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는 죄가 없다' 오가타 타카오미 감독 "죄책감 남는 영화 만들고 싶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7.22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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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반문이었다. 한국어 문장으로 바꿔봐야 고작 한 줄밖에 되지 않는 일본어 질문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다. 7월 12일 목요일 늦은 밤 필자는 김봉석 부천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와 영화제의 월드 판타스틱 블루 섹션 초청작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의 감독 오가타 타카오미 사이에 서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 검은 모자와 뿔테안경. 영화감독이라기보다 어쩐지 기타케이스를 매고 있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이 청년예술가는 자신의 영화를 ‘판타스틱’ 영화제에 초청된 이유를 물었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 오가타 타카오미 감독(본인 제공).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할 수 없는’ 질문은 아니지만, 레드카펫의 화려함에 모두 들떠있는 개막식 리셉션장에서 초청작 감독이 잘 하는 편은 아닌 질문. ‘범죄’라는 소재 때문이었다는 말을 전하자 그는 간단한 통역을 해준 필자에게 꾸벅 인사하며 ‘소녀는 몇 번이나 살해당한다’라는 카피가 적힌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의 홍보자료를 건넸다. ‘학원고어물인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정확히 사흘 뒤, 필자는 상동의 한 비어홀에서 오가타 감독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영화를 보았기 때문이다.

수도권 중소도시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이른바 호감형 외모를 가진 히토미는 SNS에서의 소소한 명성을 즐기는 평범한 소녀. 하지만 어느 날 같은 학교 교사가 촬영한 원조교제 동영상의 주인공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철저하게 추락한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 굶주린 사자처럼 그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가운데, 동료와 남자친구, 심지어 가족들까지 등을 돌린다.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만신창이가 되어 극단적 선택을 한 그녀에게 수도 없이 2차 가해를 저지르는 매스미디어다.

오가타 감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하는 것은 이 모든 서사가 영화라는 시각매체가 청소년기 여성을 다룰 때 흔히 빠질 수 있는 ‘성적 착취(sexploitative)’의 유혹으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 채 전개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시 닷새 후. 그는 아시아영화인들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넷팩상(NETPAC Award)을 거머쥐었다. (<아임 크레이지>의 쿠도 마사아키 감독과 공동수상)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의 한 장면

홍상현:

아시아영화진흥네트워크가 주는 넷팩 상 수상을 축하한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의 어떤 부분이 어필한 것 같은가?

오가타 타카오미:

작품이 오락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까닭에 솔직히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관객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염려했다. 하지만 관객의 반응이나 질문 내용을 접하면서 한국 영화팬들의 높은 독해력에 놀랐고, 불안도 사라졌다. 게다가 이렇게 귀한 상까지 주시니 정말 기쁘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는 오늘날의 일본 사회와 일본인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지만, 해외영화제에서의 반응을 통해 이것이 세계 공통의 문제임을 실감했다. 아시아 국가에서의 여성 인권 현실을 다룬 점이 어필하지 않았나 싶다.

 

홍상현:

부천에 와서 수상을 하게 되었으니 한국영화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오가타 타카오미:

비단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식이라고 생각하는데, 한국영화 가운데는 엔터테인먼트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춘 뛰어난 작품이 많다. 특히 사회에 호소하는 작품들의 경우 나 자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계속 다시 보고 있으며,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와 황동혁 감독의 <도가니>(2011)도 마음에 든다. 특히 <도가니>의 공개를 계기로 장애여성과 13세 미만 아동에 대한 성폭력의 처벌을 강화하고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도가니법’이 제정된 사실은, 영화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내게 큰 격려가 되었다.

 

홍상현:

고교를 중퇴한 뒤 친구와 사업을 하다 퇴사하고 해외를 떠돌았다. 그리고 영화학교에 입학했다가 3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누가 보더라도 ‘무난함’과 ‘평범함’을 강요하는 일본사회의 규격화된 인간형과 다른 삶이다.

오가타 타카오미:

오히려 그런 경력이 ‘무난함’과 ‘평범함’이 강요되는 일본 사회를 부감(俯瞰)하고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홍상현:

데뷔작인 <네버엔딩블루>(각본ㆍ감독ㆍ촬영)부터 모든 작품이 영화제에 나갔다. 독학으로 영화를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오가타 타카오미:

공부의 기본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특히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일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를 보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감독은 영화 외에도 예술과 세계정세, 사회문제 등 모든 분야에 정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 한 장면.

 

홍상현:

뭔가, ‘천재’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오가타 타카오미:

그런 표현은 내게 맞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죄스럽기까지 하다. 단지 만들고 싶어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뭔가를 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의 일환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 마음이 누구보다 강하다는 점이 작품에 대한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홍상현:

데뷔작의 연출의도에 대해 "다 본 뒤에 무력감, 죄책감, 불쾌감이 남았으면 한다"고 밝혀 화제가 되었다. 그런 예술관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오가타 타카오미:

영화가 그리는 내용이 영화 속 사건으로 끝나버리거나, 관객들이 사는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로 생각되지 않도록 ‘죄책감’, ‘불쾌감’이 남는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내 안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편견과 차별, 그런 나에 대한 경각심 또한 작품에 담아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홍상현: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했던 꿈과 관련이 있나?

오가타 타카오미:

물론 있다. 또한 사회를 풍자하는 회화를 좋아해서 내 스스로 사회를 냉소적으로 보는 면도 있다.

 

홍상현: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가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궁금하다.

오가타 타카오미:

이전에 발표한 세 작품은 주인공만 묘사하는 1인칭 영화였지만 이번에는 주인공을 둘러싼 사람들을 집단으로 묘사했다. 요즘은 개인으로서의 인간보다 집단으로서, 사회로써의 인간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에게는 죄가 없다' 한 장면.

 

그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책 제목이 하나 있다. 출판된 지는 85년 전, UC버클리에서 나온 1957년판을 읽은 지도 20년이 훨씬 넘는 까닭에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대부분 가물거리지만 제목이 주는 강렬함만으로 먼지 쌓인 서가 앞을 지나던 필자를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던 예술심리학자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의 『예술로서의 영화(Film as Art)』.

그리고 아동학대 문제를 다룬 전작 <자궁에 잠기다>(2013) 이후 4년의 ‘공백’이, 실은 기획ㆍ각본ㆍ제작ㆍ연출ㆍ배급ㆍ홍보 전 분야를 도맡아 하는 까닭에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데 긴 시간이 걸리는 상황에서, 시나리오 집필을 위한 조사 및 취재에 비교적 훨씬 많은 시간을 할애한 ‘제작기간’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 영화 전공으로 학부에 대학원 과정까지 다니면서도 ‘영화는 산업’이라는 선생들의 정의(定意)를 문제 삼을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필자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녀의 애증을 통해 육아와 개호의 문제를 다룬 극영화와 미를 주제로 한 뮤지컬 스타일의 작품을 준비 중이라는 그의 향후 기획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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