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문, 대만 다롄상업과 고시엔서 첫 대결,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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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문, 대만 다롄상업과 고시엔서 첫 대결, 그 결과는?
  • 최민규
  • 승인 2018.09.0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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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규의 스포츠 팩트체크] ④ 1923년 고시엔과 동아시아 야구

<고시엔과 조선야구 역사> 시리즈

1회: 1923년 휘문고는 고시엔에 갔었다

2회: '일선융화'에 활용된 고시엔 조선 예선

3회: 휘문고는 어떻게 조선 최초로 고시엔에 진출했나

4회: 휘문, 대만 다롄상업과 고시엔서 첫 대결, 그 결과는?

5회: 휘문고, 동맹휴학으로 1924년 고시엔 예선 출전 못하다

고시엔대회의 명칭은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다. 올해는 100주년을 맞아 ‘기념 대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키타현 공립학교인 가나아시농고의 돌풍으로 유료 관중이 사상 처음으로 1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열기였다. 일본 전역에서 56개 고등학교가 지역 예선을 거쳐 참가했다. 

Summer_Koshien_2009_Final ⓒwikimedia

휘문고가 참가했던 1923년 대회의 참가 학교는 19개였다. 당시 대회 명칭은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 ‘전국’은 지금의 일본 영토만을 가리키지 않았다. 일본에서 16개교, 만주와 대만, 조선에서 각 1개교가 지역 예선을 통과했다. 만주의 다롄상업은 2년 연속 출장이었다. 만주는 조선과 같은 1921년 대회부터 고시엔 지역 예선이 열렸다. 대만에선 타이베이1중이 처음 참가했다. 대만 대표의 고시엔 첫 출전이었다. 가와니시 레이코의 <플레이볼>은 주최사인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중역 시모무라 히로시가 대만 체육회에 권유한 결과로 기술하고 있다. 시모무라는 대만 민정 장관을 지냈고 대만 체육회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 대회는 일본의 세 식민지에서 모두 대표가 나왔다. 하지만 전원 식민지 출신 학생 선수로 구성된 팀은 휘문이 유일했다.

다롄상업은 1910년 동양협회 만주지부가 세운 야간부 상업학교다. 민간 단체처럼 보이지만 이 협회 지부장은 관동주 행정기관인 관동도독부 장관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뒤 포츠머스조약으로 일본은 러시아의 조차지인 요동 반도를 넘겨받아 관동주로 명명했다. 관동주는 1932년 일본제국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으로 영유권이 이전된다. 다롄은 만주의 실질적인 지배 기관으로도 평가되는 남만주철도회사(만철)의 본사 소재지였다. 만주 지역 일본인들의 활동 거점으로 야구도 성행했다. 야구로 유명한 도쿄 6대학 출신 엘리트들도 만주로 모여들었다. 1923년 고시엔 대회에 출전한 다롄상업 선수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타이베이1중은 지금의 타이베이시립건국고급중학교다. 1898년 설립된 학교로 식민지 교육 과정에 종사하는 대만인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됐다. 1916년에는 타이베이중학으로 개명했다. 1923년 고시엔 대회에 나온 대표팀에는 일본인 학생들이 다수였다. 주장 선수의 이름은 시마우라 세이지였다.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는 대만 중등교육과 야구에 대해 “일본은 대만의 중심지인 타이베이를 축으로 한 북부에서는 대만인들의 야구 참여를 제한했던 반면 상대적으로 빈곤층 농업종사자들이 몰려 있었던 남부에서는 대만인들의 야구 참여를 제한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휘문은 1923년 8월 17일 나루오구장에서 다롄상업과 첫 경기를 가진다. 휘문이 3루쪽 더그아웃을 썼다. 첫 경기였지만 대회 스케줄상 2회전이었다. 1923년 9회 대회는 일본의 6개교가 먼저 1회전을 치른 뒤 승자 3개교가 나머지 13개교와 16강부터 토너먼트를 벌이는 방식이었다.

휘문은 2회 다롄상업에 2점을 내줬지만 곧바로 4점을 내 역전에 성공한다. 그리고 최종 스코어 9-4로 승리를 거둔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한국야구사에는 이 경기의 간단한 박스스코어가 기재돼 있다. 휘문은 12안타와 볼넷 네 개를 얻었고 도루와 희생타를 각각 7개, 3개 기록했다. 상대 배터리가 도루 저지 능력이 약하다는 걸 간파하고 적극적으로 뛰는 야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선발 투수 김종세는 9회까지 혼자 던지며 3피안타 4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됐다. 볼넷은 두 개를 내줬다. 다섯 번 출루에 4실점이라면 많은 편이다. 초기 야구는 글러브의 크기와 질 등의 문제로 실책이 많이 나왔다. 수비수가 실책 없이 타구를 처리한 비율을 나타내는 수비율은 오늘날 야구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통계다. 하지만 실책이 당연시됐던 20세기 초반 야구에선 달랐다. 휘문에선 실책 여섯 개가 나왔다. 유격수 정인규가 혼자서 실책 3개를 기록했다. 다롄상업의 실책 수도 같은 여섯 개였다.

3번 타자 김정식은 포수와 중견수를 겸하며 2타수 2안타를 기록했고, 투수 김종세는 5번 타자로 4타수 2안타를 쳤다. 9번 우익수 이순재도 3타수 2안타로 활약했다. 어느 선수가 타점을 올렸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타점을 공식 기록으로 채택한 건 1920년부터다.

1931년 고시엔 대회에서 준우승한 대만자이농업학교(臺灣嘉義農林) 야구부. ⓒwikimedia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학업과 취업을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1920년대 호경기를 누리던 오사카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재일조선인사 연구의 권위자인 박경식의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에 따르면 당시 오사카에는 2만4000명, 나루오구장이 위치한 효고현에는 8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거주하고 있었다.

아사히스포츠 1923년 9월 1일호는 이 경기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1루 측 다롄상 응원석에선 임시 편성된 응원단 200여 명이 중국어 응원가로 기세를 올렸다. 반대쪽 휘문고보 응원석에는 간사이에 거주하는 조선 동포들이 진을 쳤다. 뜨거운 장면이 되면 조선어로 성원을 보냈다.”

최민규   didofidomk@naver.com  최근글보기
2000년부터 스포츠기자로 활동했다. 스포츠주간지 SPORTS2.0 창간 멤버였으며, 일간스포츠 야구팀장을 지냈다. <2007 프로야구 컴플리트가이드>, <프로야구 스카우팅리포트>(2011~2017), <한국프로야구 30년 레전드 올스타> 등을 공동집필했다. ‘야구는 평균이 지배하는 경기’라는 말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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