을 곱씹어야 하는 판에 더 속이 뒤집히는 일도 있었다. 

MBC 라이프 제작 프로그램 <히스토리 후>에서 장충식 당시 단장은 이런 회고를 토로하고 있다. 남북 코치진이 언성을 높이기에 영문을 알아보니 북한측이 공격 포지션을 가져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당의 지침에 따라 골을 넣을 수 있는 공격수 위치에 북한 선수들을 우선 배치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장충식 단장은 남한 코치에게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지시했다. 단일팀 자체가 깨질 위기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프로그램에서 서동원, 조진호 등 당시 한국 선수들은 북한 선수들이 연습이나 실전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들에게 공을 주지 않거나 따돌린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삐거덕거리면서도 단일팀으로 일로매진한 ‘코리아’팀의 대진표가 나왔을 때 많은 이들이 탄식했다. 애써 만든 단일팀이 예선 탈락으로 끝나겠구나. 그도 그럴 것이 코리아는 남미의 양대 축구 강호 아르헨티나, 루이스 피구(2002년 월드컵에서 활약한 바로 그 사람)가 이끄는 주최국 포르투갈, 그리고 아일랜드와 한 조였다. 만만하기는커녕 해볼 만하다고 표현할 상대조차 꼽기 어려웠다. 첫 경기는 아르헨티나전이었다. 승리를 기원했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손발을 맞춘 지도 얼마 안 되는 남과 북의 청소년들에게 감히 아르헨티나를 어떻게 해보라는 요구를 하기엔 스스로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실망하지 않을 만큼, 그 패배의 원인이 ‘단일팀’으로 돌려지지 않을 정도의 경기를 펼치기만을 기대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도 단일팀을 얕잡아보는 기운이 역력했다. 워밍업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에 투쟁심 강한(?) 북한 선수들이 발끈했다. “저 간나들 보라. 본때를 보이자.” 하지만 수비 라인을 맡았던 남한 선수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주전 수비수 강철의 회고. “저는 수비수였기 때문에 동료들한테 말은 안 했지만 ‘5~6골 먹을 수도 있다. 최소실점을 하자. 1~2골은 괜찮은데' 5~6골은 망신이다’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몸을 던지고.”(KFA 리포트 2010년 1월호)

예상외의 선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격전 끝에 0 대 0을 이어가던 중, 비겨도 이긴 거라며 밤새워 응원하던 한국 사람들이 상기된 어조로 얘기하던 순간, 믿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후반 43분 종료 직전이었다. 아르헨티나 문전에서 흘러나온 공을 가로챈 북한 출신의 조인철이 미사일 같은 슛을 쏘았고 통쾌하게 네트에 꽂혀 버린 것이다. 그때껏 서먹서먹했던 남과 북 선수들이 잔디 위에서 한데 엉켰다. 경기 후 선수들 전원이 다리에 쥐가 나고 근육 경련을 일으킬 만큼 악으로 깡으로 뛴 결과였다. 경기 후 아르헨티나 감독의 코멘트는 그 승리의 의미를 제대로 짚었다. “코리아의 조직력에 졌다.” 조직력. 조직력을 제대로 배양할 틈도 없었고 상대방에게는 공도 제대로 주지 않으려 했던 단일팀의 조직력. 그 코리아팀의 조직력이 아르헨티나를 제압했다.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참석한 남북단일팀 선수들 ⓒKFA

2차전 상대는 아일랜드였다. 역시 잘 싸웠지만 코리아는 후반전에 한 골을 먹어 패색이 짙었다. 3차전 상대로 주최국 포르투갈이 버티고 있었기에 아일랜드에 패배한다면 예선 탈락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 후반전 남한 출신의 조진호가 결정적인 찬스를 놓쳤다. 조진호는 일어나지 못한 채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해설위원 신문선도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땅을 치는 저 모습이 7천만 겨레의 심정입니다.”

아일랜드 상대 종료직전 무승부... 단일팀 8강행 기적

종료 1분을 남기고 한 ‘코리안’이 공을 몰고 사이드라인을 타고 돌진했다. 놀라운 스피드였다. 그의 이름은 북한 출신의 최영선. 강철의 회고에 따르면 김일성 이름을 함부로(?) 부른 남한 선수의 멱살을 잡았던 장본인이었다. 지쳐 버린 아일랜드 선수들을 따돌리며 오른쪽을 치고 들어간 최영선은 기가 막힌 크로스를 올렸고 역시 북한 출신의 최철이 머리를 갖다 댔다. 골이었다. 기적 같은 동점골이었다. 그라운드에서 남과 북의 코리안들은 통일이 돼 버렸다. 누가 남인지 북인지 가리지 않고 한 덩이가 되어 울고 웃고 환호했다. 아마 그 시간 한반도 남과 북의 코리안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쟁 이후 남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에게 그렇게 열광적으로 환호한 것은 처음이었으리라. 강철, 최철, 조인철 등 유난히 철자 돌림이 많았던 남북의 청소년들은 그야말로 ‘의지의 한국인’이며 ‘끈기의 조선인’으로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적을 일궈 냈다.

예선을 통과한 코리아 팀은 운 나쁘게도 세계 최강 브라질을 만난다. 스포츠신문들은 한번 해볼 만하다며 요란한 나팔을 불었고 국민들도 부푼 마음으로 또 하나의 기적을 기다렸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현실의 냉엄함을 일깨우기라도 하듯 브라질은 코리아 팀을 맹폭했고 5 대 1이라는 스코어가 단일팀의 최후를 장식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약간의 뒷 얘기가 있다. 베스트 일레븐을 공평하게(?) 남 6, 북 5명, 남 5명 북 6명으로 출전시키고 있었는데 북한측에서 고위 관계자가 왔다는 이유로 북한측 공격수를 더 투입하자고 했던 것이다. (한국일보 2018년 1월 19일자) 생경한 멤버 구성은 조직력의 약화를 불러왔고 그것이 패인의 일부로 작용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의 고위급이라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 장성택이 아닐까 한다. 북한의 관계자들은 남한 선수들에게 북한 선수들이 무슨 물건이라도 받지 않았는지 짐을 뒤지곤 했는데 거기에 제동을 건 이가 장성택이었기 때문이다. “고생하는 선수들 격려는 못할망정 이게 뭐하는 짓이냐.”(위 한국일보 기사)

2017 단일팀 다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그러나 남북 단일팀의 추억과 감동은 딱 91년의 봄과 초여름에 국한된 채 멈춰 버렸다. 털도 생생하고 상아도 찬연히 빛나지만 얼음 속에 갇힌 채 급속 냉동돼 버린 매머드 같은 신세라고나 할까.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를 비롯한 여러 국제 대회에도 단일팀을 해 보겠노라고 포부는 드높았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로부터 3년도 못가서 남북은 불바다와 피바다의 협박을 교환하며 얼어붙었고 미국은 북한 핵을 빌미로 실제로 북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미국인들에 대한 소개령까지 내렸다.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적대와 평화의 핑퐁게임, 무력충돌과 정상회담의 냉온탕을 오가는 세월 속에서 단일팀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리고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역사 속에 묻혀졌다. 고락을 같이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동료들과 아프게 헤어지고 그 뒤로는 만나지도 못한 선수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지바의 영웅 현정화 감독의 말은 그래서 서럽다.

“정치적인 이벤트를 할 바에야 차라리 단일팀 같은 거 하지 말고 각자 국가를 인정하고 사는 게 낫다는 마음이 굳혀졌다.”(서울신문, 2011년 4월 25일)

그러고 보면 1991년 분단 조국 47년은 그래도 남과 북이 ‘정치적 이벤트’라도 도출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즉 남도 북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고 북도 남에 대해서 당당함이 남아 있었던 즈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는 뜻이다. 이후 북한은 ‘고난의 행군’에 진입했고 남한은 외형적 성장을 계속했다. 남북의 격차는 갈수록 벌어져 북한은 단일팀 따위를 고려할 상황이 아니게 됐고 남한은 단일팀 따위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남북 청소년 단일팀 북한 측 코치였던 문기남 코치가 2003년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한 사실, 그리고 북한 선수들 짐을 뒤지던 ‘일꾼’들에게 뭐하는 짓이냐고 일갈하던 장성택이 조카에게 전격 처형당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 서글픈 오늘의 단면을 냉엄하게 비춘다. 

여자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1월 29일 첫 합동훈련을 시작했다. ⓒ 대한체육회

이제 1991년의 감격으로부터 27년이 흘러 다시 한 번 남북 단일팀이 출범했다. 개인적으로는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에 반대 입장이었다. 일단 준비 과정이 너무 없었고 합의도 벼락치기였으며 1991년 때처럼 선수들이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단일팀의 명분에 휘말렸고 1991년 단일팀의 감격이 허무하게 흐지부지되거나 심지어 배신당하기까지 했던 경험이 뼈아팠기 때문이었다. 리바이벌은 언제나 오리지널에 미치지 못할진대 감동의 크기는 줄고 허망함의 무게가 더한다면 그 감당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근심이 컸던 탓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고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또 한 번 한반도기를 내걸고 열전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부디 북한과 미국발 한파로 얼어붙은 동북아시아 정세를 녹일 수 있기를, 그들의 ‘조직력’이 남과 북의 지속적이고 항구적인 평화 확립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 Again 1991은 기꺼이 부르짖되 ‘Again 1991 이후’가 도래하지 않기를 충심으로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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