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노믹스, 수치로 감춘 불평등의 그림자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2.2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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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전. 투수가 마운드에 들어선다. 시합은 이어지지만 전세가 별로 유리하지 않다. 그럼에도 더그아웃에서는 투수의 실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강판시킬 경우, 감독이 작전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2월 20일 오전 사실상 아베 정권의 관보역할을 하는 《산케이신문》은 일본 정부가 국회에 제시한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 연임안과 관련, "물가 2퍼센트 상승이라는 목적달성을 위해 계속해서 정부와 함께 정책을 실행해나가기를 기대한다”면서 “(제2기 아베 정권 출범 이후) 5년이 지나 확실하게 디플레이션 불황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고 강조한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발언을 보도했다. 이는 아베 총리의 최측근이자 아베노믹스의 핵심 인물인 구로다가, 제3기 아베 정권에서도 자리를 지키게 되리라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말끝마다 '자유주의ㆍ시장경제'를 달고 사는 한국의 보수야당ㆍ언론이 아베노믹스 성공(?)의 ‘일등공신’ 운운하며 추켜세우는 구로다에 대한 일본 야권의 평가는, 정치적인 입장차를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온도차가 있다.

이를테면 같은 달 16일 기자회견을 가진 가사이 아키라 중의원의원(일본공산당)은 오는 구로다의 연임과 관련한 질문이 나오기가 무섭게 “큰 문제가 되어 온 이차원 금융완화를 계속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지난 총선 이후 협력관계를 유지 중인 야권연대에서 정책통으로 손꼽히는 그는 아직 경기가 회복되지 않았으며, 출구전략도 없다고 지적하면서, “금융완화에 의한 디플레이션 탈피는 현재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상황이다. 이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으니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빈부격차 심화시킨 아베노믹스

아베가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지 3개월째에 접어들던 2013년 3월,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이던 구로다는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일본은행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아직 임기 중이던 전임자 시라카와 마사아키 대신 총재 자리에 앉았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더 비기닝”이었다.

오늘날 구로다의 ‘다른 이름’처럼 되어있는 이차원(異次元)의 완화(양적ㆍ질적 금융완화)는 엔화환율을 급속하게 떨어뜨렸고, 직접적인 수혜의 대상인 수출 대기업은 호황을 누렸다. 여기에 다시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4조엔 규모의 감세가 더해졌다. 그렇게 대기업의 사내보유금은 아베 정권 하에서만 70조 엔이 증가함으로써, 지난해 9월 사상 최초로 400조 엔(406조 2348억 엔)을 넘어섰다. 물론 일본은행이 팔을 걷어붙이고 주식시장에 대량의 자금을 쏟아 부었으니 주가가 오르지 않아도 이상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과실을 일본 국민 모두가 나눠가질 수는 없었다. 《포브스 재팬》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일본 내 최상위 40대 부자의 보유 자산액은 2012년 약 8조 엔에서 2017년 약 16조3000억 엔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난 반면, 이른바‘워킹푸어(working poor)’로 불리는 연봉 200만 엔 미만의 노동자(대부분 비정규직)는 4년 연속 1100만 명을 웃돌았다. 노동자의 실질 임금도 2016년보다 감소했다. 

그럼에도 아베는 지난해 11월 국회연설에서 “정규직의 유효구인배율이 조사 시작 이후 처음 1배를 넘었다”며 감개무량해했다. 그야말로 희극의 한 장면이었다. 애초에 유효구인배율(구직자 대비 구인자 비율)을 끌어올린 것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만연한 노동환경 악화였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유효구인배율을 직업별로 살펴보면, 한눈에 들어올 만큼 높은 비율을 점하고 있는 것은 서비스, 건설골조공사, 보안, 개호서비스 등 하나같이 체력적으로 힘들고 임금은 낮은 직종들이었다. 이런 직종에서는 이직이 심한 까닭에 언제든 높은 유효구인배율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음식 관련 서비스나 상품판매직의 경우, 이른바 ‘블랙기업’의 횡포도 심각하다. 결과적으로‘지수(index)’가 아닌‘질(quality)’의 문제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올해 초 도쿄증권시장은 폭발적인 상승세와 함께 시작되었다. 주식의 시가 총액은 지난해 일본의 GDP를 넘어섰다. 그러나 일본의 주가 역시 규모의 차이야 있을망정 외국인 투자자의 움직임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한국과 다르지 않다. 더욱이 이를 지탱하는 것은 일본은행이 투입한 막대한 공적자금이다. 또한 눈여겨 봐야할 점은 낮은 임금상승률과 사회보장 삭감 등으로 인해 GDP의 약 60퍼센트를 차지하는 개인 소비가 2014년 4월 소비세 증세 당시와 비교할 때 극적인 반전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변이 없는 한 구로다가 내세운 물가 2퍼센트 상승이 임기 중에 현실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일본은행이 예컨대 주가가 하락하거나 국채금리가 오를 때에 대비한 어떤 출구전략도 세워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저환율 정책으로 수출은 증가하고 소비력은 약한 일본의 경제현실을 빗댄 만평. 출처: japantimes

결국 아베노믹스와 관련해 한국의 정치권이나 언론에서 화제 삼을 만한 것이 있다면,‘성공’신화가 아니라 수치로 승부하려는 금융정책만으로는 국민소비의 증가도, 경기부양도 불가능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교훈 정도라 하겠다.

영국의 경제저널리스트 마틴 울프는 지난해 연말《파이낸셜 타임스》가 게재한 “불평등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Inequality is a threat to our democracies)”라는 제목의 글에서“경제성장률 자체는 국민전체의 경제적 복지의 개선과 별로 관계가 없”으며“불평등이 끝내는 민주주의조차 죽여 버릴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최저임금 가이드라인마저 권력이 제시했던 ‘자칭’ 자유주의ㆍ시장경제에 대한 반성 없이, 고작 아베노믹스나 곁눈질하는 이들이 곱씹어보아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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