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무라 다카시 "27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위안부 문제 보도하겠다"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18.08.1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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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작은 열쇠이다. 우리 모두는 열쇠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다른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는...”

도쿄에서 그와 인터뷰를 진행하는 내내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 한마디가 맴돌았다. 배우 황정민이 20년 연기인생을 돌아보면서 “인간 황정민에게 의미가 남다른 작품”으로 꼽았던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의 대사다.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머리에 박힌 총알이라는 ‘비극의 잔해’를 넘어, 불길에 휩싸인 집으로 뛰어 들어가 끝내 겁에 질린 소녀를 구해내는 이 ‘슈퍼맨’은 이 곱슬머리에 하와이언 셔츠를 입은 평범한 30대 남자의 모습이다.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현 가톨릭대 초빙교수. 촬영은 다카나미 아츠시 아사히 신문 기자

지난 5월 15일 석은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로부터 제24회 김용근 민족교육상을 수여받은 우에무라 다카시 교수의 모습은 이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퇴근길 선술집에서 한두 번 마주칠 법한 이미지에 선해 보이는 눈빛이 특히 인상적인 그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일하던 27년 전인 1991년 8월 11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기록한 고(故)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의 증언을 최초로 보도했다. 이후 경향신문을 필두로 한국 언론이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국제적인 인권이슈가 되었다. 우에무라 기자의 용기 있는 첫 보도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공론화의 '열쇠'였다.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모진 풍파를 겪었다. 한국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사랑하는 딸마저 고통을 당했다. 하지만 필자와의 대화에서 ‘의인’ 정도의 표현만 등장해도 그는 극구 손사래를 쳤다. 모국어를 잘 하느냐고 물어봐도 열에 아홉은 ‘아니’라고 대답하는 일본식 예법, 즉 ‘원려(遠慮)’가 아니었다. ‘기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는데 무엇 때문에 칭송까지 받아야 하느냐’는 의미였다.

1991년 8월 11일 아사히 신문 사회면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학순 할머니의 인터뷰가 실렸다.

홍상현:

요즘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 보도를 ‘거짓’이라 매도하는 세력과의 소송 때문에 바쁘다고 들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느라 체력적으로도 힘드실 텐데.

우에무라 다카시:

월요일과 화요일에 수업을 하고 수업이 없을 때 재판을 준비하거나 일본에 다녀오는데 확실히 두 나라를 오가다 보니 힘에 부치기는 한다. 하지만 이 일에는 내 명예뿐만 아니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도 걸려있고, 무엇보다 일본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 생각하기에 질 수 없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피곤해도 힘을 내려고 한다.

게다가 삿포로와 도쿄에 계시는 약 270명에 달하는 변호인단과 지원자 분들이 나를 붙잡아주고 격려해주신다. 작년과 재작년에는 휴가를 이용해 일본 각지에서 강연도 했다. 올해 9월 5일에는 도쿄소송에서 본인진술이 있고, 11월 9일에는 삿포로소송의 선고가 예정되어 있다. 큰 고비가 될 것이다. 열심히 준비 중이다.

 

홍상현:

대학 시절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도 참가하고, 1987년에는 한국유학까지 하셨다. 기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재일코리언 등 일본 사회의 마이너리티 문제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많이 쓰셨다. 마치 한국의 386세대를 연상시키는 경력인데?

우에무라 다카시:

나는 가족이라고는 어머니 한 분 뿐인 빈한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열심히 일해 나를 키우셨다. 그런 이유도 있어서인지 어린 시절부터 항상 약자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다. 차별이나 인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고. 재일코리언에게 눈을 돌린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차별받는 쪽, 인권침해를 받는 쪽에 서는 기자가 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위안부 문제 취재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홍상현:

심지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선고 당시, 신군부를 비판하는 글도 쓰셨다.

우에무라 다카시:

1981년 1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이 확정된 직후 국무회의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이루어졌다. 신군부도 원래부터 조작된 사형판결이라는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해 바로 감형을 한 것 아니겠나.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신군부를 비판하는 글을 《아사히신문》에 기고해“김대중 씨는 무죄다. 그의 자유가 회복되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에서도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라”는 여론이 대세였고, 한국의 군사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김대중 씨 석방 운동까지 일어났다. 내가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이 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1997년 12월 19일 아사히신문 1면 머리기사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전하는 기사를 썼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홍상현: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처음 들었을 때 이 보도가 선생의 삶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했나?

우에무라 다카시:

전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인권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위안부 문제에 매달렸다. 1990년 여름 2주 동안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찾아다녔지만 만날 수 없었다. 그래서 실패로 마무리 되나 싶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아사히신문》 서울 지국장이 피해 할머니가 증언을 시작하셨다는 정보를 전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청취조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흥분에 휩싸여 오사카에서 곧장 서울로 건너갔다. 정대협의 윤정옥 공동대표님이 조사 내용과 함께 증언 테이프를 들려주셨다. 나중에 김학순 할머니의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당시에는 성함을 알 수도, 본인과 직접 만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46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가 증언을 시작하신 것은 일대사건이라는 판단으로 글을 썼다. 기사는 《아사히신문》 오사카 본사 판 1991년 8월 11일자 조간 사회면 톱기사로 실렸다.

아사히 신문 보도 이후 한국언론이 위안부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위안부임을 밝힌 김학순 할머니를 인터뷰한 1991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

홍상현:

선생이 기사를 쓸 당시까지 위안부 문제를 본격적인 의제로 다룬 언론인은 없었다. 게다가 《아사히신문》은 과거 우익세력으로부터 습격을 받은 경험도 있는 신문사다. 신변에 위협이 가해질지도 모른다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우에무라 다카시:

그런 부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젊었고, 정의감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기자가‘신변의 위협’따위를 두려워하면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게다가 김학순 할머니께서 직접 나서 증언하시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이 제기되면서 일본 언론들도 일제히 위안부 문제를 보도하게 되었다. 지금은 위안부의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우익매체 《산케이신문》조차 당시에는 김학순 할머니를 취재하면서 일본군에 강제 연행된 사실을 보도했을 정도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반동(backlash)이 시작되면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려는 움직임에 대한 우익의 공격도 거세졌다.

 

홍상현:

《아사히신문》을 그만두고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부임하는 학교마다 우익의 협박이 가해졌다.

우에무라 다카시:

위안부 문제가 국제이슈화한 것은 내 기사가 나간 지 3일 뒤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몸소 나서서 기자회견을 하시고, 그런 선생의 용기에 힘을 얻은 다른 할머니들이 줄지어 증언에 나서주셨기 때문이다.

그러건 것이 2014년에 이르러 공격을 받게 된다. 《주간문춘(週刊文春)》 2014년 2월 6일자에서 내가 고베 쇼인(松蔭)여자학원대학교로의 전직이 결정된 사실을 다루면서 나를 “‘위안부 날조’ 《아사히신문》기자”라며 비방한 것이다. 우선, 부임할 예정이던 학교에 “우에무라를 고용하지 말라”는 항의 전화와 팩스, 메일 등이 쇄도했고 대학 측과의 합의를 통해 나는 강사직을 포기해야 했다.

《아사히신문》 퇴직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으므로, 기자로 일할 때부터 계속 출강하던 호쿠세이가쿠엔(北星学園)대학교를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나는 강의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거기까지 항의 전화와 메일이 쇄도했다. 정말 괴로웠다.

2015년 1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주일 외국 특파원단 기자회견에서 본인의 기사를 보여주는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 신문 기자

홍상현:

특히 따님의 사진을 보내고 실명을 거론하면서 협박한 사람도 있었다. 따님으로부터 원망을 들은 일은 없는가.

우에무라 다카시:

아사히신문이 2014년 8월 5일 위안부 문제 검증 기사를 게재했는데 거기서 나에 대해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다”고 언급해주었다. 이제야 명예회복이 되나보다 싶었는데 며칠 뒤 딸이 내방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트위터에 나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다. 트위터의 확산력이 얼마나 무서운데”라고 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사실 나는 인터넷상에서 딸의 사진이 도배되고 “자살할 때까지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뭐야 꼭 조선인처럼 생겼네. 혼혈이니까 당연한 건가”같은 혐오발언이 나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딸이 걱정되어 차마 말을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딸아이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무엇보다 대견한 것은 그 아이가 이 일과 관련해서 내게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내 앞에선 그렇게 밝고 씩씩하던 딸아이도 여성변호인 앞에 가자 끝내 굵은 눈물을 쏟더라.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내내 참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로써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었다.

아이를 위한 변호인단이 구성되고 트윗을 올렸던 남성을 파악해 도쿄지방법원에 제소했다. 법원에서는 화해를 권고했지만 딸아이는 판결을 내려달라며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이 일을 판례로 더 이상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결국 도쿄지방법원에서 승소했다.

당시 겨우 고등학생이었는데.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많은 용기를 얻었다.

 

홍상현:

선생의 인품을 생각하면 본인보다 제자들이 안전을 위협하는 협박편지를 받았을 때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물론 지지해주신 분들도 많았겠지만.

우에무라 다카시:

학교에 폐를 끼친 일에 대해 늘 미안함이 있다. 나 때문에 경비를 위한 비용까지 따로 책정해야 했다. 북쪽 지방의 그 작은 학교까지 사건에 휘말리게 만들고 보니 너무 괴로웠다. 당시 나를 지원해주시던 어떤 분이 그 일과 관련해서 2014년 9월 학교에 응원 메일을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런 움직임이 점점 확산되면서 대학교수,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지지마라! 호쿠세이 모임”이 결성되었다. 언론 중에서는 리버럴(liberal) 논조의《주간 금요일》같은 잡지가 문제를 다루어주었다. 모임이 결성된 후부터 나나 딸아이에 대한 혐오발언을 용납할 수 없다는 내용의 사설이 일간지에 게재되는 등 점차적으로 지원영역 또한 확장되어갔다. 그리고 삿포로에서 약 100명, 도쿄에서 약 170명이라는 대규모의 변호인단이 꾸려졌고 2015년 1월 도쿄, 같은 해 2월 삿포로에서 명예훼손 소송이 제기되었다.

 

홍상현:

서른 세 살의 정의감 넘치던 저널리스트도 어느덧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 기사만 아니었다면 아무런 문제없이, 안정된 직장에서 일본의 엘리트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마지막으로 좀 구태의연한지 모르겠지만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을 해야겠다. 만약 다시 27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하겠는가.

우에무라 다카시:

틀림없이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당시 일본의 부끄러운 과거를 보도했다.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직시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기억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해 펜을 들었을 따름이다.

인권과 평화를 지키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사명이다. 취재활동ㆍ보도는 그 일환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사 때문에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날조'를 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보도해서였으며, 이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뿐이다. 게다가 이 시련은 다양한 만남이라는 선물도 주었다.

위안부 보도 이후 우에무라 다카시 가족은 살해 협박을 받았다. SBS 화면캡쳐.

사실이었다. 우에무라 교수가 탄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뉴욕타임스》가 보도하자, 미국의 연구자들이 움직였고, 그는 시카고, 뉴욕, 프린스턴, UCLA 등 여섯 개 대학을 돌며 모두 합쳐 여덟 차례의 강연을 했다. 물론 그 자신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우익세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의 강연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안부 문제로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일본에서 혐한감정으로 인한 헤이트스피치가 만연하는 현실과 관련, 그는 두 나라의 언론보도에도 책임이 있다는 지점에 주목했다. 고심 끝에‘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한ㆍ일 학생들의 상호교류’라는 아이디어를 내었고, 그런 우에무라 교수의 취지에 일본 신문노련(일본 신문노동조합연합)과 일본저널리스트회의(JCJ)의 동료들이 동참하면서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한ㆍ일 학생포럼'이 결성되었다.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진행된 1회 행사는 대성황이었다. 두 나라 학생들이 합숙하면서 토론을 진행했고, 함께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가 하면, 박원순 서울시장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다.

올해 8월 초 히로시마에서 열린 2회 행사에서는 한국인 징용 피해와 피폭 문제가 다뤄졌다. 우에무라 교수도 줄줄이 걸려있는 재판일정을 제쳐두고 달려갔음은 물론이다. “만남이라는 혜택을 청년교육이라는 새로운 활동으로 연결시키는 한편, 단순히 내게 가해진 공격에 대항할 뿐 아니라 진정한 한ㆍ일 두 나라의 가교역할을 해내고 싶다”는 뜻을, 친구처럼 편안한 선배의 모습으로 전하는 그는 분명 올해에도 수많은 미래의 ‘우에무라 기자들’과 만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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