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인 순간, 항상 유상철이 있었다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19.11.22 08:5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1년 지바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남북 여자 단일팀은 만리장성 붕괴라는 거대한 성과를 일구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걸 보면서 누구 못지않게 감동하고 또 각오를 다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1991년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참가하게 될 남북의 청소년 선수들이었다.

마침 운때가 맞은 것이 남과 북은 각각 이 대회 출전권을 획득한 상태였고 남과 북만 합의하고 FIFA가 승인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FIFA가 남북 단일팀 성사를 반신반의했을만큼 과연 그게 가능할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각종 공식적(?) 난관 외에도 우려는 많았다. 우선 탁구는 남북 모두 세계에서 열 손가락에는 능히 꼽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국제 무대에서 마주치고 안면을 튼 경우도 많았지만 축구는 그렇지 않았다. 하물며 아직 여드름도 가시지 않은 피끓는, 하지만 철저히 반공 교육과 주체사상 교육을 받고 자라난 청소년들이 쉽게 섞일 수 있을까 걱정은 당연했다.

하지만 단일팀은 이뤄졌고 합동훈련을 거치고 평가전을 치르면서 남과 북의 선수들은 선발의 기쁨과 탈락의 아쉬움을 경험해야 했다. 북한에서 전지훈련 중 김일성 초상화를 보고 남측 선수가 ‘김일성이다’ 한 마디 했다가 북측 선수가 포크를 들고 죽여 버리겠다고 대드는 해프닝도 있었고 공도 잘 주지 않는 서먹서먹함도 넘어서야 하긴 했지만 젊은 선수들은 이내 친해졌는데 그 중에 절반은 짐을 싸야 했던 것이다. 그 비운의 선수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건국대학교 90학번 유상철이었다.

부아가 치밀어 울고 있는 유상철에게 북한 선수들이 다가왔다고 한다. “이때 북한 친구들이 유상철에게 다가왔다. 짐을 싸는 그에게 몰래 뱀술을 넣어주며 아무 말 없이 뜨겁게 그를 껴안았다. 그러자 유상철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유상철을 꼭 껴안은 북한 선수들이 말했다. ‘왜 울고 기러니. 언젠가 꼭 다시 만나자우.’ (김현회 기자, <남과 북 그리고 전설의 팀 코리아>, 스포츠니어스 2014년 6월 24일) 유상철은 이 뱀술을 2014년 현재까지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상철의 이름이 내 뇌리에 각인된 것은 축구 한일전 최고의 명승부라고 생각하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8강전이었다. 그때 선취점을 내 주고 끌려가던 한국의 만회골은 내가 보기엔 ‘어리버리’ 나왔다. 누군가 골대 오른쪽으로 공을 치고 들어가다가 힐킥으로 가운데로 연결하긴 했는데 이어서 속 시원한 슛이 터진 게 아니라 툭 건든 듯한 공이 일본 골대로 데굴거리며 들어갔던 것이다. 아나운서도 당황한 듯 침묵했는데 신문선 해설위원이 부르짖었다. “유상철 골이에요.”

그때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하던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골키퍼를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을 경험했다는 재간꾼. 주로 미드필더였으나 최종수비수도 했고 스트라이커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올라운드 플레이어. 그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그날 한일전은 정말 재미있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었던 황선홍이 돌고래같이 솟아오른 헤딩슛과 역시 황선홍이 얻어낸 페널티킥으로 3대2 펠레 스코어로 이겼다. 그 명승부의 결정적 포석을 놓은 유상철의 이름은 여러 번 내 귀에 울리게 된다.

유상철의 이름과 얼굴을 다시 한 번 기억에 새기게 된 것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마지막 경기 대 벨기에전이었다. 전 경기였던 네덜란드와의 대결에서 한국 대표팀은 5대0으로 박살이 난다. 복기조차 하기 싫었던 완패였고 수준 차이를 절실하게 보여 준 한판이었다. 차범근 감독이 이 경기로 날아가서 짐을 싸야 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했는데 당시 나라 분위기가 좀 그랬다.

1997년 말 IMF가 터졌고 IMF의 폭풍이 본격적으로 한국을 휩쓸고 지나가던 때였다. 전국 도처에 잘려나간 직장인들이었고 양복 입고 등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무성했다. 금모으기 운동까지 벌이며 국난 극복을 해 보자며 발버둥쳤지만 막막하고 무릎 꺾였던 즈음이었다. 그런 암울한 분위기에서 예선에서 거의 전승을 거두며 본선에 진출한 대표팀에 대한 여망은 그만큼 무거웠다. 첫 경기 멕시코와의 대결에서 사상 처음으로 선취골까지 넣었을 때는 그 여망이 실현되는 줄로 착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역시 무서웠다. 골을 넣은 하석주가 그만 백태클 한 번으로 퇴장당한 뒤 분위기는 바뀌었고 멕시코 선수들은 한국 선수들을 글자 그대로 가지고 놀았다. 블랑코라는 녀석은 발목 사이에 공을 끼우고 달려드는 수비수 둘 사이로 ‘점프’를 하는 신기술(?)을 선보이며 한국 수비를 농락했다. 후일 멕시코의 어느 도시 시장이 됐다는 블랑코의 득의양양한 얼굴은 지금 떠올려도 밥맛이 떨어진다.

그렇게 지고 난 뒤 ‘심기일전’해서 붙은 것이 네덜란드였는데..... 솔직히 수만 킬로미터 밖에서 TV를 보는 나도 경기장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세상에 온 스탠드가 오렌지색이었다. 그러니까 2002년 한국팀 경기장이 붉은 색 물결이었다면 말 그대로 오렌지의 바다였다. 야 이거 안되겠구나. 그런데 정말 어떻게 손발을 쓸 수가 없이 한국팀은 무너져 내렸다. 한국팀에서 기억나는 장면은 당시 열 아홉 살 루키였던 이동국이 위력적인 중거리 슛 한 번 때린 것 밖에 없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 헝가리한테 당한 9대 0을 재연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 경기를 보며 가슴이 무너지고 한숨을 쉰 것은 나 뿐이 아니었으리라.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뭐 한다고 했는데 좀 반짝 하나 싶더니 결국은 이 모양 이 꼴이구나.” 축구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나라 팔자(?)에 대한 한탄이었고 “엽전이 별 수 없지.” 하는 케케묵은 자조까지 이끌어낸 경기였다. 차범근 감독은 그런 분위기의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감독 없는 프랑스 하늘 아래’ 대표팀은 벨기에 전을 준비해야 했다.

원래 ‘붉은 악마’의 저작권은 벨기에에 있다. 그 나라 축구대표팀의 애칭이 ‘붉은 악마’였던 것이다. 1906년, 국제무대에 나선 2년만에 벨기에 대표팀은 프랑스를 5대0으로 자빠뜨리는 등 대단한 활약을 보였고 열광했던 벨기에 국민들이 자국 대표팀에 붙였던 별명이 ‘붉은 악마’였다. 원조 붉은 악마와 아직 이마에 뿔도 덜 돋은 신예 붉은 악마의 대결. 네덜란드에게 5대0으로 아작이 나는 모습을 지켜본 벨기에 팀은 한국팀을 당연히 만만하게 봤다. “(감독이 잘리고) 3일만에 뭐가 바뀌겠나.” 벨기에 감독의 말이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지금까지 내가 보았던 경기 가운데 가장 눈물겨운 선전분투를 보여 주었다. 머리에 피를 줄줄 흘리며 붕대를 감으면서도 경기장으로 빨리 들어가겠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이임생의 모습에 눈물이 어렸고 스타플레이어 엔조 시포의 강슛을 그야말로 몸을 던져서 막는 유상철의 등짝이 가슴을 때렸다. 그래도 한 골을 먹었고 끝내 3패로 끝나나보다 했는데 후반전 중반쯤 프리킥을 얻었다. 왼발의 달인 하석주가 크로스성 프리킥을 올렸고 문전 혼전 가운데 한국 선수가 사력을 다해 슬라이딩하면서 내민 발에 공이 걸렸고 벨기에 문전을 갈랐다. 유상철이었다.

그 골은 한국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건 일종의 오기 같은 골이었다. “한국 아직 안죽었어!” 뭐 이런. 멕시코한테 농락당하고 네덜란드한테 곤죽이 됐을망정, 그래서 1998년의 한국처럼 어쩔 도리가 없는 팀이었을망정 눈에 힘 주고 어깨 펴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고 덤비면 그래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 골이었다고나 할까.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때 패전국 독일 국민들을 다시금 일으킨 것이 헝가리를 격파한 서독 축구팀의 승전보였고, 1970년 멕시코 월드컵 개막일 대지진으로 7만 명이 사망한 페루 국민들에게 힘을 준 것이 불가리아를 격파한 페루팀의 분투였듯이 말이다. 유상철은 그 골의 주인공이었다.

4년 뒤 2002년. 유상철은 또 한 번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쓴다. 2002년 월드컵 한국팀 첫 경기에서 황선홍의 선취골에 이어 쐐기를 박는 두 번째 골을 넣은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는 강팀임”을 최종적으로 증명하는 등기와도 같은 골이었다. 회사 카메라실에서 하늘같은 카메라 감독들과 함께 경기를 지켜보던 나를 책상 위에 올라가 미친듯이 환호하게 만든 골이었다. 유상철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환호하라는 듯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골 세레모니를 했다. 월드컵 사상 첫 승리였다. 1954년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은 뒤 48년만에 처음으로 맞는 승리. 심판의 장난도, 노골적인 홈 어드밴티지도 없는 그야말로 깨끗한 승리. 그 순간을 환호한 한국 사람이라면 (축구 안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죄송) 유상철의 그날은 초고화질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내가 확실하게 그의 모습을 기억하는 세 경기. 그런데 유상철 역시 인터뷰에서 이 세 경기를 그 축구 인생의 하이라이트로 회고하는 것을 들었다. 왜 안 그렇겠는가. 모든 것은 얽혀 있고 그가 치른 경기는 그저 축구 경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시대적 배경과 그 경기를 함께 했던 사람들의 기억이 범벅이 돼서 빚어진 작은 역사일 것인데. 거기에 1991년 애석하게 대표팀에서는 탈락했으나 그가 20년 넘게 간직했다는 뱀술까지 곁들이면 유상철은 그의 발로 작은 역사를 써 왔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유상철이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한다. 참으로 몹쓸 병이지만 그가 이겨내기를 기도한다. 이미 많은 슬픔과 시련을 이겨낸 것처럼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고 감독마저 날아간 상황에서도 사력을 다해 발을 내밀던 그 투혼으로 병마를 이겨내기 바란다. 그래서 아직 또 다른 역사를 써 주기 바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의 이슈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