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언론이 남북단일팀을 한목소리로 우려한 이유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1.30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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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부 정치권과 보수언론이 요즘처럼 일본 언론의 반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심지어 그 내용을 주장의 근거로까지 삼았던 적이 있었나 싶다.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내용의 경우, 결국 전 정권의 책임 문제로 귀결되니 방어본능이 발동했을 수 있다. 문제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와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까지 별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평창올림픽 남북단일팀 소식에 부정적 반응을 쏟아낸 일본 언론.

일본 언론, 평창올림픽 남북대화에 우려 '합창'

현재 일본 언론의 분위기는 찬반양론이 존재하는 한국의 그것과 다르다. 정도의 차이만 존재할 뿐 ‘비판적 소수의견’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상파 방송을 소유한 5대 주요 일간지 보도의 경우, 상황이 심각하다. 일본유일의 진보언론인 <신문 아카하타> 정도가 “평화의 축제로 성공을 거두어, 지역과 세계 평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는 축제가 되길 바란다”는 시이 가즈오 일본공산당 위원장(9선)의 국회 기자회견 발언을 전했을 뿐이다.

평소 그 '논조의 선명성’이 한국에도 익히 알려진 <산케이신문>이나 <요미우리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평창올림픽을 둘러싼 남북대화, 유화지상주의는 위험하다”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린 1월 19일자 <마이니치신문>을 보자. 소위 ‘중도 성향’으로 분류되는 이 신문의 글은 “북한의 비위를 맞추는 것 같은 한국의 자세에 위화감을 느낀다”는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는 잠시 “북한의 올림픽 참가 자체는 나쁜 게 아니”라며 합리적 태도를 취하는 척 하다 이내 “한국 내에서 격한 의견대립을 초래할”것 이라는 ‘남남갈등 예언’과 “남북화합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 같은 현재의 자세에 우려를 금할 수 없다”는 코멘트로 마무리된다.

‘진보 성향’으로 알려진 <아사히신문>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마이니치신문>보다 8일 먼저 내놓은 '남북한 대화, 냉정히 비핵화 유도를' 사설은 “개막이 1개월 후로 다가온 평화의 제전에 대한 (북한의) 참가 표명은 일단 낭보”라고 운을 떼면서도 결국 “문 정권은 내향적인 생각으로 졸속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남북화해 자체는 바람직하나, 분위기에 휩쓸려 무원칙한 대북지원으로 치달으면 국제제재 효과가 손상될 것”이라며 ‘충심’과 ‘주제넘음’ 사이를 외줄 타기한다. 

이상의 내용에서 일단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남북한의 긴장완화보다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는 한미일 협력을 우선시하는 입장이다. 국민 대다수의 정서에는 반할지 모르나 한국사회에서도 분명 존재해 온 목소리이며, 그 해악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어느 정도 공유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장 위협적’이지는 않다. 문제는 글의 행간에서 일본의 동북아 패권다툼에 종종 악용되는 안보론의 흔적이 배어나온다는 것이다. 그 시작점은 평화안보와 전혀 다른 선상에 놓여있었다.

지난 19일 강경화 한국 외교부 장관과 예방하고 악수는 아베 일본 총리(오른쪽)

침략전쟁에 부역한 일본 5대 일간지 전력 

일본의 5대 주요 일간지 중 특히 <요미우리신문>과 <아사히신문>은,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을 예찬하며 “성전(聖戦)에의 국민동원”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전력이 있다. 극단적으로 편향된 논조의 기사는 국민여론의 호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을 맞은 1945년, 이들은 전체주의 체제에 부역한 과오에 대해 어떤 진지한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생명력을 이어갔다.

여기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 쇼리키 마츠타로. 경찰관료 출신으로 <요미우리신문>을 인수한 그는, 1940년 9월 침략전쟁을 위한 기구인 대정익찬회의 총무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12월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되었지만 고작 2년 뒤 석방되어 니혼TV 사장이자 <요미우리신문> 사주로 미디어권력의 정점에 섰다. 이후 아베 신조의 외조부이자 정치적 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가 집권하자 국무대신(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아사히신문>은 패전 직후인 1945년 11월 7일자에 게재한 '국민과 함께 서다'라는 선언을 통해, 경영진의 사직과 국민에 대한 사죄를 표명했다. 하지만 무라야마 나가타카 사장은 6년만인 1951년 8월 사주로 복귀한다. 무라야마의 맏형인 오카베 나가카게(무라야마 나가타카의 성은 결혼 이후 처가의 양자가 되면서 바뀐 것이다)는 A급 전범으로 사형에 처해진 도조 히데키가 총리이던 시절, 문부성 대신으로 학도동원ㆍ학도근로동원 등을 실시했다. 임원진의 핵심 인물인 오가타 다케토라(부사장)는 <요미우리신문>의 쇼리키 이상의 행보를 보였다. 예비역 육군대장 출신으로 조선총독을 지낸 고이소 구니아키가 총리로 취임한 1944년 7월 국무대신에 기용된 오가타는, 종전 이후에도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부총리를 지냈다.

태평양전쟁 직전, 자민당의 전신인 민정당과 정우회, 사민당의 전신인 사회민중당 등,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일본의 모든 정당은 자발적으로 당을 해산하고 대정익찬회에 합류, 국가총동원체제에 부역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패전 후 모두 당명을 개정한다. ‘전쟁 추진 세력’으로서 국민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침략전쟁의 나팔수 노릇을 했던 일본 언론 (<아사히신문>,<요미우리신문>,<마이니치신문>)은 간판조차 바꿔달지 않았다. 일찍이 가쓰라 케이이치 전 도쿄대학 신문연구소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권력과 일체화하는 경향을 강하게 보이며 자국의 역사적 책임의 이행보다 당면 이해관계의 충족을 우선하는 행동양식”으로 일관해온 것이다.

1월 24일 평창올림픽 참가를 발표하는 아베신조 일본총리를 보도한 NHK 방송화면. 미국의 요청과 대북압박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식민지배 반성없는 일본정부에 굴종하는 언론

굴종의 열매는 달았다. <요미우리신문>와 <산케이신문> 그리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모두 과거 대장성(지금의 재무성) 소유이던 부지에 터를 잡았다. <마이니치신문> 사옥의 일부는 왕궁 경찰 기숙사가 있던 국유지를 차지했다. 심지어 <아사히신문>조차 츠키지의 옛 해상보안청 자리에 사옥이 있다. 5대 주요 일간지가 모두 정부로부터 “언론의 보루”를 제공받은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애초에 그들이 정부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정부의 수반은 6년째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무반성’이 ‘정치적 소신’인 아베 신조 아닌가.

헤겔은 어떤 사람이 선인인지 악인인지 판단하려면 그가 살아온 삶의 과정 전체를 보아야한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라면. 정치적ㆍ개인적 원인에 따른 갈등 속에서 자칫 주장의 진정성마저 퇴색시킬 수 있는 근거를 들이대기 전에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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