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키퍼 홍덕영과 골리 신소정, 그리고 한일전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8.02.13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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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첫 경기를 시종일관 지켜봤다. 기대를 하는 자체가 욕심이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곧 망상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타까웠다. 어렵게 만든 단일팀이 웬만큼의 선전을 해 주면 좋았겠지만 급수가 다른 상대를 어찌 투지와 열의로만 감당할까. 정신력이라는 건 실력이 비슷할 때나 플러스 알파지 기량이 턱없이 차이가 날 때의 정신력은 오히려 마이너스다.

그 와중에 빛난 건 역시 골리 신소정이었다. 신소정은 스위스전에서 52개 슈팅 중 44개를 막아냈다. 쉽게 잡은 것도 있었으나 골과 다름없는 상황도 많았다. 자칫하면 두 자리 수 이상의 패배를 당할 위기로부터 단일팀을 건져 낸 것이다.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경기, 마음은 앞서지만 몸이 따라가지 않아 얼음판에 내동댕이쳐지고 일단 우리 문전으로 온 퍽을 따내면 무조건 앞으로 쳐내기 바쁘고 1대 1에서는 허무하게 뚫리고 상대팀은 맘 놓고 슛을 때리는 가운데 용전분투하는 골리를 응원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슷한 인물이 떠올라 왔다. 40~50년대 한국 축구팀 골키퍼였던 홍덕영이다.

신소정 골리

홍덕영은 이북 출신이다. 함흥 사람이다. 언젠가 함경도 출신인 아버지께서 “차라리 남쪽에 소련이 들어오고 북쪽에 미국이 들어왔다면 궁합이 맞았을 것 같다”고 하신 적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가 무척 성했던 북한 지역의 특성을 얘기하신 것이었다. 함흥 지역도 예외가 아니어서 반공 소요가 잦았다. 홍덕영의 집안은 서점과 체육사를 동시에 운영하는 자본가 집안이었고 당연히 공산당과는 물과 기름이었다. 빨갱이 세상이 싫었던 홍덕영은 혈혈단신 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보성전문 (고려대) 입학 시험을 보기 위해 올라탄 전차 안에서 만난 보성전문 축구부가 골키퍼 걱정을 하는 걸 듣고는 내처 골키퍼를 자원했고 주전 골키퍼가 됐다.

분단이 굳어져가던 시기였고 동시에 치열한 이념대립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1948년 올림픽을 앞두고 고려대 4명, 연희전문(연세대) 4명 등 총 11명의 축구 선수가 월북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고 보성전문 축구 선수였던 이문휘는 좌익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전쟁 통에 기적적으로 풀려나 김정일의 전처 성혜랑의 회고록에 등장하기도 했다. 홍덕영은 그들을 익히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전차 안에서 “골키퍼가 형편없는데 어쩌지?” 걱정하던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북을 택했고 그 이후 영영 만나지 못한다. 분단의 비극은 축구판도 갈라 놓았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대표팀은 원래 노장이 주축이 된 팀으로서 (그에 불만을 품고 젊은 선수들이 월북했다는 설도 있다.) 주전 골키퍼는 따로 있었으나 그가 부상을 당하면서 대타로 출전기회를 잡게 된다. 첫 판에서 멕시코를 잡는 기염을 토했던 한국팀은 스웨덴에게 12대 0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홍덕영 골키퍼의 온몸에 멍이 들었다 할 정도로 바이킹의 후예들은 한국 골문에 쉴새없이 슛을 때려 넣었다. 스위스와 스웨덴의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신소정이 지키는 골문으로 마구잡이로 퍽을 날린 그 풍경이었다. 강슛도 강슛이지만 당시 축구공 가죽에는 그대로 물이 스며들었던 바, 수중전으로 펼쳐진 스웨덴 전에서 홍덕영은 물 먹은 가죽덩어리를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그러니 온몸이 시퍼럴 밖에.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참석해 경기전 축구화를 만지고 있는 홍덕영 골키퍼.

6년 뒤 열린 스위스 월드컵에서도 그는 한국팀 골키퍼로서 ‘왼발의 달인’ 푸스카스가 이끄는 전설적인 축구팀 헝가리와 터키팀의 맹폭격을 감당했다. 그 참담한 스코어와 경기 상황이야 잘 알려진 바다. 0대 9, 0대 7이지만 홍덕영이 건져낸 골은 그 두 배 이상이었다. 선수들 태반이 쥐가 나서 그라운드에 뒹구는 상황에서도 악으로 깡으로 뛰었지만 실력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매몰차고 차갑기로 이름난 스위스 사람들에게 한국 팀은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한국전쟁이야 유럽에도 꽤 알려져 있었을 터이니 요즘으로 하면 아프가니스탄 축구팀 정도의 느낌이랄까.

출국 전 외상으로 맞춰 입은 양복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기장이 문제였다 대부분 선수들의 다리를 덮지 못하고 깡총하니 발목을 덮을랑말랑했던 것이다. 짖궂은 외국 기자가 물었다. “한국에는 짧은 바지가 유행이오?” 그때 홍덕영이 야무지게 대답했다. “우리는 전쟁을 겪은 나라요. 물자 절약을 애국으로 생각하고 바지를 짧게 입었소 ” 이런 형편이 알려지자 유럽 사람들의 온정심이 발동했다. 한국 선수들의 숙소 앞에는 온갖 옷가지며 음식, 스위스 시계와 현찰까지 잔뜩 쌓였다. 그러나 또 유럽은 냉정했다. “이런 형편없는 팀이 올 것 같으면 아시아와 아프리카 애들은 빼고 월드컵 합시다.” 그때 FIFA 회장이자 월드컵의 아버지라 할 줄리메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지금 한국 같은 나라가 처참하게 패했다지만 수십 년 뒤 일을 누가 안단 말인가.”

그리고 줄리메의 반박 겸 예언은 들어맞았다. 그로부터 48년 뒤 2002년 한국은 월드컵 유치국이 됐고 4강이라는 어마어마한 (좀 머쓱하기도 한) 성과를 이뤄냈던 것이다. 줄리메는 벌써 고인이 됐지만 홍덕영은 살아 있었다. 2002년 당시 그는 1954년 출전했던 한국팀 가운데 생존해 있던 3인 중 한 명이었다. 병상에서 그는 “후배들이 반세기의 한(恨)을 풀어 주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기가 질릴 정도로 많은 슛을 막아내고 또 먹다 보니 징글징글해져서 공을 관중석으로 차 버렸던 (예비 공이 없었기에 공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이나마 쉬기 위해) 옛 골키퍼가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는 뭐라 묘사하기 어려울 것 같다.

골키퍼 홍덕영이 필생의 감격으로 꼽았던 경기는 1954년 월드컵 아시아 대표 결정전 한일전이었다. 태극기를 들고서 옛 식민 지배국으로 원정 갔던 한국팀은 1승 1무로 일본을 제압했다. 일본을 5대 1로 이기던 날의 감격은 대단했으나 2차전은 참혹했다. 1차전의 참패의 굴욕을 일본팀은 주먹과 발길질로 갚았다. 한 선수의 치아가 몇 대나 부러졌고 끝내는 기절할 정도로 거칠게 나왔던 것이다. 선수 교체 제도가 없던 시절, 기절했던 선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다시 그라운드로 굴러 들어갔다.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자”던 장택상 축구협회장의 발언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1차전에서 2만 명의 일본 관중들 사이에서 수십 명의 재일교포들은 악을 쓰며 한국을 응원했다. 끝내 이겼을 때 한국말을 제대로 몰랐던 2세들까지 애국가를 따라부르며 울었다고 한다. 어떻게 질 수 있었으랴.

그렇게 일본을 꺾은 뒤 한국 축구팀은 일약 영웅 대접을 받는다.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시내까지 카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경부선을 타고 올라는 역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과며 곶감이며 떡이며 건어물 등등을 던져 넣었다. 월드컵도 장하지만 사람들은 일본을 이긴 게 그렇게 좋았던 것이다. 홍덕영은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 땅에 처음 펄럭이는 태극기와 애국가 연주를 들으면서 느꼈던 뭉클한 기억을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정치와 스포츠는 구별돼야 한다. 하지만 스포츠만큼 정치적인 분야도 없다. 한 나라를 대표하고 그 역사의 굽이를 따라 돌며 경기를 벌이는 선수들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을 휘감은 스포츠가 어떻게 스포츠로만 존재할 수 있을까. 홍덕영이 그 어느 경기보다 1954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을 가장 무거운 기억으로 간직하는 이유다.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린 경기에서 그들이 치른 건 축구 경기만은 아니었다.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일본 여자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으로 돌아와 보자. 2003년 일본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에 참석한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이상의 참패를 당했다. 일본전 0-21 패배, 중국전 1-30 패배, 북한전 0-10 패배, 카자흐스탄전 0-19 패배다. 4전 전패에 1득점 80실점. 그리고 일본에는 그 뒤로 7연패를 당했다. 1득점 106실점. 하지만 스코어 차이는 꾸준히 줄였다. 지난해 삿포로에서 열린 동계아시안게임 일본전 결과는 0대3. 그리고 자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남북의 단일팀이 구성되어 세계의 벽을 실감하는 가운데 막판에 일본을 만났다. 홍덕영의 축구판이 반으로 갈라졌던 것과 반대로 적어도 얼음판 위에서 남북은 하나가 된 셈이다.

스포츠의 승패는 일상다반사보다 더 흔한 일이고 단일팀이라고 해서 전력이 별안간 급성장할 이유가 없음은 이미 증명됐고 세계랭킹 10위 안에 드는 일본을 꺾을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2005년 세상을 뜬 홍덕영 골키퍼의 마음으로 신소정 골리를 응원하고 싶다. 져도 괜찮다. 아니 지면 어떠랴. 그저 후회하지 않도록만 싸워 주길 바랄 뿐이다. 한데 어우러져 한때의 식민 지배국이었던 나라, 축하 손님으로 와설랑 한국 대통령에게 한미 군사 훈련을 해라 말아라, 위안부 합의를 준수하라 말아라 얄미운 소리만 하고 있는 아베 수상의 일본에 맞서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열정적인 경기를 펼쳐 주기를.

그 옛날 FIFA 회장 줄리메처럼 “지금이야 이렇지만 몇 년 뒤엔 어쩌는지 보자고!”를 부르짖으며 경기장을 나설 수 있기를. 아울러 신소정 골리가 나이 먹어서는 졸속에 급조가 아닌 실제 남북 단일팀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신소정 골리가 자신의 젊은 시절 경험했던 스위스의 잔인한 슛과 스웨덴의 번개 같은 스피드와 일본의 독기서린 퍽에 대해 회고하며 후배들의 선전에 기뻐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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