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서 성고문과 검찰 성추행, 30년간 무엇이 변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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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서 성고문과 검찰 성추행, 30년간 무엇이 변했나
  • 김형민
  • 승인 2018.02.05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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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의 역사 팩트체크] 권인숙 대책위원장 선임으로 돌아본 1986년 성고문

현직 검사에 대한 전직 고위 간부의 성추행 사건 폭로로 벌집이 된 법무부에서 지난 2일 흥미로운 발표 하나가 흘러나왔다. ‘법무부 성희롱·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원장을 위촉한다는 것이었다. 권인숙. 그 이름 석 자에 만감이 교차한 사람들이 꽤 많았을 것이다. 수백만 관객을 끌어모으고 눈시울을 터뜨린 영화 <1987>보다 한 해 앞, 1986년 한국을 달구었던 한 사건과 함께.

1986년 5월 3일 이른바 인천 사태가 벌어졌다. 제1야당 신한민주당의 개헌추진위원회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리던 날, 서울ㆍ경기ㆍ인천 지역의 운동권에는 거의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2만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어떤 이들은 그날 검문검색이 거의 없었던 점을 들어 그 해 가을 건대 사태에서 정권이 보여 준 바 ‘자유롭게 모아놓고 뜰채로 건져 올리는’ 방식의 소탕 작전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든 시위대는 강력했고 인천 시민회관 근처 수 킬로미터 도로가 ‘해방구’가 되고 하늘 같던 공권력이 시위대에 밀리는 기현상이 빚어졌다. 이 상황은 고스란히 TV에 비춰졌다. 페퍼포그 차에 매달린 전경이 시위대에 각목으로 엉망으로 두들겨 맞는 모습은 9시 뉴스 내내 반복됐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으로 권인숙씨 피해

당연한 수순으로 정권은 ‘불순분자 일망타진’에 나선다. 시위 내내 핸드마이크를 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위대를 지도하던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체포된 뒤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하는 고문을 당했고 그 외 많은 이들이 철창 신세를 지게 된다. 경인 가도에 늘어선 공장들에는 가짜 주민등록증 들고 ‘위장취업’한 이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고 경찰은 그들을 꼼꼼히 찾아내 수갑을 채웠다. 그 와중에 허명숙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이 부천경찰서로 끌려 왔다.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의 노동자였으나 그 신분은 가짜였다. 사실 그녀는 서울대학교 의류학과 학생이었던 권인숙이었다.

부천경찰서에서 그녀가 당했던 일을 구체적으로 읊어댈 이유는 없겠다. 글자 그대로 그녀는 지옥을 경험했고 악마에게 상처받았다. 단어 자체도 떠올리기 싫은 ‘성고문’이 벌어진 것이다. 이가 부서져라 이를 악문 그녀가 이 범죄를 세상에 폭로하고자 했을 때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던 건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그 언니는 끔찍한 피해를 당한 동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네가 그것을 계속 문제로 삼고 나온다면 부모님이 아마 돌아가실 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너를 죽여 버리겠다"

권인숙과 관련된 기록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아픈 대목 중의 하나였다. 오히려 성고문 폭로 내용을 읽을 때보다 더 참담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정권이 두렵다고 해도, 전두환의 세상이 그렇게 무서웠다고 해도, 상상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패악을 당한 가족에게 또 다른 가족이 저토록 극단적인 말까지 해야 했을까. 그렇게까지 ‘저지’해야 했을까. 그러나 나는 곧 머리를 젓게 된다. 그건 정권에 대한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권인숙이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고 두들겨 맞아서 어디가 부러졌다면, 그 만행을 폭로하고자 했다면 권인숙의 언니는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착한 내 동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며 언니가 앞장서서 경찰의 방패에 매달리고 고문 경찰 처벌하라고 소리질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성고문’ 앞에서는 그걸 말하면 “너를 죽여 버리겠다.”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 이유는 정권을 넘어서 그 가족들의 공포는 수십 년 겪어온 세상 그 자체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여자는 유리 같은 것이며 한 번 금가면 끝”이라는 통념이 지배적이던 시기였다. 집에 침입한 성폭행범에게 변을 당했을 때 남편이 그를 사유로 이혼을 요구하는 바람에 가정이 파괴된다 해서 ‘가정파괴범’이라는 단어가 버젓이 사용되던 때였다. (강도들에게 피해를 당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비열한 찌질함이라니) 당시 썬데이서울 류의 잡지에는 유명 연예인이나 저명인사들이 ‘어떻게 결혼에 골인했는가’에 대한 기사가 종종 실렸는데 놀랍게도 부인을 납치, 감금하여 “며칠 동안 사랑을 호소”해서 결혼했노라는 인터뷰도 더러 있었다. 그들이 21세기에 와서 방송에 출연까지 해서 그 무용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사람들을 경악시킨 바 있으나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것이었고 그런 ‘사랑’이 ‘결혼으로 골인’할 수 있었던 어떤 세상이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가지 않을까.

권인숙의 부모와 언니는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가 어느 정도였는지. 부모는 또 언니는 투사로서의 딸의 인생을 넘어서 한 여성으로서, 그 중 피해 입은 소수자로서의 딸과 동생의 구만리 같은 여생이 망가지는 걸 두려워했을 것이다. “왜 그 많은 여대생 중에 걔만 당했대?” 하는 쑥덕거림이 일찌감치 귓전을 때렸을 것이고 “당한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그걸 동네 사람들도 아니고 온 대한민국에 광고를 낼 수가 있어. 참 독하다” 하는 수군거림이 천둥처럼 들렸겠고 “빨갱이같은 애가 엄한 경찰 옭아매려고 저러는 거 아냐? 보통 여자가 저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봐. 어디 입끝 하나 벙긋 하겠어?” 하는 중얼거림이 번갯불처럼 온몸을 지져 댔을 것이다.

담당변호사 조영래씨(왼쪽)와 피해자 권인숙씨

그 치열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1986년 7월 3일 권인숙은 그녀의 용기에 호응하여 달려온 변호사들과 함께 문귀동을 고발한다. ‘부천서 문귀동 성고문 사건’이라는 끔찍한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듣도보도 못했던 경찰의 성고문 자행 범죄를 두고 초기에는 검사들도 팔을 걷어부친다. “이건 제대로 파 보자.” 권력의 핵심에 가 있는 선배들에게 연락해 이건 한 번 원칙대로 수사해 보겠다고 기염을 토했고 법무부장관도 그렇게 지시를 내리지만 ‘관계기관대책회의’가 모든 판을 뒤집어 놓습니다. “성고문이라는 말도 나오면 안된다.”

보도지침에 언론들 '성고문 진실' 보도 외면

기껏 써 놓은 수사 보고서는 휴지조각이 됐고 ‘성고문’은 ‘성모욕’으로 바꾸고 운동권 학생들이 ‘성(性)을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으며 저 문귀동이라는 악마 새끼는 성고문은 커녕 “티셔츠를 입은 가슴을 몇 차례 쥐어박은 사실이 있을 뿐”이라고 검찰청 뜰을 오가는 도둑고양이도 낄낄댈만한 거짓말이 시전됐다. 담당 검사가 통곡을 하고 지청장도 문 걸어 잠그고 흐느낄 정도의, 뭐랄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서글픈 비극이었다고나 할까. 그것도 모자라 검찰은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여 성실하게 근무하여 왔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을 들어 성고문 가해자 문귀동을 ‘기소유예’한다고 선언한다. 검사 집에서 기르던 애완견이 그 허벅지를 물고 “이 개새끼야” 부르짖을 판이었다. 이에 가장 절망한 사람은 권인숙 본인이 아니라 오히려 권인숙의 가족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될 줄 뻔히 알았는데......이래서 말렸던 건데.”.

대한민국은 참으로 잔인하고 뻔뻔했다. 보도지침이라는 독침에 꿰뚫려 있던 언론은 정권의 발표를 받아쓰기할 뿐 아니라 두어 수를 더 뜬다. 1986년 7월 18일 경향신문 사설은 그 하이라이트라 할 만했다. 아주 깔끔하고도 말끔하게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피해자를 마녀로 만들어 놓는다.

“첫째로 피의자 인권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었다는 점이다. 피의자와 경찰의 문제에 개입하려는 정치 세력들의 의도는 반 정부 반 공권력을 유지하려는 저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둘째로 피의자와 그 주변 반체제 세력의 의식화 문제이다. 검찰 발표에서도 드러난 바와 같이 이들 세력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획책하고 있다. 혁명을 위해 성을 도구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격 세력의 이와 같은 전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세간의 비난을 유도하여 공권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데 있다(...) 셋째로 부분을 통해 전체를 매도하는 일반적 의식 성향에 대한 경계이다. 어떤 한 조직의 구성원이 비리를 저질렀을 경우 그 조직 전체를 성토의 대상으로 삼은 시류가 존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이번 사건만 해도 한 수사 경찰관의 과격한 취조 태도가 사건화된 것이지 경찰 공권력 전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결국 정부와 언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첫째, 이 사건을 이용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다. 둘째 이 사건을 그 정치적 의도를 충족시키려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셋째,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개인의 문제지 조직의 문제로 확대시켜서는 안된다. 여기에 검찰이 문귀동을 기소유예한 논리를 덧붙여 보면, 넷째 ‘문귀동은 성고문 문제를 일으키긴 했으나 유능하고 성실한 경찰이었다’ 정도가 되겠다. 이 신문 ‘쪼가리’를 권인숙의 가족들이 읽었다면 그들은 어떤 심경이었을까. 누구를 ‘죽이고’ 싶었을까.

성고문 폭로 이후 이에 항의하는 집회가 있었지만 언론은 보도하지 않았다. KBS 캡처

그로부터 32년, 한 세대가 흘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어지간히 마르고 웬만큼은 닳을 만큼 시간이 흐른 2018년 벽두에 우리는 어디 운동권 학생도 아니고 현역 검사를 선배 검사가 성추행한 사건, 그 외에 잡다하고도 쳐다보기도 싫은 ‘미투’ 사건들의 폭로 릴레이와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기함을 할 만큼 놀라고, 또 망연자실 상태에 빠져 있다.

자신의 피해 사실을 증언하는 자리에서 손석희 JTBC 사장은 실언에 가까운 우려를 했다. “이제 검찰내에서 일하시기가 좀 힘드시겠네요..이런 말 자체가 말도 안되지만". 그런데 손 사장의 실언이 실제 사실로 육화되는 과정이 펼쳐지고 1986년 가증스럽기까지 했던 신문의 사설의 그림자가 먹지를 대 듯 똑같이 재연되고 있지 않은가.

"일 하나 잘 했다" 가해자 옹호 논리 계속

서지현 검사의 폭로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험담에는 그런가보다 했다. 괘씸하기야 한이 없으나 워낙 많이 들어온 레파토리라 그럴 것이다. 그런데 부장검사라는 작자가 피해자의 폭로 앞에서 ”피해를 당했으니 서울로 발령 내 달라, 대검 보내 달라, 법무부 보내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신다면 그런 요구는 도와드릴 수 없음을 깊이 양해 바랍니다“라고 발설하며 피해자가 ‘성을 출세 도구화’한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데에는 허파가 뒤집혔다. 거기에 검사들 사이에서는 “안태근 국장이 일 하나는 잘했다”는 소리가 허물 없이 튀어나오고 있다니 이게 문귀동을 유능하고 성실한 경찰로 묘사했던 30년 전의 검사와 어디가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이런 작자들에게 기소독점권을 안기고 있다는 이 나라가 부끄럽지 않은가.

서지현 검사의 부모님은 주변에서 소문난 부부 금슬로 유명했고 딸을 깊이 사랑한 분들이셨다고 한다. 이 사태에서 힘이 되어 주실 것이 분명한 부모님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서지현 검사의 글을 보면서 더욱 암담해졌다. 부모님들이 여직 생존해 계셔서 서지현 검사가 선후배 동료검사들의 성추행 퍼레이드를 폭로하겠다고 선언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셨을까. 과연 32년 전 위장취업자 권인숙의 가족과는 다를 수 있었을까. 달랐다면 얼마나 달랐을까. 과연 그 차이의 존재와 크기를 우리는, 우리 사회는 자신있게 입에 담을 수 있을까.

1986년의 성고문 피해자 여대생 권인숙이 2018년 법무부 성범죄 대책위원장으로 돌아왔다. 어쩌면 권인숙 위원장의 가슴 속에서는 몇 년 전 히트를 쳤던 드라마 <시그널>의 한 장면이 재연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1980년대의 형사 이재한이 21세기의 형사 박해영에게 물은 것처럼 1986년의 여대생 권인숙이 2018년 법무부 성범죄 대책위원장에게 열렬한 어조로 묻는 것이다. “거기도 그럽니까?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저걸로 뭘 얻으려 한다고 쑥덕거리고 나쁜 사람 만들고, 정작 가해자들은 기억에 없고 그저 몇 번 툭툭 친 거 뿐이고, 지금까지 성실히 업무에 임해 온 사람이니 용서되는 그런 세상인가요? 그래도 30년이 넘게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 그죠?”

법무부 성범죄 대책위장에 선임된 권인숙 명지대 교수

권인숙 위원장은 '1986'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죽었다 깨어난들, 내세에 태어난들 그 일이 쉽게 지워지랴. 응당 그렇게 할 일에 굳이 부탁의 말을 얹어야 할 지 모르겠으나 이것 하나만은 과거 속에서 끌어내 덧붙여 두고 싶다. 가족의 만류를 뚫고, 스스로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성고문을 폭로한 뒤 법정에 섰을 때 고 조영래 변호사가 온몸을 짜내 쓰고 읽었던 변론의 일부를 말이다. 그 아름다운 변론들을 현실에 육화시켜 32년 전의 자신에게 읊어 주고 대답해 주고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이제까지 우리가 경찰과 검찰과 사법부 그리고 언론에 대하여 말한 것은 우리 국가와 사회가 권양에게 가한 온갖 부도덕하고 비열한 박해와 일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봉착하고 있는 전반적인 도덕적 위기의 한 징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본 변호인단은 확신하거니와 이 도덕적 위기야말로 그 어떤 군사적, 정치적 혹은 사회 경제적 위기보다도 앞서는 우리 국가와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위기인 것이며, 이것이 정당하게 극복되지 아니하는 한 우리들과 우리 자녀들의 앞날은 실로 암담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 더. 문귀동 사건을 수면 위로 떠올린 가장 큰 힘은 물론 권인숙 자신의 폭로였고 그를 헌신적으로 도운 변호사들의 조력이었겠으나 성고문이라는 괴물을 깊숙한 침묵의 바다로부터 태양 아래로 끌어올린 손들은 그 외에도 많았다. 특히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들에게 권인숙이 당한 일은 강 건너 불이 아니라 팔뚝에 꽂힌 불화살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분노를 참지 못한 일부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도 꿈을 꾸지 못할 일을 벌인다. 화염병 몇 개 던지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인천지검 현관에 신나를 뿌리고 방화를 기도한 것이다. 고려대 여학생 3명이었다. 한 명은 화상을 심하게 입었지만 검찰은 치료도 시키지 않고 구속시킨다. 그 더운 여름에. 화상 입은 여자를.

그 해 7월 19일 무위에 그칠 뻔 했던 명동 시위를 폭발시켰던 것은 서울대의 한 여학생이었다. 명동성당에서 예정된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그녀는 하루 전날 명동 성당에 숨어들어와 화장실에서 밤을 샜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는 완강했고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경찰의 최루탄과 몽둥이에 대오가 흩어지려는 찰나 성당 화장실에서 밤을 새며 동료들을 기다리던 키 150센티미터의 여학생이 대오의 앞장을 섰다. “성고문 자행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 지극히 바른 말. 당연한 말. 그러나 꺼내기 어려웠던 말이 가장 약해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울려 퍼지고 터져 나오면서 시위는 폭발한다.

침묵이 깨지면 세상이 바뀐다

침묵하던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말이 안되는 일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고 얼토당토 않은 말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느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이제 그들은 조영래 변호사의 눈물 어린 항변에 공감하게 된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우리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리고 저들은 무슨 일을 했던 것인가. 그 말이 안 되는 시대, 성고문을 당하는 이의 언니가 “너 경찰을 고발하면 부모님 자살할지도 모른다.”고 동생에게 울며 매달려야 했던 그 공포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말했고, 일어났다. 담벼락에 욕만 한 게 아니라 신나통을 들고 검찰청에 들이부었고 시위에 참석하려고 성당 화장실에서 밤을 지샜다. 말이 안 되는 짓을 자행하는 이들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악을 쓰고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대들던 에너지. 그게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이 지닌 힘이었다.

그렇게 싸워 왔는데, 그렇게 노력했는데 당시의 피해자 권인숙이 성범죄대책위원장으로 돌아와 또 하나의 복마전을 상대해야 하는 현실에 많은 이들이 실망하고 탄식한다. 도대체 30년 동안 뭐가 변한 거냐고. 그러나 변화는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반복될 수는 있으나 똑같은 배역과 무대로 재연되지는 않는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말이 “갈아봤자 별 수 없다.”는 말보다 역사적인 기여도가 큰 이유는 못 살겠다는 각성이 갈아 봤자 하는 자위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갈아보자는 의지가 별 수 없다는 포기보다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피해자가 책임자로 돌아왔다. 어찌 변화가 없다고만 하랴. 그저 드라마 <시그널>에서 현재의 형사가 과거의 형사에게 했던 대사처럼 이렇게 덧붙여 보자. 함께 되뇌어 보자. “바뀔 수 있습니다 . 절대 포기하지 말아요 우리”

김형민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필명 산하로 알려져 있다. 글을 맛깔나게 써서 팬이 많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했고 1995년부터 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다수의 매체에 역사글을 기고하고 있으며 10여권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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