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융화'에 활용된 고시엔 조선 예선

  • 기자명 최민규
  • 기사승인 2018.05.23 03: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민규의 스포츠 팩트체크] ② 조선체육회 설립과 전조선야구대회

<고시엔과 조선야구 역사> 시리즈

1회: 1923년 휘문고는 고시엔에 갔었다

2회: '일선융화'에 활용된 고시엔 조선 예선

3회: 휘문고는 어떻게 조선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했나

4회: 휘문, 대만 다롄상업과 고시엔서 첫 대결, 그 결과는?

5회: 휘문고, 동맹휴학으로 1924년 고시엔 예선 출전 못하다

최초의 고시엔대회 조선예선이 열린 해는 1921년이다. 

조선총독부의 정책 변화와 관계가 깊다. 1919년 8월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이어 해군 대장 출신 사이토 마코토가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사이토는 초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부터 시작된 무단통치에서 선회해 보다 유화적인 식민지 정책을 폈다. 이른바 문화통치다.

문화통치는 조선의 스포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20년엔 조선체육회가 설립돼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다. 조선인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회였다. 일본들 선수들은 별도로 조선체육협회 조직하고 있었다.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이상재 선생(오른쪽)이 시구를 하고 있다. 출처:대한체육회

식민 본국인 일본도 다이쇼 데모크라시(1911~1925년) 시대였다. 오늘날 일본 아마추어 스포츠의 기본 틀도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 형성됐다는 게 통설이다. 덴노 가문의 황족들도 스포츠에 참가하는 장면을 대중에 스스럼 없이 노출했다.

전조선야구대회는 1915년 시작된 고시엔 대회에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다. 1920년 7월 13일 발기인 90여 명으로 발족한 조선체육회는 첫 사업으로 조선인들이 참가하는 최초의 전국 규모 스포츠 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이런 대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건 경험이 없는 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대회가 종합 대회가 아닌 야구 종목 경기로 결정된 이유도 비슷했다 야구가 채택된 이유는 이원용, 이중국 등 발기인들이 일본 고시엔 대회의 대회요강, 경기규칙, 심판규정 등을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 7월 5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 조선판에는 제7회 전국 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의 조선 대회 개최를 알리는 사고가 실렸다. 당시 고시엔 대회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다.

1916년 총독부 학무국은 통치 차원에서 ‘학교의 이름을 건 야구 경기 대회’를 금지했다. 하지만 1921년 새로 부임한 학무국장은 "야구는 장려하지는 않지만 금지하지도 않는다"는 입장을 당시 아사히신문에 밝혔다.

조건이 있었다. 박수 외의 응원은 금지됐다. 사전 등록된 정식 응원가는 허용됐지만 횟수와 시간에 제한이 있었다 <플레이볼>의 저자인 가와니시 레이코는 한 발 더 나아가 "사이토 총독 시대에는 ‘내지인 학교, 조선인 학교를 불문하고 일제히 야구부를 만들라’는 훈령이 하달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1922년 전국체육대회 야구(제3회 전조선야구대회) 대회 2일차, 배재구락부와 연희전문학교의 경기 모습. 출처: 동아일보

첫 대회에는 경성중, 용산중, 부산상업, 인천상업 등 4개교가 출전했다. 하지만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된 팀이었다. 우승은 부산상업이 차지했다. 부산상업은 1906년 부산의 일본인 거류민단이 세운 학교다. 해방 이후 경남상고로 교명을 변경했고, 지금 이름은 부경고다. 해방과 함께 야구부도 창설됐다. 한화 마무리 투수 정우람과 넥센 이택근이 이 학교 야구부 출신이다. 부산상업은 고시엔 본선에서 1회전은 통과했지만 준준결승에서 와카야마중학에 1-23으로 대패했다.

1922년 대회에는 부산중학이 참가해 조신 예선 출전교는 모두 5개로 늘어났다. 부산중은 1913년 3월 부산공립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했다. ‘부산일중’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아직 남아 있다. 1842년 조선인 학생이 입학할 수 있는 부산제2공립중학교가 개교한다. 지금의 경남고다. ‘태양을 던지는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전 국가대표 감독 장태영은 일제 시대인 1944년 경남중에 입학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일본인 학교인 부산일중에 대한 경쟁 의식이 잘 표현돼 있다. 

2회 예선 우승은 경성중(현 서울고)에 돌아갔다. 예선전 개막식에서 아리요시 주이치 총독부 정무총감은 다음 대회에는 조선인 학생들도 참가하길 바란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가와니시에 따르면 연설문 중의 한 문장은 이렇다.

“또한 이 대회가 일선융화에도 적잖이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하는 바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