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과 대등한 투쟁, 마푸체 제국을 '문명'에서 재현하다

  • 기자명 이경혁
  • 기사승인 2018.06.0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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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역사를 다루는 게임의 대표작이 된 ‘시드마이어의 문명’ 시리즈

인류 문명의 역사를 다뤄 온 게임 ‘문명’ 시리즈는 이제는 보편적인 상식의 범주 안에 들어갈 정도의 인지도를 쌓아온 듯 하다. 8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한 이래 늘 세계를 다루는 방식 중 독특하면서도 높은 완성도로 주목받았던 이 시리즈는 한국에서는 2013년의 ‘문명 5’ 발매와 함께 크게 유행을 탔는데, 이른바 ‘패왕 간디’ 밈 덕분이었다. 협박과 함께 유혈사태를 언급하는 평화주의자 간디를 다룬 인터넷 밈은 크게 인기를 끌며 ‘문명하셨습니다’ 와 함께 이 오래된 시리즈를 대중적으로 알려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가 아는 그 간디가 툭하면 핵을 쏘고 협박도 마다하지 않는 몇 장의 스크린샷 덕분에 '문명' 시리즈는 인터넷에서 비게이머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진 바 있었다.

실제 인류가 걸어온 길들을 그대로 따라해 보거나, 혹은 각 문명들의 특징을 가지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볼 수 있는 독특한 역사 시뮬레이션게임으로서 ‘문명’은 재미도 재미지만 역사와 시대를 재현하는 새로운 방법으로서도 많은 이들로부터 주목받는 게임이다. 어느새 6편이 넘어가는 정식 넘버링 시리즈를 이어 가는 ‘문명’ 시리즈는 그런데 최근 들어 매우 흥미로운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바로 탈중심화된 역사와 문명에 대한 관심이다.

 

탈중심 역사를 바라보는 ‘문명’ 시리즈의 흐름

최신 시리즈로 갈수록 ‘문명’ 시리즈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명권 밖의 이야기를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최초 1편에서 다뤄졌던 문명들은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그리스 등 선진국이거나 바빌론, 이집트, 아즈텍 등 역사 속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문명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문명들의 지도자 또한 거의 1:1로 대응하는 인물들이 선정되었는데, 미국은 링컨, 프랑스는 나폴레옹, 인도는 간디 같은 식이었다.

그런데 시리즈가 거듭되면서 점차 게임 ‘문명’ 시리즈는 기존의 교양 역사에서는 쉽게 접해보기 어려웠던 문명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특히 5편부터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아메리카 원주민의 쇼숀 부족장으로 포카텔로가 등장하는 식이다. 제도권 교양 역사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문명과 지도자들은 기존에도 아예 출연이 없지는 않았지만 5편부터는 그 비중이 적지 않은 편이다. 송가이 부족의 아스키아 무함마드가 어느 대륙의 문명 지도자였는지는 쉽게 알기 어려우며, 폴란드 문명의 카지미에시 3세라는 지도자는 처음 들어본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지만 ‘문명 5’에서는 나름의 포지션을 차지하며 등장한다.

최신작 6편에 이르면 그 경향성은 더욱 강해진다. 일본 문명의 지도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오다 노부나가가 아닌 호조 도키무네가 되었고, 한국은 확장팩에서 세종이나 왕건이 아닌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호주의 총리 존 커틴도 문명 지도자로 등장하며, 스키타이의 토미리스,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 크리 부족의 파운드메이커가 출연하는 ‘문명 6’은 상당 부분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역사와 문명을 들여다보는 데 적지 않은 공을 들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고 놀라운 문명으로 다뤄지는 것은 마푸체 문명의 라우타로일 것이다.

'문명 6'의 게임시작 화면에 등장하는 마푸체 제국. 강력한 정복문명으로 출연한다.

스페인을 끝까지 막아낸 남아메리카의 부족, 마푸체

‘문명 6’의 확장팩 추가 문명으로 첫 모습을 드러낸 마푸체는 남아메리카의 칠레-아르헨티나에 걸쳐 정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이다. 게임 안에서는 나름 강력한 전투 중심의 문명으로 등장하는데, 총독을 배정한 도시에서 생산한 군사 유닛은 전투에서 추가 경험치를 획득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고, 특히 상대 문명이 황금기일 경우 전투에서 추가 보너스를 받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선진 문명의 킬러로 대우받는다. 지도자인 라우타로의 특성으로 아군 유닛이 적 유닛을 처치하거나 적의 영토를 약탈하면 적 도시의 충성도가 떨어져 아군 도시로 복속하게 될 가능성이 올라가는 여러 모로 전투와 공격에 맞춰진 문명으로 마푸체는 게임 안에 나타난다.

이는 실제 마푸체가 상당한 전투 종족이었다는 점을 반영한 설정이다. 우리에게 남아메리카의 역사는 대체로 원주 종족인 마야나 잉카, 아즈텍 등이 스페인의 침략에 의해 무너지고, 그 식민지가 이후 독립하는 줄거리인데,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지화 과정에서 끝까지 항전해 내며 스페인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부족이 바로 마푸체다.

제국주의 침략 이전 남아메리카에서 최대의 확장 판도를 보이던 잉카 제국의 침공에도 맞서 독립을 지켜 오던 마푸체는 이후 스페인의 침략에도 적지 않은 희생을 치러 가며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치러 낸다. 오히려 잉카 등이 멸망하면서 마푸체의 세력이 더 확장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남아메리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말을 받아들여 목축의 대상을 바꾸고 이를 통한 기병대를 양성하여 본격적인 기동전을 완성하면서부터는 말론malon이라는 기병양식을 활용해 절대적으로 부족한 화약무기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혀 스페인군으로부터 크게 밀리지 않았다. 스페인도 마푸체와의 전투에서 발목을 잡히며 진창에 빠지는 것을 우려해 평화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양국간의 무역을 통해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형태의 관계로 마푸체와 스페인은 평화 체제를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페인의 세력이 약해지고 식민지 세력의 독립이 일어나면서 판도는 다시 한번 바뀌었다. 독립한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애초에 식민지가 된 적도 없었고 오히려 스페인과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유지하던 마푸체를 복속시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마푸체의 영토를 자국으로 복속시키고, 소수민족화된 마푸체를 자국 국민화하려고 시도했다. 이 갈등은 아직까지도 칠레-아르헨티나와 마푸체 간의 소수민족 문제로 남아 있으며, 지금도 적지 않은 분리독립 운동과 그에 대한 통제가 두 나라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마푸체의 전쟁지도자였던 라우타로의 젊은 시절(Triptych of "The young Lautaro" by Pedro Subercaseaux). ⓒwikimedia

게임, 소수민족과 복잡한 정치문제를 바라보고 재현하다

국가와 민족의 문제는 역사의 결과라는 점에서 손쉽게 어느 한 쪽의 입장만을 옳다고 손들어주기 어려운 측면을 갖는다. 마푸체의 경우 애초에 스페인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칠레-아르헨티나와 원래부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상호 교역중이었던 마푸체의 입장이 크게 다른데, 이는 특히 두 나라의 독립 과정에서 오히려 마푸체가 식민지 독립 이후 자신들을 탄압할 것을 우려하여 스페인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오랜 구원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관계임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타협이 어려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소수민족으로 별도의 국가 체제도 갖지 못한 상태에서 부족의 영토를 빼앗기는 마푸체의 입장은 아무래도 큰 목소리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소수민족의 문제에 봉착한 마푸체의 이야기를 다루는 미디어도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의 주요 등장 문명으로 마푸체가 올라왔다는 사실은 여러 모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소수민족 마푸체의 입장, 혹은 남아메리카 식민지화와 독립의 과정에서 벌어졌던 맥락들, 그리고 게임이라는 매체가 세계를 바라보고 재현해 내는 방식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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