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도, 문재인도 아니다. 원조는 오바마 이전

여성비서관과 함께한 대통령 사진의 역사

  • 기사입력 2018.08.29 06:37
  • 최종수정 2018.08.30 14:50
  • 기자명 김준일 기자

"청와대가 트럼프 사진 베꼈다"  vs "청와대 사진이 빨랐다"

최근 뜬금없이 대통령 사진 '원조 논쟁'이 불거졌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22일 청와대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대통령과의 점심식사>라는 게시물을 올렸다. 청와대 여성비서관 5명과 문재인 대통령이 식사를 한 뒤 여성현안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여성 불평등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분노한 여성들이 늘자 이를 달래기 위해 마련된 자리로 해석됐다. 

이에 대해 전 새누리당 의원인 강용석 변호사는 8월 25일 페이스북에 "쇼를 한다"며 청와대를 비판했다.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사인을 할 때 여성비서관이 쳐다보고 있는 사진의 원조는 트럼프 대통령인고 문재인 청와대가 사진을 베꼈다는 취지였다. 구도는 물론, 여성 보좌진의 키와 체격까지 비슷하다고 주장도 했다.

언론이 끼어들었다. 중앙일보는 25일 강 변호사 페이스북을 인용해 '강용석 靑 여성비서관 만난 문 대통령, 쇼를 하다하다…”'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추가 취재한 내용은 없고 강 변호사가 주장한 내용이 기사의 전부다. 중앙일보 보도 뒤 타 언론들이 받아쓰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26일 '강용석, 女비서관에게 둘러싸인 文대통령 사진에 "쇼를 하다하다…"'란 기사를 게재했다. 중앙일보 기사와 구성 및 워딩까지 비슷했다. 다만 이준석 바른미래당 당 대표 후보가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를 공유했다는 것이 유일한 새로운 내용이었다. 

언론보도가 줄을 잇자 청와대가 "팩트체크"라며 페이스북에 해명글을 올렸다. 해당 사진 촬영 시점을 보면 청와대 사진이 백악관 사진보다 빠르기 때문에 베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청와대 페이스북에 따르면 청와대는 해당 사진을 22일 오후 1시 50분에 촬영했고 백악관은 23일 오전 4시 41분에 촬영했다. 

이후 중앙일보는 청와대 해명을 담은 靑 “트럼프 사진 더 늦게 공개돼”…강용석 “내 지적 아팠나”란 기사를 내보냈고 다른 언론들도 청와대와 강 변호사의 공방을 진실게임처럼 보도했다. 그런데 언론보도가 쏟아졌지만 이런 사진의 원조가 누구인지 취재한 언론은 한 곳도 없었다. 정말 강 변호사 주장대로 문재인 청와대가 트럼프 백악관을 베낀 것일까? 아니면 청와대 주장대로 단독 작품일까? 사실 여성보좌진이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사진은 트럼프만의 것도, 문재인만의 것도 아니다. 최소 수십년전부터 관행적으로 쓰였던 사진 구도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 중 사진 연출을 가장 잘 한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는다. 소탈한 대통령, 소통하는 대통령이란 이미지 있었던 오바마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백악관 사진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백악관 청소부와 손을 마주치는 아래 사진이다. 화제가 되어서인지 보수진영이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이 사진을 사용했는데, 당시 폭스뉴스는 이 사진을 가리키며 '테러리스트의 첫 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바마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 찍은 사진을 통해 '소수자를 대변하는 정치인'이란 이미지를 강화했다. 특히 여성과 찍은 사진이 많은데, 주로 여성의 권익신장을 위한 법안이나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연출한 것이다. 아래 사진들은 법안에 서명하는 오바마 대통령과 뒤에서 오바마가 서명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여성들을 담은 사진들이다. 

2014년 4월 8일 '동일임금의 날'을 맞아 버락 오마바 대통령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동일임금법 이행 강화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백악관

 

2009년 7월 1일 버락 오마바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여성 공군 파일럿에 명예금메달을 수여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출처: 백악관

 

2014년 1월 22일 버락 오마바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대학 성폭행 방지 대통령 교서에 서명하고 있다. 출처: 백악관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도 이런 사진의 원조가 아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도, 빌 클린턴 대통령도 비슷한 서명식 사진을 연출한 적이 있다. 주변 보좌진이 모두 여자는 아니었지만 여성이 주요 위치에 서 있어 주목을 끌었다. 

2006년 1월 5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여성폭력금지 법안에 서명하면서 위의 사진과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한 바 있다. 제일 왼쪽에는 퍼스트 레이디 로라 부시가 서 있다. (저작권 문제로 링크로 대신합니다.) 빌 클린턴 대통령도 1996년 실종아동에 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뒤에 여성과 아이를 배치했다(링크). 심지어 케네디 대통령도 백악관 여성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공개한 적이 있다. 모두 부드럽고 자상한 대통령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연출된 사진이다.

출처: 미국 JFK 도서관

이런 사진의 원조가 트럼프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강 변호사는 트럼프가 원조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페이스북에 글을 계속 올렸다. 어떻게 해서든 '트럼프를 베낀 문재인'이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명백히 보인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중요한 질문이 하나가 빠져 있다. 청와대가 백악관 사진을 참고해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면 안되는 것일까? 대통령 사진은 레퍼토리 한계 때문에 비슷할 수밖에 없다. 기자회견, 업무보고, 접견, 서명식, 국민의례, 해외순방 등이 반복되며 일종의 루틴이 된다. 게다가 한미 양국은 대통령제를 도입한 민주주의 국가라는 공통점이 있고 우방으로 오랫 동안 교류를 해왔다. 대통령 사진 구도가 닮는 것은 당연하다. 필요하면 다른 나라 사례를 참고해 연출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대통령 사진에 얼마나 공감했느냐다. 장충동 족발타운을 가면 모두가 '원조, 진짜, 최초' 족발집이란 간판을 달고 있다. 마케팅 차원이다. 강용석 말대로라면 대통령 홍보사진에도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어야 하는 것일까.

이와 관련, 박상현 메디아티 콘텐츠랩장이 페이스북에 분석 글을 썼다. 박상현 랩장은 청와대 사진은 잘 연출된 사진이 아니라고 평가했다. 대통령에게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직원에게 눈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묻는다. 박근혜 청와대는 왜 그렇게 '후진 연출' 밖에 못했냐고. 그게 그 정권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연출이었기 때문이다.

#평가

이 논쟁에 참여한 플레이어들에 대해 평점을 내리고자 한다. 평가기준은 성실성과 독창성이다. 객관적이어야 할 팩트체크 기사에 이런 포맷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아래 부분은 스킵하시길 권한다.  

청와대: B+
해당 사진은 연출한 것인가, 연출 안 한 것인가. 정혜승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연출한 적 없다고 페이스북에서 주장했지만, 저 사진은 연출이 들어가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구도다. 대통령 서명식이 있는 날도 아니고 저 구도로 비서관들이 서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연출을 인식 못했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사진이 찍혔을 가능성도 있다. 최근 청와대 사진을 보면 '교과서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떠오른다. 여기서 교과서는 오바마 대통령 사진을 말한다. 오바마와 비슷한 콘셉트와 구도로 찍은 청와대 사진이 차고 넘친다. 청와대도 오바마 사진의 영향력에 대해 부인 못할 거다. 그런데 청와대는 오바마 사진을 뛰어넘는 작품을 아직 보여주질 못했다. 성실하지만 정체됐다. 

 

강용석: C-
강용석 변호사는 전직 국회의원이다. 그래서 정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모르는 게 많다. 정치 홍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건과 관련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면 깊이도, 내용도 없다. 팩트가 틀렸다는 청와대 지적을 받아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트럼프 사진을 들고 와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성실하지도 못했고, 내용도 부실했다. 낙제점이지만 전투력은 높이 샀다.

 

중앙일보: D
SNS 베껴서 기사화하는게 주 업무인 인사이트와 중앙일보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최소 이 사건에서는 차이가 없다. 중앙일보의 유일한 미덕은 기자가 열심히 '페이스북 마와리'를 돌다가 강용석 글을 발견하고 '복붙'해서 기사를 작성한 것이다. 중앙 기사는 의미있는 논쟁으로 이끌려는 노력이 부족했다. 다만 시간차 단독보도(?) 성과는 인정했다.

 

조선일보 외 언론들: F 
이 사건과 관련, 독자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담은 기사를 단 한개도 발견하지 못했다. 언론들이 기사를 쓴 이유는 둘 중 하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고 싶었거나, 페이지뷰를 올려 한푼이라도 벌어보고 싶었거나. 뭐가 됐든 낙제점이다.

 

이준석: B+
이준석 바른미래당 당 대표 후보는 강용석의 페북 글을 공유했다가 욕을 먹은 케이스다. 청와대 비판 글이 올라오니 빨리 공유하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한 것 같다. 나름 소셜미디어에서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서 경솔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다음이다. 청와대 팩트체크가 나온 뒤 본인의 잘못을 인정하고 페이스북에 사과글을 올렸다. 정치인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원래 C를 주려고 했으나 사과의 진정성을 느껴서 등급을 올렸다.

 

김준일   open@newstof.com  최근글보기
2001년부터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주로 사회, 정치, 미디어 분야의 글을 썼다. 현재 뉴스톱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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