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은 곧 돈', 기업이 과학기술을 독점한다

  • 기자명 박재용
  • 기사승인 2018.09.1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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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전 서울대교수가 나랏돈을 들여 수천억대로 평가 받는 기술을 개발해놓고 그 특허를 자신이 소유한 회사로 빼돌린 의혹 때문에 과학기술계와 여타 유관 분야가 시끌시끌합니다. 혹자는 연구 윤리를 문제 삼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서울대 산학협력단의 구먹구구식 운영에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저는 근본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4차 산업 혁명에 이의있습니다’에선 이 문제를 한 번 다뤄볼까 합니다.

인류의 진보는 '지식 공유'의 역사

11세기 스페인의 알퐁소 6세는 톨레도를 함락시킵니다. 유럽에서 기독교세력이 이슬람을 몰아내는 결정적 순간 중 하나죠. 그리고 바로 그 톨레도에서 아랍세계로 넘어갔던 고대 그리스의 저작들이 다시 라틴어로 번역됩니다.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등 수학과 과학 분야의 보석 같은 저작들이 비로소 유럽인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거의 1000년 만의 일이었죠. 이후 이탈리아의 피렌체나 베네치아,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등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서 고대 그리스의 저작들이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런 번역본들은 누구나 베낄 수 있어서, 필사에 필사가 더해져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독일과 북유럽, 영국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르네상스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들 번역가들의 수고로움은 유럽 지식인들에게서 고대 그리스를 복권시키고 새로운 유럽을 출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번역은 유럽 전역에 공유되었고, 그리스의 오래된 선진문물 또한 공유되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동양의 인쇄 기술에 대해 전해 듣고 배웠습니다. 그는 유럽에서 최초로 인쇄기를 통해 다량의 인쇄물을 찍었습니다. 여전히 지식이 비전祕傳으로 이어지기를 선호하던 이들도 있었지만, 인쇄기술의 발달은 르네상스 시기 대중의 요구와 발맞추어 더 다양한 책을 더 싸게 더 광범위하게 공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많은 책들이 일부 지식인들만 쓰는 라틴어가 아닌 각각의 모국어로 인쇄되었습니다.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로 인쇄된 책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지식을 공유하게 되었죠.

그와 함께 교육기관이 늘어납니다. 수도원에서만 읽고 쓰기를 배우던 중세를 넘어 유럽의 도시마다 대학이 설립되고 교육기관들이 들어섭니다. 문맹률은 낮아지고, 일반 평민도 읽고 쓰기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철학과 과학, 예술이 귀족의 손에서 해방되어 일부지만 민중에게 공유되었던 겁니다.

과학 혁명 이후 눈부신 발전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의학적 발견, 생물학적 발견, 기계공학적 발명은 모두 공유되었고, 그 과정에서 발전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혜택은 물론 빈부의 격차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골고루 누려졌습니다. 그러나 과학 지식이 모두에게 열리고 누구나 접근 가능하던 시기는 이제 지났습니다. 20세기부터 과학지식에 대한 자본의 독점 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특허나 지적 재산권에 대해선 그 이전부터 여러 이야기가 있고 주장이 있었지만 본격화된 건 20세기죠. 몇 가지 예를 봅시다.

사이허브 홈페이지 화면 캡쳐

"연구논문은 무료로" 사이허브의 탄생

첫 번째로 논문이 있습니다. 과학계에서는 ‘네이처Nature’나 ‘사이언스Science’같은 논문을 게재 ‘해주는’ 권위 있는 학술지에 대해 불만이 큽니다. 연구자들은 ‘돈을 내고’ 그 곳에 투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논문을 읽는 사람도 ‘돈을 내야’ 합니다. 그 비용이 꽤나 비싸서 대학과 연구소는 그 논문을 읽을 권리를 돈을 주고 사서, 내부 구성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합니다. 왜 이런 바보 같은 짓이 일어나느냐고요? 논문은 어느 저널에서 출간되느냐에 따라 그 신뢰도와 명성이 달라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학이 교수를 평가할 때 어느 학술지에 논문이 실렸는지를 파악해 점수를 매깁니다. 교수가 높은 점수를 얻으려면 유명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사이언스나 네이처 같은 유명한 학술지에 투고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논문을 쓰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사한 연구를 하는 논문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파악해야합니다. 그리고 이미 확인된 결과들을 리서치하기도 해야죠. 논문 한 편을 쓰기 위해선 최소한 30편, 많으면 50~100편 이상의 논문을 검토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논문을 검색하기 위해선 다운로드를 받아야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제3세계의 가난한 대학과 연구소들의 경우 이런 비용을 마련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이에 반하는 해적 사이트가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알렉산드라 엘바키얀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연구하던 대학원 재학 시절 앞서 말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대학원생에게 해외 논문을 볼 돈이 없었던 거지요. 논문 한 건당 32달러. 최소한 30건 이상을 살펴봐야 하는데 비용은 무려 900달러 우리 돈으로 100만 원 선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우리나라에서도 100만원은 가벼운 돈이 아닌데 우리보다 소득이 1/10쯤 되는 대다수 나라에선 이 금액은 도저히 부담할 수 없는 돈입니다. 그래서 엘바키얀은 사이허브(Sci-Hub)라는 사이트를 구축합니다. 물론 불법입니다. 그러나 법이 가진 자만을 보호할 때 불법이 오히려 정의가 되기도 한다. 혹은 정의로우려면 불법이 될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지금도 엘베키얀은 수배자로 숨어삽니다. 유명 저널의 논문 검색 유료 계정을 가진 전 세계의 연구자들이 계정을 자발적으로 기부하여 그 계정으로 저널의 논문을 수집하고, 개별 연구자들이 논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인 사이허브의 논문은 4700만 건이나 됩니다. 모두 무료입니다. 이를 운영하는 서버 비용은 연구자들의 기부로 충당합니다.

그리고 올해 유럽 11개국은 ‘코알리션 S'(cOAlition S) 조약을 맺습니다. 2020년 1월 1일부터 공공자금 지원을 받는 모든 과학적 연구결과를 ’자유롭게, 즉시, 완전히‘ 공개(OA open access)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 슬로베니아, 스웨덴이 해당 국가입니다. 독일이 빠졌다는 것이 조금 아쉬운 부분입니다만.

의약품 가격을 맘대로 책정하는 제약회사의 탐욕

또 다른 예로 의약품을 들 수 있습니다. AIDS는 이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닙니다. 마치 당뇨병처럼 잘 관리를 해주고,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면 충분히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선 많은 비용을 약값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약값이 비싼 이유는 신약의 생산이 일부 특허를 가진 제약회사에 독점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의 “왜 에이즈 환자들이 신약 ‘무상공급’을 반대하냐고?”란 기사를 보면 에이즈 환자가 치료제로 사용하는 약의 가격은 무려 한 달에 400만원이 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이 약값은 건강보험료에서 지불이 되지만, 이 과정에서 다국적 제약기업과 정부 사이에 약값을 사이에 두고 힘 대결이 펼쳐집니다. 한 달에 몇 십만 원의 약값을 개인으로부터 든, 아니면 보험으로부터 든 받아가는 것입니다. 혹자는 열심히 투자해서 연구개발을 했는데 제약회사의 이윤은 보장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약회사는 대학의 연구팀이 개발한 신약의 독점 판매권을 사들였을 뿐입니다. 돈으로 독점 판매권을 사고, ‘독점’이니 헉할 만큼 비싼 돈을 받는 것이지요. 혹은 제약회사가 스스로 개발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 기밀이라며 연구개발비가 얼마나 들었는지를 공개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약값을 정하지요.

이게 가당키나 한 걸까요? 물론 특허권이라는 것이 어렵게 연구개발을 한 이들에게 일정한 보상이 되도록 권리를 주는 제도라는 건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그 특허권을 무기로 자기들 마음대로 약값을 받는 게 허용되어야 하는 걸까요? 연구개발비용을 공개하고, 그에 맞춰 다른 제품보다 조금 더 많은 이윤을 받을 수 있도록 책정하는 선에서 약값을 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걸까요? 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특허권’이라는 권리가 그 기술을 개발한 개인이나 기업, 혹은 그 권리를 산 기업에게 ‘무한한 이윤’을 보장하는 권리로 둔갑하는 걸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약품뿐만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불하는 휴대폰 비용에는 꽤 높은 비율의 특허료가 포함된다. 삼성과 애플이, 애플과 퀄컴이 미국의 법정에서 싸우는 게 바로 이 특허에 대한 것입니다.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의 특허와 관련된 법적 분쟁 또한 한창 진행 중입니다. 유전자 가위는 생물학 연구, 특히 유전공학 분야에 획기적인 기술로 자리하였지만 이 역시 누가 특허의 권리를 가지느냐를 놓고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김진수 전 교수의 특허도 이와 관련된 것입니다. 심지어 인터넷 기업들은 플랫폼 자체에도 특허를 주장합니다. 어떤 연구자들은 새로 발견한 화합물에 특허를 주장하기도 하지요.

Photo by Lucas Vasques on Unsplash

과학기술ㆍ지식 접근권 보장되는 사회로

조너스 에드워드 소크Jonas Edward Salk는 1955년 소아마비 백신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소아마비에 걸려 보행이 불편한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띠는데 당시는 더 심했습니다. 그가 개발한 소아마비 백신은 어린 아이를 둔 부모들에겐 아주 기쁜 소식이었고, 동시에 많은 이들은 그가 엄청난 부를 거머쥘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에게 언론이 물었습니다. ‘백신의 특허는 누가 갖게 되는 건가요?’ 이 물음의 진정한 의미는 ‘어느 기업에게 백신의 특허를 팔 건가요?’였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글쎄요, 아마도 사람들이겠죠. 특허 같은 건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그러나 지식의 공유를 조너스 소크 같은 의인(義人) 개인에게 기대어 이루어낼 순 없습니다. 연구자가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미 모든 연구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고, 그 비용을 댄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기술에 대한 탐욕을 가진 대기업을 법과 규제로 강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연구자를 자본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과학 지식에 대한 기업의 배타적 권리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이 개별 자본의 이익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국가가 책임을 지는 사회에 삽니다. 마찬가지로 의료 행위가 자본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국가가 의료보험을 실시하는 곳에 살지요. 한정된 땅이 일부 개인과 자본에 의해 과점되고 그로 인해 고통 받지 않도록 다양한 부동산 정책이 아직 부족하지만 시행되고 있습니다. 지식에 남녀노소 빈부의 격차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지역마다 도서관을 세우고 누구나 무료로 도서를 빌려 볼 수 있도록 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정책이 혜택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당연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인터넷에 대한 접근, 보다 높은 수준의 과학 및 기술 정보에 대해서도 누구나 접근하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시혜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자본으로부터 그 권리를 확보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공유 사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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