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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휘문고는 고시엔에 갔었다[최민규의 스포츠 팩트체크] ① 한국 고교야구의 고시엔 진출사

<고시엔과 조선야구 역사> 시리즈

1회: 1923년 휘문고는 고시엔에 갔었다

2회: '일선융화'에 활용된 고시엔 조선 예선

3회: 휘문고는 어떻게 조선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했나

4회: 휘문, 대만 다롄상업과 고시엔서 첫 대결, 그 결과는?

5회: 휘문고, 동맹휴학으로 1924년 고시엔 예선 출전 못하다

일본에서 매년 여름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고시엔구장에서 열리는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이하 고시엔ㆍ甲子園)는 단일 종목으론 세계 최대 규모의 아마추어 대회로 꼽힌다.

나가시마 시게오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은 “나는 항상 어떤 기회를 상실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대 스타로 꼽히는 나가시마지만, 고교 시절 한 번도 고시엔의 흙을 밟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 고시엔은 식민 본국인 일본 뿐 아니라 조선, 만주, 대만에서도 예선이 열렸다. 조선 예선은 1921년 시작돼 1940년까지 20년 동안 진행됐다. 매년 예선에서 우승한 1개 팀만 고시엔 본선에 진출했다. 최다 진출 팀은 5회의 경성 중학(현 서울고)이다.

1937년까지 조선의 중등교육기관은 고등보통학교(고보)와 중학교로 나뉘어져 있었다. 고보는 조선인 학생이, 중학은 일본인 학생이,다녔다. 고시엔 조선 예선을 통과한 학교 중 고보는 딱 하나밖에 없다. 1923년 조선 예선 우승을 차지한 휘문고보(현 휘문고)다.

1923년 고시엔에 출전한 휘문고보 야구부. 출처:나무위키 및 아사히신문

1923년 휘문고에 대해선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한국야구사>,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펴낸 <질레트에서 이영민까지> 등 서적에서 다루고 있다. 일본인 작가 가와니시 레이코가 펴낸 <전쟁 이전 외지의 고교 야구>에서 휘문고의 고시엔 진출이 다뤄진다. 이 책은 지난해 양두원의 번역으로 지난해 국내에서 발간됐다.

고시엔은 아사히신문이 1915년 창설한 대회다. 아사히신문은 100회 대회를 맞는 올해 ‘백구의 세기’라는 타이틀로 고시엔의 역사를 85회 분량으로 다룬 특집을 기획했다. 이 가운데 11회 분량은 1923년 휘문고를 중심으로 한 조선 예선에 할애했다. 고교야구 선수 출신이자 아사히신문 기자인 죠마루 요헤이 기자가 집필을 담당했다. 이 내용을 관련 자료를 취합한 해설을 곁들여 소개한다.

1923년 고시엔 대회는 효고현 나루오구장에서 열렸다. 지금 대회 장소인 고시엔 구장은 1924년 8월 완공됐다.

고시엔대회 조선 예선의 아이디어는 1916년에 나왔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 조선판은 3월 25일자에 “조선에서 전국중등학교 우승야구대회의 지방대회를 열자”는 제안을 했다. 오사카 도요나카 구장에서 제 1회대회가 열린 뒤 반년 뒤의 일이었다.

당시 아사히신문은 도쿄 아사히와 오사카 아사히로 나뉘어져 있었다. 오사카 아사히는 1915년 고시엔 대회를 창설했지만, 그 4년 전인 1911년 도쿄 아사히는 ‘야구는 일본인에 유해한 경기’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야구는 상대에게 속임수를 걸어 계략에 빠뜨리는 경기”, “야구 애호가는 매춘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 “야구는 일본의 교육제도에 적합하지 않은 운동”이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러일전쟁 사령관 노기 마레스케, 국제연맹 일본대사를 지내는 니토베 이나조 등이 대표적인 야구유해론자였다. 반면 게이오대학을 설립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스포츠는 교육의 일환”이라고 주장한 야구 옹호론자였다. 지금도 게이오대 야구부는 유명하다. 야구 무해론 입장을 폈던 요미우리 신문사는 1934년 대일본도쿄야구클럽을 창단한다. 이 구단이 지금의 요미우리 자이언츠다.

고시엔에서 승리한 팀과 패배한 팀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출처: 나무위키

오사카 아사히가 도쿄 아사히와는 정반대 입장에서 고시엔 대회를 창설한 건 아니러니다. 가와니시는 이에 대해 ‘오사카 상인 근성’을 이유로 들었다. 그리고 오사카 아사히는 제 1회 대회 개최 반 년만에 식민지 조선 예선을 공개 제안했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식민지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거부됐다. 대회 참가가 예정된 4개 교에 “학교 이름을 걸고 경기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통보를 했다. 그리고 오사카 아사히 경성(서울)통신부에 “조선은 과도시대에 있다. 학생야구 참여는 부적당해 보인다”는 설명을 했다.

당시 오사카 아사히의 나카오 기자는 이런 술회를 남겼다.

“내지인(일본인)과 조선인이 승패를 다투게 되면 통치에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학무국이 판단한 것 같다. 야구를 통해 융화가 빨라질 수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결국 (벽에) 부딪혔다.”

이에 대해 죠마루 기자는 “야구가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에 대한 대항심을 븍돋우는 것을 통치자는 두려워했다. 1910년 한국을 병합한 이래 6년.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강권 정치에서 사람들의 자유는 억압되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육군 대장 출신 데라우치는 1910년 3대 한국 통감에 취임했다. 8월 26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남산 관저로 불러 ‘한일합병조약’ 조약을 체결했다. 1주일 뒤 대한제국은 소멸하고 식민지가 됐다. 초대 조선 총독이 된 데라우치는 무단 통치로 철권을 휘둘렀다.

오사카 아사히가 ‘고시엔 조선 예선’을 제안했다 무산된 3년 뒤인 1919년 3월 조선 전역에선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에 참여해 희생된 조선 사람 가운데는 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많았다.

최민규 팩트체커  didofidomk@naver.com  최근글보기
2000년부터 스포츠기자로 활동했다. 스포츠주간지 SPORTS2.0 창간 멤버였으며, 일간스포츠 야구팀장을 지냈다. <2007 프로야구 컴플리트가이드>, <프로야구 스카우팅리포트>(2011~2017), <한국프로야구 30년 레전드 올스타> 등을 공동집필했다. ‘야구는 평균이 지배하는 경기’라는 말을 좋아한다.

최민규 팩트체커  didofidom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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