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가 일본 주류시장을 잠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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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가 일본 주류시장을 잠식하다
  • 홍상현
  • 승인 2018.03.28 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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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알코올 음료 역사와 유행 원인

도쿄 도심 사무실 밀집 지역의 점심시간. 회전초밥 체인점에서 사람들이 망중한을 즐긴다. 여기까지는 서울과 다르지 않은 풍경. 하지만 그들이 모여 앉은 테이블을 관찰해보면, 곧 업무에 복귀해야할 상황에서 좀처럼 주문하지 않는 메뉴가 눈에 들어온다.

맥주, 와인, 심지어 정종에 츄하이(소주에 탄산과 과즙을 섞은 음료)까지. 대개 이런 음료는 사양하는 임신부로 보이는 여성이 아무렇지 않게 아사히나 기린의 로고가 그려진 캔맥주를 따라서 마신다. 먼저 잔을 비우고 일어나 자동차열쇠를 챙기는 이도 있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불안감. '다들 괜찮을까?'

'술맛나는' 무알코올 음료 2009년 이후 상승세

당연히 아무 문제가 없다. 시간이 흘러도 전혀 붉어지지 않는 그들의 얼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량이 세서가 아니다. 3조5738억 엔 규모(2016년 현재)의 일본 주류시장에서 2009년 이후 내내 상승세를 이어오고 있는 위대한 ‘페이크(fake)’상품, ‘주류인 듯 주류 아닌, 주류 같은’ 무알코올 음료 때문이다.

일본 대형할인점의 무알코올 음료 코너. 모든 브랜드가 기존 히트상품의‘무알코올 버전’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무알코올 음료란 알코올 성분이 함유되지 않은 알코올 맛 음료(alcohol taste beverage)를 의미한다. 하지만 알코올 성분이 0.05% 이하(천연과즙에 함유된 극소량의 알코올 성분비 정도이다)인 음료는 일본에서 법적으로 ‘무알코올’ 표기가 가능하며, 식품위생법상 청량음료수로 분류된다. 결국 이들이 마시고 있는 것은 기존 알코올 음료의 알코올 성분을 극소량으로 줄이거나 0퍼센트로 만든 청량음료수다 (무알코올 맥주의 경우 알코올 성분이 1% 미만이기만 하면 된다).

무알코올 음료는 물론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3)의 저 유명한 장면에서 이야기하듯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지만,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로 술을 마신 것과 같은 기분이 들게 해준다. 주류 판매업 면허가 불필요한 까닭에 미성년자에 대한 판매ㆍ제공 및 미성년자의 구입 및 음용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20대 이상의 소비자를 타겟으로 개발되며, 미성년자에 대한 판매가 장려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무알코올 음료는 미성년자의 구입이 힘들도록 주류 판매코너에 진열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편의점 등에서도 구입할 때 술이나 담배처럼 연령을 확인한다.

두차례 음주운전 처벌 강화로 무알코올 음료 확산

일본에서 무알코올 음료 확산의 계기가 된 것은 2003년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이루어진 음주운전 처벌규정 강화였다. 수요가 늘자 거대 주류회사가 일제히 생산경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법적으로 알코올이 1퍼센트 미만이기만 하면 무알코올 음료로 분류된다는 조건 때문에 당시 출시된 제품들은 대개 '알코올 제로’까지는 아니었다.

예컨대 2003년에 발매된 ‘몰트스쿼시’(기린)에는 알코올이 0.5%, ‘아사히 포인트 원’(아사히)에는 0.1%의 알코올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민감한 사람이 많은 양을 마시면 음주단속에 걸릴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맛’이었다. 몰트스쿼시의 경우 혀에 느껴지는 자극이나 보리의 맛은 확실하지만, 뒷맛이 깊지 않다는 점에서 술이라기보다 물, 혹은 보리주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았다. 알코올 생성을 억제하는 가운데 원료와 효모를 배합하고 아미노산을 사용해 시원하고 깊은 맛을 냈다고 선전한 아사히 포인트 원도 2003년 11월 발매 이후 2005년 3월까지 33만 상자(한 상자는 633밀리리터 대병 20개)가 판매되는데 그쳤다. 

2007년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인한 또 한 번의 음주운전 벌칙 강화는 무알코올 음료 시장에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2009년 4월 기린은 몰트스쿼시 대신 알코올이 0.00%인 일본 최초 무알코올 맥주 ‘기린 프리’를 발매해 대히트를 기록했다. 아사히도 아사히 포인트 원 대신 ‘아시히 포인트 제로’를 발매하는 등 알코올 0% 제품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발효 대신 다른 첨가물로 맥주 맛 재현

맥주는 우선 맥아로 맥즙을 만들고, 여기에 호프(hops)를 넣어 향기와 특유의 쓴맛을 낸 뒤, 이 맥즙을 다시 효모로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쳐 생산된다. 그런데 기린 프리는 맥즙과 호프가 주원료지만 발효를 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맥즙 특유의 역한 냄새와 단맛, 그리고 신맛이 강하다. 기린 프리는 이 단계에서 츄하이(향이 강하다) 개발팀의 지원으로 효모 특유의 향을 재현했다. 신맛 조절에는 계열사인 기린 비버리지가 청량음료 제조에 사용하는 산미 제어기술이 응용되었다.

아사히 포인트 제로는 아사히 포인트 원의 원료 배합 비율을 분석, 맛과 향, 성분의 균형(알코올 도수의 조정)을 최적화한 맥즙을 제조해 사용했다. 또한 발포, 숙성 공정이 생략되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깊은 맛과 향의 보존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2008년 250만 상자 규모이던 무알코올 음료의 매출규모는 2009년 1060만 상자, 2010년 2165상자로 비약적 발전을 거듭해 오늘에 이른다. (2016년 현재 4340상자)

일본의 거대 주류회사 산토리 홀딩스가 2017년 4월 발표한 보고서의 설문조사(일본 내 1개 도, 3개 현에 거주하는 20~69세 성인남녀 5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는 기사 첫머리에 묘사된 장면을 완벽하게 뒷받침해준다. 응답자 중 한 달에 한 번 이상 무알코올 음료를 마신다고 답한 6849명에게 3년 전과 비교한 소비량 추이를 묻자 55.3%가 ‘늘었다’고 했으며, 그들 중 48.6%는 ‘점심시간 등 낮 시간대에 무알코올 음료를 마신 적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무알코올 맥주는 ‘맥주와 거의 흡사한 맛이 난다’(94.0%), ‘마신 뒤에도 몸이 편하다ㆍ취하지 않고 술 마시는 기분을 낼 수 있다’(89.3%), “점심시간 등 낮에도 즐길 수 있다”(76.4%) 등이 큰 매력으로 작용하면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홍상현 팩트체커  contact@newstof.com  최근글보기
사회과학과 영화이론을 넘나드는 전문적 식견을 갖추고 한ㆍ일 두 나라 매체에 분석 기사를 쓴다.
파리경제대 교수 토마 피케티와 『21세기 자본』 프로젝트를 진행한 도쿄대 시미즈 연구실 출신. 같은 대학 이미지인류학연구실(IAL)의 네트워크 멤버였다.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 등의 논쟁적인 저작을 소개한 번역가이며,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거쳐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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