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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가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후쿠오카형무소 생체실험 1800명 사망" 영화 <동주> 주장 팩트체크

시인 윤동주의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서사는 언제나 후쿠오카형무소에서의 옥사로 마무리되곤 한다. 그 사인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확증을 가지고 말하기 어려운 형편이지만, ‘생체실험’의 희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믿어지고 있고, 그것이 다시 여러 매체를 통해 반복됨으로써 사회 일반에서는 ‘정설’과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생체실험’설을 구성하는 근거를 자세히 뜯어 보면, 그 근거라는 것이 대단히 취약하다는 것, 때로는 ‘날조’에 가까운 논거 위에서 성립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체실험’설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그 주장의 성립 자체를 위협하고 마는 ‘가짜 증거’는 철저히 검토하여 배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어느덧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상식’이 되어 버린 ‘생체실험’에 대해, 구체적인 자료에 비추어 그 사실 여부를 검토해 보려 한다.

영화 『동주』가 말하는생체실험 1800명”은 과연 사실인가?

2016년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는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맺는다. “시인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사망한 지 6개월 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한다. 후쿠오카 감옥에선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1800여명이 사망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경우, 영화 본편이 다소의 상상과 감독의 상상력으로 해석되는 영역임에도, 마지막의 자막은 ‘팩트’를 서술하는 것으로 인식되곤 한다. 인터넷 뉴스의 인터뷰를 보면, 실제로 감독 자신이 이 내용을 사실로 믿고 있는 듯 하며, 인터넷 공간에서는 영화와 감독의 인터뷰를 근거로 이 내용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꼬리를 물고 확산되고 있다.

‘후쿠오카형무소 생체실험 1800여명 사망’이라는 것은 이제껏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인데, 사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이 시기의 자료를 조금만 찾아보면 대단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 이용하는 통계는 자료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숫자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경향을 파악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오차이다.)

<그림 1>

<그림2>

<그림3>

〈그림 1~3〉은 일본 사법성이 발행한 『행형통계연보(行刑統計年報)』의 후쿠오카형무소 해당 부분이다. 각각 1943년, 1944년, 1945년말 현재의 재감자(기결수) 수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간략화하고, 연간 사망자 수를 더하여 다음의 표를 만들었다.

각년말 현재 재감자수

연간 사망자수

1943년

1,185

54

1944년

1,434

134

1945년

2,441

269

*일본국 사법성『행형통계연보』1943~1945년판을 바탕으로 작성.

새로운 수형자가 들어오는가 하면, 석방・형집행정지・보석・사망 등으로 형무소를 나가는 사람도 상당수 있기에 연간 재감자수는 연말 현재의 재감자수보다 많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렇더라도 수용인원 1000~2500여명의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으로 1800명이 사망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수년간에 걸쳐 사망자가 발생했다 해도, 글자 그대로 감옥이 텅텅 비어버릴 정도의 인원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형무 관련 통계에서 형무소별 사망자 숫자가 적시되어 있는 바, 1943년~1945년의 사망자 전원의 사인이 생체실험에 의한 것이라 해도 1800명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후쿠오카형무소의 사망자가 많은 것은 생체실험의 증거인가?

작가이자 역사가인 송우혜의『(재개정판) 윤동주평전』(푸른역사, 2004년)은 윤동주 생애 연구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준익 감독 역시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참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윤동주평전』은 윤동주의 사인에 관한 기존의 여러 논의를 바탕으로 ‘생체실험’에 의한 사망으로 결론 짓고 있는데, 몇가지 재검토할 부분이 있다.

윤동주 시집을 일본어로 번역한 이부키 고(伊吹郷)는 교정협회(矯正協会)가 1966년에 간행한『전시행형실록(戦時行刑実録)』 1169~1170쪽에 수록된 1943년~1946년1월의 후쿠오카형무소 수감자 사망수를 생체실험의 방증으로 제시한 바 있다. 1943년 64명이었던 사망자가,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으로 급증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생체실험이 이루어진 근거라는 것이다.

이같은 설명은 이후 한국사회에 폭넓게 받아들여졌는데, 송우혜도 “이것은 도저히 평범한 수치가 아니다. 복강(후쿠오카)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대규모의 생체실험을 행했으리라는 심증을 굳게 하는 통계 수치이다”(『윤동주평전』, 462쪽)라고 하여, 이부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부키가 전거로 삼은 이 표(그림 4)를 한번 보자.

<그림4>

빨간 색으로 네모를 친 부분이 후쿠오카형무소의 사망자수인데, 숫자 자체는 이부키가 말한 그대로이다. 다만 1944년 이후 매년 두배씩 사망자가 증가한 것이 과연 후쿠오카형무소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후쿠오카형무소와 비슷하거나, 또는 더 큰 증가율을 보이는 사례들에 파란색으로 네모 표시를 해 보았다. 두배씩 증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세배 네배, 심한 경우에는 열배 이상 급증하는 사례도 볼 수 있다.

표의 마지막 부분, 초록색 네모로 표시한 것이 일본 전국 형무소 사망자수의 총계인데, 1943년 1,350명이었던 것이 1944년 3,455명, 1945년 7,201명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추이에서 보면, 후쿠오카형무소의 사망자수 증가는 오히려 양호한 편이라고 할 정도이다. 이같은 사망자수의 증가는, 기존의 열악한 형무소 환경에 더하여, 태평양전쟁 말기에 빚어진 식량과 의약품의 결핍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부키가 이 자료를 이용할 때, 후쿠오카형무소 사망자 숫자만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후쿠오카형무소의 사망자수만을 떼어내어 마치 대단히 특이한 현상인 양 설명하고, 그것을 생체실험의 방증으로서 제시한 것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사기’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윤동주의 최후를 좀 더 비극적인 것으로 연출하고, 일본의 과거를 반성하는 ‘양심적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군국주의 일본의 잔인무도함을 비난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의 동기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이같은 ‘선의’에 넘치는 사기적 논증을 한국의 문예지(『문학사상』1985년 5월호)에 게재함으로써, 이 허구의 논증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생체실험설’의 중요한 논거로 거듭 인용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는 30년 이상을 이부키의 무책임한 한마디에 속아 왔다고 하겠지만, 그것을 의심하고 검증할 만큼 한국의 학계나 매스미디어가 성숙하지도, 역량을 갖추지도 못했던 것을 솔직히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쩌면 한국사회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 자신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한편, 윤동주에 ‘생체실험’이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들리는 또 한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은 소박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운동과 산책을 즐기던 튼튼한 몸이고 한창 젊었던 그가 복강형무소에 수감된 지 미처 1년도 안 되어 이렇게 허망하게 절명한 이유는 무엇인가?”(『윤동주평전』, 448쪽)

앞서의 사망자 통계는 이같은 인식을 한번쯤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행형실록』1167쪽에는 〈형무소 사망율과 국민사망율〉이란 표가 게재되어 있는데, 1943년~1946년 기간만 뽑아 한국어로 바꾸고, 천분율을 백분율로 바꾸어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사망자수가 앞서의 표와 비교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밝혀 둔다).

1일평균

재감자수

환자수

환자율

사망수

사망율

일반국민

사망율

1943년

47,378

2,756

5.82%

1,305

2.75%

1.59%

1944년

57,771

5,204

9.01%

3,448

5.95%

1.76%

1945년

53,666

6,474

12.06%

7,481

13.85%

3.03%

1946년

56,887

8,781

15.44%

4,075

7.16%

2.15%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만 해도 형무소의 사망율이 일반국민 사망율과 비슷하거나 더 낮았던 데 비해, 태평양전쟁 이후 형무소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고, 막바지인 1945년에는 피크를 맞았다(사망자 숫자가 병자 숫자를 앞서 버린 것에 대해서는 미군의 공습에 의한 사망자 등을 고려할 수는 있지만, 다소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아무튼 윤동주와 송몽규가 목숨을 잃고 만 1945년 전쟁말기의 형무소는 열명 중 한사람이 목숨을 잃는, ‘건장한 청년’ 조차도 어찌해 보지 못하고 줄줄이 죽어 가야만 했던, 참으로 비참한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후쿠오카형무소에는 조선인 정치범이 집중 수용되었는가?

한편 쿄토에서 실형판결을 받은 윤동주와 송몽규가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된 것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마치 후쿠오카형무소에 조선인 정치범(치안유지법 위반 수형자)를 집중 이송하여 생체실험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는 뉘앙스의 해석도 있다. 이 또한 이부키의 주장인데, 이것 역시 근거가 빈약할 뿐 아니라 의도적인 왜곡의 혐의까지 있다. 이부키는 앞서의 『전시행형실록』에 수록된 사상범 예비 구금 기록의 비고란에 “구마모토, 후쿠오카는 조선독립운동 관계”라는 비고란의 설명이 있음을 소개하면서 “말하자면 조선독립운동 관계의 수형자는 구마모토, 후쿠오카에 보낸다는 방침이라도 있었다는 것인가”(『윤동주평전』442쪽에서 재인용)하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가 인용한 자료를 직접 확인해 보자.

<그림 5>

예방구금이란 이미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사상범 전력자 중에서 국가 치안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판단된 인물을 사법기관이 심사하여 감금하는 극악의 사상통제정책이었다. 요컨대 치안유지법으로 재판을 받고 형무소에서 수형 중인 윤동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부키가 의심스럽다고 지적한 ‘비고’ 란은 빨간 색 네모가 쳐져 있는 부분인데, “괄호 안은 모두 내수[內數, 표시 인원에 포함되는 숫자]로서 구마모토, 후쿠오카는 조선독립운동 관계, 기타는 유사종교관계이다. 그밖에는 전부 일본공산당관계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즉 이미 형을 살고 나온 사상범 전과자를 다시 잡아들여 가두었는데, 대부분이 일본공산당 관계자였고,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조선독립운동이나 유사종교(大本教) 관계자가 포함된 경우에는 괄호 안에 그 숫자를 기재하였다는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 후쿠오카와 구마모토 관할구역에서 조선인 1명씩이 예방구금에 걸렸기에 그것을 적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역시 윤동주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을 증폭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오독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애초에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의혹 제기였지만, 통계를 통해 다시금 확인해 보자. 다음의 표는 1944년말 현재, 치안유지법 위반 사상범(기결수)이 10명 이상 수감되어 있는 형무소를 정리한 것이다.

형무소

도요타마

(豊多摩)

요코하마

(横浜)

오사카

(大阪)

고베

(神戸)

나고야

(名古屋)

후쿠오카

(福岡)

미야기

(宮城)

삿포로

(札幌)

인원

56

23

57

86

16

10

15

39

*일본국 사법성『행형통계연보』1944년판.

1944년말 현재 일본 전국에 수감되어 있는 치안유지법 위반 수형자의 총수는 359명인데, 이 시기에는 매년 새롭게 입감하는 치안유지법 위반 수형자의 약 반수를 조선인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다소의 오차는 있을 수 있지만 조선인 정치범은 총수의 절반 정도, 그러니까 180명 전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후쿠오카형무소의 치안유지법 위반 수형자 10명(여기에 윤동주와 송몽규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전원이 조선인이라 가정하더라도, 조선인 사상범 추정치의5~6% 정도에 지나지 않는 만큼, 특별히 조선인 사상범을 후쿠오카에 몰아 넣었다는 의혹은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화 '동주'의 한 장면

생체실험의 내용은바닷물주사였는가?

한편 윤동주와 송몽규에게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는 논거로 곧잘 등장하는 주장이 또 하나 있다. 1980년 당시 한국에 유학하며 국문학을 연구하던 고노 에이지(鴻農映二)가 규슈제국대학 의학부에서 이루어진 미군 포로 생체해부실험과 관련지어 후쿠오카형무소에서의 생체실험이 개연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 놓은 바 있다. 이 사건은 1945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미군 포로 8명을 살아 있는 상태에서 해부하여 장기를 적출하고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등의 실험을 행하여 전원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었다.

고노는 같은 시기, 가까운 장소에서 일어난 생체실험인 만큼 후쿠오카형무소의 그것과도 연관을 가진다고 보고, 특히 ‘대용혈액으로서 바닷물을 주입’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은 주사도 바닷물 주사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윤동주의 생체실험은 물론이거니와, 실험의 내용이 ‘바닷물 주사’였다는 것이 일반의 상식 처럼 되어 있으며, 인터뷰 내용으로 보건대 영화 『동주』의 이준익 감독도 이를 사실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과연 이같은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일까? 의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지만, 문외한의 눈에도 이 두 ‘실험’은 너무나도 달라 보인다. 일치하는 것은 단지 ‘생체실험’과 ‘주사’라는 키워드만이 아닐까 싶다.

윤동주가 사망한 후, 유해를 인수하러 후쿠오카형무소에 간 당숙 윤영춘은 “푸른 죄수복을 입은 20대의 한국 청년 근 50여 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고 진술한다(『윤동주평전』450쪽에서 재인용). 같은 시기,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경험했다는 김헌술은 주사기로 “5~10cc 정도의 주사”를 맞고 ‘암산 능력 시험’을 받았다고 회상한다(『윤동주평전』529쪽에서 재인용). 이것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일어났다고 알려진 ‘생체실험’의 일반적인 이미지일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도 이같은 진술에 바탕해 ‘생체실험’ 장면을 그려내었다.

여기에 비해, 미군 포로들에 대한 생체실험, 아니 생체해부는 수술대 위에 눕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장기를 적출하는 등 신체를 훼손당해 다량의 출혈이 일어났고, 거기에 대용혈액으로서 바닷물이 주입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암산 시험 같은 건 존재할 여지도 없었다. 같은 ‘주사’라고는 해도, 한쪽은 예방접종 등에서 흔히 보는 조그만 주사기로5~10cc의 액체를 팔뚝에 주사한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점적주사로 무려 500cc를 주입한 것이었다.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모종의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것이 규슈제국대학에서의 생체해부실험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일까?

이상에서 ‘생체실험설’ 논의에서 근거로 제시되어 온 내용이 사실관계에서 어긋난다는 점을 여러가지로 비판했지만, 나 자신 ‘생체실험’이나 그에 상응하는 실험이 있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황당무계한 근거에서가 아니라, 근대 이후 다수의 일본 의학자 및 의사들이 형무소와 연관을 갖고 수형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해 온 실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종다양한 수형자들이 완벽한 통제하에 놓여 있는 형무소는, 의학자가 관찰 및 실험을 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공간으로서, 특히 식민지인에 대한 인종론적 연구나, 범죄인류학 연구에 널리 활용된 바 있다.

예를 들어 교토제국대학에 제출된 의학박사논문 중에는 「조선에 있어서 수형자의 영양 및 신진대사에 관한 연구」(1928년)이나, 「조선 수형자의 가스 대사」(1931년), 「조선 수형자의 소변에 함유된 질소성분의 양적 분포 및 그것에 미친 다양한 인자의 영향」(1932년)과 같이 형무소의 감옥의(보건기사, 촉탁의 등)로 근무하면서 진행된 연구성과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식민지 조선의 산부인과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던 구도 다케키(工藤武城)와 같은 경우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여성범죄의 특징을 비교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조선 각지의 형무소에서 협력을 얻어 여성 수형자를 대상으로 한 연구를 진행한 사례도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후쿠오카형무소에서도 수형자를 대상으로 모종의 의학적 연구나 실험이 행해졌을 가능성을 전면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는 더욱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앞서 살펴본 것처럼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자료를 왜곡해 가면서까지 끼워 맞추는 방식이 아니라, 자료를 바탕으로 충분한 검토와 검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승엽 팩트체커는 한국근대사와 근현대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다. 고려대와 교토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일본 붓쿄대학(佛敎大學) 역사학부 준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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