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생명, 음악의 민주화... 사카모토 류이치 혁명은 진행중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4.23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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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동료들과 YMO(Yellow Magic Orchestra)를 결성하고 미국에서도 음반을 발매해 빌보드차트에 진입했다. 1984년에는 데이비드 보위와 공연한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1983)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으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받는가 하면, 3년 뒤에는 세계 영화사의 명작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로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 그래미상을 함께 거머쥐었다.

이후 3년 주기로 이루어진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1990)의 골든글로브상 수상과 <리틀 부다(Little Buddha)>(1993)의 노미네이트, 최근 암투병중에 이뤄낸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2015)의 영국 아카데미상, 골든글로브상, 그래미상 동시 노미네이트 등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난 1월 66세 생일을 맞은 은발의 사내, 사카모토 류이치에게 ‘세계적인 거장'이라는 호칭은 너무 당연한 나머지 구태의연하다는 느낌이다.

하루를 분단위로 쓰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뉴스톱 인터뷰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올해는 그의 데뷔 40주년이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이력과 겹쳐지는 것은 오래전 며칠 밤을 새워가며 읽은 로맹 롤랑 장편소설의 타이틀 롤, 장 크리스토프의 생애다. 부정한 세상에 쉼 없이 맞서며, 예술적ㆍ인간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삶.

세계의 청년들이 “상상력에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던 시대, 고교생이던 그는 이미 고도 성장기를 틈타 고개를 쳐드는 권위주의교육에 반대하며 교장실을 봉쇄한 혁명아였다. 음대생(도쿄예대) 신분으로 클래식 음악계의 권위에 저항했고, YMO를 시작하기 2년 전 예술과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운동체(학습단)를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데뷔 이후에도 ‘개인주의적’이라는 자신에 대한 설명과는 다르게, 그는 동료 예술인들의 현실을 외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1990년 뉴욕으로 이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작 오페라 <라이프>를 발표한 1999년부터는 지구환경ㆍ반전평화 관련한 활동을 본격화 했고, 911테러 직후 반전평화사상을 담은 논고집, 『비전(非戦)』을 펴내는가 하면, 동일본대지진 발생 이전(2007년)부터 예술가 단체인 ‘아티스트 파워’를 이끌며 탈원전 운동을 벌여왔다. 음악가인 동시에 사상가로써 그의 이러한 위상은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2003)의 공동제작자로도 유명한 미국인 감독 스티븐 쉬블의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2017년 제74회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1978년 이래 데뷔 40주년을 맞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인생, 철학, 그리고 음악관을 들어봤다.

 

홍상현:

올해는 동일본대지진 7주기다. 재난지역 지원과 탈핵은 최근 당신의 행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사카모토 류이치:

전부터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아 대형 자연재해에 대해 공부하고,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메시지도 전해왔기에 보통 이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진과 지진해일의 가공할 위력을 목도하면서 새삼 스스로의 무지를 후회하고 나또한 자연의 일부로써,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지진해일로 물에 잠겼던 피아노로 작업도 하고, 얼마 전부터는 피해지역 학교의 악기들을 수리하는 자원봉사 등 피해지역 아이들과 함께하는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니 이제 참사의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을 것이다. 매일 자연과 인간문명의 갈등을 생각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원전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일부지만 대단히 취약할뿐더러 기술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치졸한 것이다. 더구나 한 번 망가지면 막대한 피해가 초래된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판매되어 도로를 달린다면, 모두들 분노하고, 정부에서도 인정하지 않겠지. 원전이 이런 것 아닐까.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이른바 ‘정상운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도 내내 폐기물이 쏟아져 나온다. 놓아둘 곳도 없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이런 것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거야말로 의사범죄(意思犯罪)에 가깝다. 마치 피아노를 만들 듯 원전 같은 반 자연적인 것을 만들어놓고 기뻐하는 인간이란, 참으로 신기한 동물이다.

평화헌법 수정반대 시위에서 연설을 하는 사카모토 류이치. 출처: 브런치

홍상현:

최근 행보에서 아베 정권의 전쟁법안에 대한 반대운동이 눈에 띈다. 이는 당신의 생명존중사상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내용을 음악으로 표현할 때도 있는가?

사카모토 류이치:

(당신 말대로) 나는 생명을 존중하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주의’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또한 그 이상으로 부정의와 불공정(unfair)에 분노한다.

예컨대 실즈(SEALDs: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학생 긴급 행동)의 젊은이들이 벌이는 운동은 우리(전공투 세대)가 청년이었던 40년 전을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보수적인 운동이다. 말 그대로 ‘보수주의’지.

젊은 시절 우리는 법률이든 조약이든 뒤엎어버리려고 했다. 과격했던 것이다. 하지만 실즈는 정치가들에게 헌법을 지키라, 민주주의를 지키라고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다. 전혀 과격하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통용되지 않으니 이상할 따름이다. 최소한의 당연한 기준 아닌가. 법안통과를 강행하거나 거짓말을 늘어놓고 국민을 속이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러한 내 개인적인 생각을 과연 어디까지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을 지는 무척 어려운 문제다. 음악과 사상은 ‘같지 않으니까(not equal).’ 음악은 한 장의 그림이나 한편의 시처럼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해서, 나는 내 음악을 정치적인 도구로 삼고 싶지 않다.

오래전 독일의 나치스는 음악이나 영화, 즉 문화를 프로파간다에 활용해서 국민들을 파시즘으로 몰아갔다. 나는 이 일에 강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나의 음악에 보잘 것 없는 나의 사상이 얼마나 반영되어 있는지 말하기보다,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음악가이든, 생선가게 주인아저씨든, 혹은 컴퓨터 프로그래머든, 당연히 부정을 싫어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고 믿을 뿐이다.

홍상현:

당신은 일본이라는 로컬에서 음악가가 되었으나, 궁극적으로 내셔널리즘을 넘어섰고, 그 결과 오늘날 세계인의 시선으로 아시아를 바라보며 살고 있다. 그런 입장에서‘아시아적인 것’에 대해 말해본다면?

사카모토 류이치:

행복하게도 나는 내셔널리즘에 물들지 않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대단히 자유로운 분위기의 가정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를테면 내 어릴 적 일본의 TV에서는 프로레슬링 경기를 자주 방영했는데, 다들 일본 프로레슬러를 응원했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정의의 사자인 역도산이, 사실 그 역도산도 한국 분이셨지만, 물리친다는 내용에 열광한 것이다. 나는 그게 싫어서 혼자 악역인 미국인 프로레슬러를 응원했다. 일본인이나 일본인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홍콩에 태어났으면 했다. 따로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영어와 중국어라는 두 가지 언어를 습득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또 한 가지의 어린 시절 꿈은 지구의 어디에 가든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거였다. 북극, 남극, 아프리카, 혹은 남미, 그 어느 곳에서라도.

대학(도쿄예술대학교) 시절에는 세계의 민족음악을 연구하던 고이즈미 선생님처럼 되고 싶었다(고이즈미 후미오는 일본을 대표하는 민족음악학자다. 일찍이 한국음악에 관심을 가져 1972년 한반도 각지를 돌며 다양한 음악을 녹음, 그 성과를 <아리랑의 노래>라는 음반에 담았다. 이런 은사의 영향 때문일까, 그는 자신이 김덕수의 35년 지기임을 음악감독을 맡았던 2017년 작 <남한산성>의 관련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정말 훌륭한 분이었다. 학자로서도 그렇지만 대단한 국제 감각의 소유자였고, 무엇보다 한 해의 절반은 세계를 돌며 현지의 음악을 연구하며 지내는 게 멋져서, 작곡을 그만두고 민족음악 연구자가 될까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다.

또한 내 아버지는 청년시절 징집되어 만주로 끌려갔다가 생환한 사람이다. 통신병이라 아무도 죽이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지만, 전쟁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목도했고 상관에게 온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폭행을 당했던 끔찍한 경험도 있었다.

나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내셔널리즘, 그리고 이를 종합해놓은 신도(神道)에 대한 혐오감이 엄청나게 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아무렇지 않게 일본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며 내셔널리즘을 계승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즈 같은 친구들도 있지만 과거의 죄, 역사를 모르는 일본인도 많다는 것이다. 이는 독일과 크게 다르다. 독일은 과거의 역사를 철저하게 가르치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률까지 만들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결국 나는 내셔널리즘에서 출발해‘인터내셔널’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심리적으로는‘일관되게 인터내셔널’이었지. 일본에 살며, 일본어 밖에 하지 못했던 때조차도 마음으로는 늘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시아의 감성, 사고, 사상은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하기에 나이를 먹을수록 이를 재검토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진다. 나의 감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선(禪)적인 요소나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태도 또한 선명해진다.

선은 중국에서 태어나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각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진화를 거듭하며 현지의 문화와 결합, 선적인 미의식ㆍ문화ㆍ스피릿(spirit), 즉, 크게 보면 ‘아시아적인’범주로 발전해나갔다. 그리고 최근 들어 특히 음악의 영역에 반영되고 있다.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 왼쪽부터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 호소노 하루오미.

홍상현:

2006년 당신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레코드레이블 커먼즈의 'think global, act local'이라는 슬로건을 접하는 순간, 이거야말로 ‘세계의 사카모토’가 도달한 최종기착지 아닐까하는 느낌이 들었다. (커먼즈ㆍcommmons는 아티스트ㆍ크리에이터ㆍ음악업계 유저의 공유지ㆍcommons 안에 음악ㆍmusic이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취지에서 세 개의 'm'이 들어간다)

사카모토 류이치:

원래 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라 누군가, 혹은 뭔가를 ‘위해서’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다음세대를 위해, 공공을 위해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는 편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아이도 생기면서 점차 사회에 대해 사고하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의 보급으로 음악을 듣는 환경이 변화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다. 뭐든 공짜로 들을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은 일면 내가 추구하던 바이자, 음악의 민주화라고도 할 수 있는, 실로 좋은 환경이다.

물론 창작자에게 아무런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음악에 대한 향유만이 이루어지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년 전에 만들어진 음악이든, 어제 만들어진 음악이든 똑같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의 민주화가 대단히 훌륭한 조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세대는 이렇듯 큰 혜택을 받고 있지만, 그 정보의 양이 워낙 많다 보니 선택을 위한 능력 또한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깨닫는 거겠지. 다만, 지금 유행하는 것들 중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 좋지 않은 음악ㆍ소리라고 느껴지는 것들도 없지는 않다. 조금 더 오래 인생을 살면서 음악을 업으로 해 온 사람으로서“이런 건 어때?”, “이런 것도 있다고”, “이런 데도 관심을 좀 가져보면 어떨까”하는, 형(오빠)으로써의 기분이랄까.

홍상현:

방금 말한 ‘음악의 민주화’는 음악이 개인의 창작물인 동시에 공공재이기도 하다는 당신의 신념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카모토 류이치:

한자는 2500~3000년 전 중국에서 만들어졌지만 오늘날 우리도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다. 또한 다른 언어의 문법 가운데서도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사용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몇 세대에 걸쳐 만들어온 문법과 어휘가 역사의 산물이듯, 음악의 언어에 대해 어디까지 카피라이트를 주장해야할지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겠다.

같은 맥락에서 창작물인 악곡(음악)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것을 구성하는 문법이나 어휘도 과거로부터 계승된 공공재다. 음악의 발전에는 바흐나 베토벤 같은 유명한 음악가 외에도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기여했다. 우리는 이것을 거저 쓰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알려져 있는 곡에는 작곡자의 이름이 붙어있지만, 수천, 수만 년 전에는 한 사람의 산물로 정의되지 않았다. 마을에서 소중하게 이어져 내려온 노래와 음악이 있어도 그것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하나의 마을에 하나의 멜로디가 있어, 그 멜로디로 잔치도 장례식도 치렀다. 어떤 음악에 개성이 부여 되고, 작곡자, 카피라이터가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최근에 나타났다. 카피라이트는 고작해야 대략 15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다. 인류사 전체를 기준으로 볼 때 지극히 짧은 기간이다. 또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 자체가 공공재라 할 수 있겠다.

홍상현:

다음은 평화의 문제다. 요즈음 한반도의 화해 무드로 인해, 긴장으로 치닫던 동북아 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반면,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중미대립, 유럽의 권위주의 회귀 등으로 인한 갈등의 가능성도 존재한다, ‘평화’를 삶의 중요한 화두로 삼아온 문화인으로써의 견해를 듣고 싶다.

사카모토 류이치:

20세기, 인류는 대량 생산, 대량 폐기의 흐름 속에서 쓰레기의 산을 쌓아올렸고, 자원을 낭비해 자연에 해악을 끼쳤다.

나는 21세기에 인류가 이런 문제를 자각해서 지난 세기에 생산해낸 쓰레기를 청소하고, 문명의 시프트(shift)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기대 속에서 맞이하게 된 것은 2001년의 9ㆍ11 테러였다. 세계는 몇 번이나 폭력의 시대로 회귀했다. 폭력, 보호주의, 일국주의, 차별의 극대화는 9ㆍ11 테러를 기점으로 하는데,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라, 이전부터 원인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제국주의,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학창시절 나는 코뮤니스트(communist)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각하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이 발전이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회의한다.

오늘날 일국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적지 않은 수는 세계자본주의의 희생자다. 자본은 보다 싼 노동력을 찾아 지구를 누비며, 그 와중에 산업은 피폐화한다. 그러니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 생활을 꾸리던 사람들도 위협을 느끼고 이민을 배제하려 하며, 일자리를 되찾아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일국주의ㆍ보호주의를 추구하고, 이를 부르짖는 지도자를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두는 결국 돈을 매개로 국경을 넘나드는 현실 자본주의와 관련되어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경제의 현실과 사람들의 실생활 속에서의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니 긴장이 고조되면 무조건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낡은 사고도 나타난다.

물론 그렇다고 미래에 대해 절망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다만, 오늘날 세계의 폭력적 흐름을 멈추기란 쉽지 않다. 전 지구적 대처가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환경문제도 온 인류가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듯이.

홍상현:

마지막은 질문은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 즉, 다음 세대에 관한 것이다. 인터넷과 SNS 등에 의해 현상계의 거리가 날로 좁혀지는 현실과 대조적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가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카모토 류이치:

일본의 경우, 젊은이들이 외국 음악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는다. 내가 젊었을 때는 사람들이 오히려 일본보다 외국 뮤지션의 음악을 선호했다. 하지만 요즘은 이를테면 신인 밴드가 어떤 유명 밴드처럼 되고 싶어 그들의 음악을 따라하다가도 그 단계에서 멈춰버린다. 정작 그 밴드는 영국과 미국의 밴드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은 케이스인데, 이런 부분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보호주의를 추구하는 경제가 보호주의를 추구하는 정신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문화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문제다. 미지의 대상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은 창조로 이어진다. 모르는 것을 접하고, 앎의 기쁨을 느끼는 것에서도 누구든 예외일 수 없다. 나는 내셔널리스트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난 이 땅의 아이들이 폐쇄적이 되고, 그것이 사회전반의 쇠퇴로 이어지는 것에 대해 우려한다. 이런 현상은 예컨대 음악, 공예 등에서 볼 수 있는 바람직한 전통을 이어가려는 적극성마저 잠식한다. 슬픈 일이다.

배타적인 태도는 무지로부터 비롯된다. 지식 없이는 이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선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이해하는 당연한 과정을 거치지 못하니 악순환이 이어진다. 우리는 좁은 곳에 스스로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

에스프레소를 한 잔하기 위해 가진 휴식시간에, 나는 그에게 단 하루도 비어있지 않던 일본 체류 스케줄 가운데 이제 겨우 창간 1주년을 맞는, 한국의 작은 인터넷 매체의 인터뷰를 위해 하나의 일정을 희생하는 호의를 베풀어준 이유를 물었다. 제호에 “진실 혹은 거짓(True or False)”이라는 표현을 명시할 만큼, ‘시대적 진실에 매달리려는’ 매체의 취지에 동감했다는 것 외에, 그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신이 스스로를 ‘일본인’이라고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같은 아시아인’으로써 한결 같이 응원해주는 한국인 친구들에게서 느낀 가슴 먹먹함에 대해 말해주었다.

숲 속의 현자와의 문답과도 같이 길고도 깊은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 그는 웅장한 교향곡의 연주를 마친 지휘자처럼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일국의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세계를 사는, 가장 지혜롭고 정의로운 영혼의 모습이었다. 문득 그와 동시대의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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