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기업이 '레인보우'를 좇는 이유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3.12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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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장면

2018년 3월, 번화가에 자리 잡은 신사복 매장에 한 남성이 들어선다.

최근 전직을 준비 중인 그는 슈트를 장만할 때마다 고역을 치른다. 기성복은 아무리 작은 것을 구입해도 허리 부분이 풍덩하기 때문이다. 상의도 마찬가지다. 어떤 디자인을 입든 좀처럼 옷태가 나지 않는다. 왜소하고 깡마른 체구라서? 비슷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리고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지만 초면인 사람에게 털어놓기 쉽지 않다.

순간 점포에서 실시중인 이벤트를 위해 투입된 전문가와 줄자를 손에 쥔 판매사원이 다가온다. 청년이 낮은 한숨을 쉬며 사정을 털어놓자 이야기를 듣던 판매사원이 능숙하게 치수를 재기 시작한다. 상담이 이어지는 90분 동안 조금씩 표정이 밝아지던 그는 이내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예 포기하고 있던, 초소형 비즈니스슈즈를 파는 매장의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정장을 고르는 즐거움을 느낀 날이었다.

#두 번째 장면

2017년 11월, 거리를 가로질러 들어오는 화려한 행렬, 한겨울의 공원이 들썩인다. 한 여성이 설치되어 있던 부스로 다가간다.

그녀는 늘 신발을 사기 힘들었다. 가까스로 큰 사이즈를 구하더라도 넓은 발볼이 문제가 되었다. 펌프스를 신으면 양쪽으로 민망할 만큼 벌어졌다. 유난히 튀어나온 발등은 안 그래도 큰 발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그런데 이 부스는 뭔가 달랐다. 일단 ‘여성화’와 ‘남성화’가 같은 진열대, 같은 칸에 놓여 있었다. 상품이 성이 남녀로 나뉘어있지 않은 이른바 젠더리스(genderless). ‘무지개 배지’를 단 판매사원은 신발을 권하기 전에 "어떤 것을 신고 싶으시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흥분에 들떠 270㎜의 펌프스를 구입했다. 판매사원은 올여름 같은 사이즈의 나막신과 180㎝ 신장에 맞춘 유카타도 구할 수 있을 거라 귀띔했다.

출처: japanhoppers.com

위의 두 장면은 일본의 섬유ㆍ패션업계지《센켄(繊研)신문》(2018년 2월 27일자)과 LGBT 인터넷매체 《레인보우라이프》(2017년 8월 14일)의 보도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리고 두 장면의 주인공은 모두 호적(일본에는 아직 호적이 존재한다)에 기재된 성별과 ‘마음의 성별’이 다른 성소수자, 즉 LGBT이다.

첫 번째 장면은 지난 2월 24일, 도쿄 도 지요다 구 유락초의 남성복매장 "비사루노(Visaruno)"에서 진행된 이벤트, 'LGBT 취업준비생ㆍ사회인 응원, 나다운 정장을 찾아라!'의 풍경이다. 지난해 도쿄에서 처음 이 이벤트가 열렸을 당시 홋카이도와 효고 현 등에서까지 손님들이 찾아왔고, 행사가 끝난 이후에도 매장에 문의가 빗발쳤다. 그 결과, 올해에는 행사 매장이 확대되었다. 점포에 LGBT 지원 단체인 리빗(ReBit)의 스태프가 파견되었던 이 이벤트에서 손님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리빗의 스태프와 판매사원은 패턴 맞춤 정장을 제시해주었다. 이벤트를 위해 남성정장의 크기는 145㎝에서 195㎝까지로 범위가 확대되었고 허리치수도 52㎝에서 151㎝까지로 선택지가 늘어났다. 여성정장도 크기는 XXS부터 허리치수는 55에서 92센티까지로 폭이 넓어져 성별에 연연하지 않은 조합이 가능해졌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점은 그로부터 불과 2년 뒤인 2017년에 펼쳐진 두 번째 장면의 무대가 규슈의 후쿠오카 시였다는 사실이다.

유통기업 마루이그룹 LGBT시장 개척 선두에

그 배경에 있는 것은 일본 전역에 마루이(マルイㆍOIOI)라는 이름의 패션몰을 소유한 87년 역사의 거대유통기업 마루이그룹이다.

마루이그룹 총수인 아오이 히로시는 LGBT 활동가 스기야마 후미노를 만난 것을 계기로 2016년 2월 사내교육을 실시했다. 효과에 대한 확신은 없었집만 막상 연수가 시작되자 "직원화장실이 남녀용 밖에 없는데 바꿔가야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원까지 등장했다. 2008년부터 발행하던 사내지인 《CRS 통신》의 타이틀은 2016년 3월부터 《함께 만드는 지속가능성 리포트》로 바뀌었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포용적이며 풍요로운 사회'라는 제목의 지면에 아오이와 스기야마, 그리고 노인ㆍ장애인 지원 및 소통능력 인증서를 발행하는 주식회사 미라이로의 가키우치 토시야가 등장했다. 전사적 차원의 다양성ㆍ포용성 관련 활동, 마루이 미래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마루이그룹은 내친김에 스기야마가 공동대표인 도쿄 레인보우 프라이드(TRP) 2016의 협찬도 시작했다. TRP의 개최지인 시부야 구와 신주쿠 구 일대에만 다섯 군데의 자사 점포가 있었다. TRP 개최 당시 퍼레이드의 코스에 있는 매장의 대형스크린을 레인보우로 장식하고 외벽에 레인보우깃발을 내걸었다. 점포 내부에도 레인보우깃발을 설치하고 레인보우 프라이드 배지를 단 판매사원이 고객을 맞았다. 커밍아웃한 성소수자를 모델로 하는 '아웃 인 재팬' 사진전도 본사 사옥과 각 점포에서 개최되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SNS를 사용하는 LGBT를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졌고, 점포를 방문한 고객 중에 '평생 이곳에서 쇼핑을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루이그룹은 지난해 LGBT 관련 단체 '워크 위드 프라이드'가 측정하는 기업의 LGBT 등 성소수자 관련해 기업을 평가하는 프라이드지표(행동선언 / 당사자커뮤니티 / 계발활동 / 인사제도ㆍ프로그램 / 사회공헌ㆍ섭외활동)에서 최고등급인 골드를 받았다.

물론 마루이그룹이 사회적 기업으로 업태를 전환한 것은 아니다. 일본이 초고령화 사회로 들어서 유행상품을 대량으로 판매하기 어렵게 됨에 따라, 타게팅보다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고객에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키워드가 LGBT였다.

도쿄 레인보우 프라인드 퍼레이드 2015의 한장면. 출처: Tokyo fashion flickr

LGBT 정체성 일본 전체 8%로 증가추세

판단의 근거로 작용한 것은 일본의 양대 종합공고대행사 덴쓰와 하쿠호도가 내놓은 의견이다. 주식회사 덴쓰의 다양성과제 대응 전문조직 덴쓰 다이버시티 랩(DDL)은 2015년 4월 전국 6만9989명을 대상으로 LGBT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대해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LGBT에 해당하는 사람은 전체의 7.6%에 달하며, LGBT 상품ㆍ서비스 시장규모가 무려 5조9400엔에 이른다는 것이 밝혀졌다. DDL은 이런 소비의 스타일을 레인보우 소비로 명명했다. 이듬해 하쿠호도 DY 그룹의 LGBT로 성소수자 관련 전문 싱크탱크 LGBT종합연구소가 내놓은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LGBT종합연구소가 일본 전역에 거주하는 20~59세 개인 10만명 대상 선별조사 결과, LGBT 및 기타 성소수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5년 DDL의 조사보다 좀 더 오른 8%였다. 

일본 재계는 이러한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2017년 5월 발표된 경단련 보고서는 나이키가 2016년 8월 미국 최초의 트랜스젠더 국가대표 육상선수 크리스 모지어를 광고모델로 기용한 것을 주요사례로 언급했다. 또한 지난해 3월 233개 소속회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LGBT 고객에 관한 대응을 검토 중인 회사의 비율은 76%에 달했다. 

일본 GAP은 2016년 도쿄 레이보우 프라이드를 기념해 무지개 색깔의 쇼핑백을 선보였다.

물론 "LGBT의 소비규모가 6조 엔이라 하더라도, LGBT인 것에서 기인하는(즉, 자신의 성정체성에 따른) 소비액은 수백억 엔 정도(1%면 600억 엔)로 한정된다. 솔직히 말하면 더 적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공직선거 후보자를 흠집 내기 위한 도구로 악용될 뿐인 LGBT가, 이미 최소 수천억 원 규모 시장을 가진 글로벌 경제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팩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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