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선구자 이름이 학교에서 지워진 까닭은

  • 기자명 황장석
  • 기사승인 2018.03.26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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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 중심도시 팰러앨토(Palo Alto)의 주민 라스 존슨(Lars Johnsson)이 체인지닷오그(Change.org)에 온라인 청원을 올린 건 2015년 11월의 일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다니는 공립중학교와 옆에 있는 다른 공립중학교, 이렇게 두 학교의 이름을 개정해야 한다는 청원을 올렸습니다. 두 학교 모두 특정 인물들의 이름이 붙어있는데, 결코 학생들이 본받을 인물들이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존슨이 청원을 올리자 425명이 서명을 했습니다. 지역의 교육단체들도 지지 의사를 밝혔죠. 그러자 팰러앨토 통합교육구(Palo Alto Unified School District, 이를 테면 팰러앨토 학군)를 관할하는 교육위원회가 학교 이름을 개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지난해 3월에 '2018-2019학년(2018년 7월~2019년 6월) 시작 전에는 두 학교 이름을 개정한다'는 결정이 내려집니다. 늦어도 올해 6월까지는 두 학교의 이름을 변경하기로 한 것인데요, 빠르면 이달 안에 새로운 이름이 정해질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가 된 학교는 조던 중학교(Jordan Middle School)와 터먼 중학교(Terman Middle School)입니다. 조던 중학교는 1937년, 터먼 중학교는 1958년 문을 열었으니 햇수로 보면 각각 81년, 60년이 됐습니다. 조던 중학교는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이었으며 평화주의자, 어류학자로 알려진 데이비드 스타 조던, 터먼 중학교는 스탠퍼드대 교수로 교육심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IQ테스트를 발명한 루이스 터먼의 이름에서 왔습니다. 조던, 터먼 두 사람의 이름을 학교 명칭에서 없애기로 한 건 바로 우생학 때문이었습니다.

 

스탠퍼드 초대 총장 조던, IQ테스트를 발명한 터먼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이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

조던은 1891~1913년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을 지냈습니다. 인디애나대 총장이었던 그는 스탠퍼드대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 부부의 영입 제안을 받고 '서부의 MIT, 하버드'를 꿈꾸는 스탠퍼드대 첫 총장을 맡았습니다. 그는 개교 당시 '학업 수준은 낮지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엔지니어'를 정원의 25% 정도 선발하는 등 산학협력, 기술 교육을 중시했습니다. 창업 지원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스탠퍼드대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 버클리) 공대를 '교수의 창업가 정신'이란 측면에서 분석한 논문엔 조던 총장이 제자의 창업 지원 요청을 받고 개인 돈을 투자해준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영재들을 모집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들의 삶을 추적 관찰한 영재 연구로 유명한 터먼 교수. 1500여 명의 어린 영재들을 선발해 학업능력, 사교성, 관심사, 인성 등을 연구했는데, 그가 연구를 통해 축적한 자료는 후대의 연구에 폭넓게 활용됐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 심리학자 알프레드 비네(Alfred Binet)가 성장 발달이 느려 특별한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를 판단하기 위해 개발한 지능검사를 터먼 교수가 더욱 발전시켜 만든 IQ테스트는 미국 전역, 나아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됐고요(IQ테스트의 원래 명칭은 '스탠퍼드 비네 테스트(Stanford Binet Test)'였습니다).

 

그들의 씻을 수 없는 과거, 우생학

IQ 테스트를 방명한 루이스 터먼 스탠퍼드대 교수

그런데 두 사람은 각자 학계와 사회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지만 모두 우생학을 신봉하고 주창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인류를 유전적으로 개량해서 우월한 인류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을 우생학이라고 보면 이들은 그런 우생학을 주장하고 연구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다니는 중학교와 옆 학교에서 조던과 터먼 두 사람의 이름을 지워야 한다고 청원한 학부모 존슨. 그는 2015년 5월경 조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과제로 가져온 '학교 명칭의 유래'를 들여다 보다가 호기심에 자료를 살펴 봤습니다. 조던의 '흑역사'를 확인하면서 터먼의 '덮여 있던 과거'도 알게 됐습니다. 그는 두 사람이 썼던 논문과 관련 자료를 통해 우생학 관련 행적을 확인하고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온라인청원에 그런 내용을 정리해서 올렸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월한 능력을 가진 인종(주로 백인)이 번성하게 해야 하며, 능력이 떨어지는 인종은 자손을 낳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던 사람들의 이름이 공립학교 이름에 버젓이 붙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죠.

존슨은 이제껏 왜 적극적으로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지 분통이 터졌습니다. 20세기 초반 버젓이 우생학을 주창하던 게 미국 사회의 모습이었다고 하지만 이제라도 잘못된 건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행동에 나섰습니다. 청원의 제목은 '조던 중학교, 터먼 중학교 명칭을 바꿉시다 – 캘리포니아의 선도적 우생학자들이 아니라 본 받을 만한 인물들에게 영예를!(Rename Jordan & Terman Schools - honor role models, not California's leading Eugenicists!)'이었습니다.

구글, 야후, 스냅챗 등 수많은 기술기업들을 배출하며 혁신을 선도하고, 실리콘밸리에 인재를 공급하는 '두뇌은행' 역할을 해온 스탠퍼드대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들이 우생학 주창자였다는 건 스탠퍼드대로서도 수치스럽고 불행한 역사입니다(중학교 이름엔 없지만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이자 실리콘밸리 최초의 실리콘 반도체회사를 설립했으며 스탠퍼드대 교수로 재직한 윌리엄 쇼클리도 대표적인 우생학 주창자였습니다).

2016년 12월 스탠퍼드대 학생신문인 스탠퍼드데일리(Stanford Daily)엔 '스탠퍼드 우생학의 역사(Stanford's history with eugenics)'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기사를 쓴 클레어 왕(Claire Wang)은 조던, 터먼 두 사람이 모두 우생학 관련 단체에서 주요 직책을 맡을 만큼 적극적이었다고 밝힙니다. 그는 단순히 학교 이름을 고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생들이 이런 실상을 파악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담기도 했습니다.

change.org에 올라온 중학교 이름 변경 청원의 내용을 담은 사진

후보 중 윌리엄 휼렛 HP 공동창업자도 포함

팰러앨토 통합교육구 교육위원회는 3월 27일 회의를 열어 두 학교의 이름을 정할 예정입니다. 주민들로 구성된 자문위원회에서 최종적으로 6명의 이름을 권고했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으면 그 중 두 명의 이름이 채택될 것으로 보입니다. 6명 중에는 HP의 공동창업자이자 실리콘밸리에서 존경 받는 기업인이었으며 사회 공헌도 적극적이었던 윌리엄 휼렛 등 남성이 3명, 19세기 후반 지역에 정착한 팰러앨토 초기 주민이자 교육운동가였던 여성 등 여성이 3명입니다. 남성 중에서 2차세계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팰러앨토 고등학교 졸업생인 프레드 야마모토(Fred Yamamoto)라는 이민 2세 일본계 미국인도 있는데요, 진주만공습을 지휘한 일본군 해군제독 성이 야마모토라는 이유로 중국계 주민들이 반발한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어떤 인물들로 결정이 될지, 두 중학교 뿐 아니라 실리콘밸리 지역사회의 본보기가 될 인물이 누가 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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