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체크] 교과서 만민공동회 사진, 사실은 친일단체 일진회 사진이었다

  • 기자명 석지훈
  • 기사승인 2019.11.26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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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기고했던 글들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근대사 및 현대사와 관련된 사진들 가운데에는 그 고증이 거의 제대로 되지 않은 사진들이 부지기수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 고증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은 사진들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결국 한국 근대사의 가장 거센 격랑이 몰아치던 1890년대와 1900년대에 촬영된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는 이미 조선에 사진술이 처음 소개된 지 20~30여년 가까이 시간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일은 더 이상 희한한 서양 요술로 취급되지 않았고, 또 서울이나 인천, 부산 등 개항장이나 주요 도시에서는 이미 상업 사진사들이 사진관을 열고 영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상업 사진사들을 포함해 당시 한국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를 제작, 유통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거의 대다수는 어디까지나 일본인이나 서양인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사진에 담겼던 것은 어디까지나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별난 조선 풍속"에 불과하거나, 값비싼 초상사진을 찍어 남길 수 있었던 일부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 뿐이었다. 더구나 당시의 사진 카메라는 유리건판에 감광제를 발라 사진을 찍는 것이었던 만큼, 야외에서의 현장 촬영은 어지간한 준비를 하지 않고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역사적 사건의 한 장면이 촬영되는 일은 아쉽게도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우리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배우는 것들, 가령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등이 사진에 담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사진에 대한 면밀한 고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 중 하나는 바로 독립협회와 관련된 것들이다. 현재까지 독립협회와 관련된 사진이라고 알려진 것 가운데 이견이 없이 명확히 고증된 사진이 사실상 전무한 상황에서, 수많은 사진들이 독립협회 혹은 만민공동회 사진이라며 인터넷은 물론이고 각종 공식 출판물에까지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태극기가 걸려있는 깃대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사진이면 아무런 사료적/문헌적 근거 없이 무조건 "만민공동회" 사진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사진의 예는 너무나 많아 일일이 이 글에서 언급할 수 없기에, 오늘은 그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사진이라고 생각되는 한 장의 사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문제의 사진은 1990년대 말 무렵 처음 소개되어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비롯한 수많은 출판물과 언론 보도물론이거니와 위키피디아 등의 각종 인터넷 페이지,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작한 우리역사넷 홈페이지 등지에까지 소개된 바 있다.

그림 1. 흔히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
그림 1. 흔히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

보다시피 이 사진 속에는 태극기가 걸린 큰 규모의 기와집 옆으로 다수의 군중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군중들이 모여있는 모습이라던지, 주변의 분위기를 보면 분명히 어떠한 공식 행사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 확실할 뿐더러, 사진에 담긴 기와집의 모습을 살펴보면 비록 측면의 일부만 드러난 정도이지만 그간 다른 기록과 사진을 통해 알려진 독립협회의 회관인 독립관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 때문에, 이 사진은 처음 소개되었을 때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었고, 그 때문에 그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이 독립협회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 별 이견을 가지지 않았다. 한편, 대개 독립협회의 대중 운동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만민공동회'이고 이 사진 역시 분명 대중을 상대로 한 행사의 모습을 담은 것이 분명하기에, 이 사진은 차츰 만민공동회의 회합이나, 혹은 그와 관련이 있는 사진으로 추정되어 소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사진들 가운데 독립협회의 활동 시기를 전후하여 촬영된 독립문과 독립관 주변의 기록사진을 몇 가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보다시피 이 사진 속의 모습을 살펴보면, 독립관의 주변이 대체로 말쑥하게 정비되어 있고, 독립관 본관이라고 생각되는 건물 옆에는 양옥 건물도 제법 번듯하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는 독립협회가 독립문과 독립관을 지어 올렸던 시기에 촬영된 것으로 생각되는 사진들에 드러난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가령 독립문과 독립관, 그리고 옛 영은문 주춧돌이 같이 찍혀있는 유명한 자료사진 (사진 2)에 드러난 이 주변의 모습을 살펴보면, 주변이 무척 황량할 뿐만 아니라 독립관 주변에 민가 몇 채를 제외하고는 어떤 시설물이 있다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 사진을 정확히 누가 찍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의 유품으로 현존하는 사진 컬렉션에 18989월 날짜가 기입되어 있는 복사본이 있기에 대략 그 시기에 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2. 독립문 완공 이후 주변 경관. 1898년경 촬영. 독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독립관이다. 부속 건물도 없을뿐더러 주변의 경관도 대체로 정비되지 않은 황량한 모습이다.
그림 2. 독립문 완공 이후 주변 경관. 1898년경 촬영. 독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독립관이다. 부속 건물도 없을뿐더러 주변의 경관도 대체로 정비되지 않은 황량한 모습이다.

 

그림 3. 독립문 완공 직후 주변 경관. [사진 2]와 비슷한 시기인 1898년 무렵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림 3. 독립문 완공 직후 주변 경관. [사진 2]와 비슷한 시기인 1898년 무렵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펜젤러 컬렉션에는 이 사진 외에도 독립관의 뒤편 언덕빼기에서 독립관을 내려다보며 독립문과 그 일대를 조망한 다른 사진의 복사본이 (그림 3) 하나 더 들어있는데, 이 사진 속에서도 독립관 주변은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인데다 양옥 부속 건물의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들 두 점의 사진은 이미 한말 이래 그림엽서와 스테레오뷰(Stereoview) 사진, 그리고 그 이후 출간된 각종 출판물에 폭넓게 인용되었던 사진이었던 만큼 일찌감치 학계에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의 만민공동회사진에 드러나는 독립관과 그 주변 경관은 분명히 다른 사진 두 장과는 딴판이다. 1898년을 전후하여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음을 생각해보면 이는 이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여기서 조금 더 문제를 깊이 탐구해보면, 저 사진이 실제로 만민공동회를 담은 사진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만민공동회는 1897년 이래 꾸준히 개최되었지만, 그 개최 기록을 살펴보면 행사의 대부분이 유동 인구가 많은 종로 (보신각 주변)에서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명확한데 반해, 독립관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다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1898년을 넘어서면서 만민공동회가 점차 독립협회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행동을 벌이게 되면서 독립협회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에, 1898년 이후에 독립관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러한 상황이었던 만큼 당시 문헌 자료에서 독립관에서 만민공동회 (혹은 관민공동회) 등의 대규모 집회가 개최된 사실은 거의 확인할 수 없다. 이는 이 문제의 사진을 만민공동회로 고증한 것이 기본적으로 기초적인 사료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무척 안일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답은 역시 그 사진 자체에 들어있다. 독립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양옥은 다름 아닌 국민연설대(國民演說臺)라는 건물로, 이는 19059월에 처음 건립되었다. 이 건물을 지은 주체는 다름 아닌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 국민연설대는 이들의 회관 및 사무소 용도로 사용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이후 독립관은 대한제국 정부의 국유 재산으로 관리되면서 정부 주최의 공공 행사를 개최하거나 혹은 각종 단체들이 주최하는 행사를 위한 대관 공간으로 사용되어왔는데, 19052월 일진회의 총재 윤갑병(尹甲炳)과 회장 송병준(宋秉畯)이 독립관에 대한 사용권을 정부에 신청해 정식으로 일진회의 본부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光武九年二月六日 請願書, 各司謄錄3, 京畿道各郡訴狀 16 (190526일자))

그림 4. 일진회가 독립관을 인수하여 사용하던 무렵의 모습. 독립관의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 1905년 9월 완공된 국민연설대이다. 경성일한서방(京城日韓書房)이 펴낸 사진집 『한국풍속풍경사진첩』 (1910)에 수록된 사진이다. (*원본은 인쇄오류로 사진의 좌우가 뒤바뀌어 있어 바로잡았다)
그림 4. 일진회가 독립관을 인수하여 사용하던 무렵의 모습. 독립관의 오른편에 있는 건물이 1905년 9월 완공된 국민연설대이다. 경성일한서방(京城日韓書房)이 펴낸 사진집 『한국풍속풍경사진첩』 (1910)에 수록된 사진이다. (*원본은 인쇄오류로 사진의 좌우가 뒤바뀌어 있어 바로잡았다)

그러나 이미 지은 지 오래된 모화관 건물을 개조해서 세운 독립관은 아무래도 당시 일진회가 벌이고자 했던 각종 친일 대중운동과 강연 등의 행사를 수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이에 일진회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독립관에 대한 사용승인을 받은 직후 곧바로 새로운 회관을 독립관 바로 옆에 붙여 짓기 시작해, 그해 9월 무렵 이를 완공 (그림 4)하였다.

국민연설대는 한국에서 대중집회와 행사를 위한 전용 건축물로는 사실상 최초의 것이었던데 그 규모도 실내에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어서 당시 세간의 감탄을 자아냈는데, 일례로 황성신문1905916일자에는 새로 완공된 국민연설대 건물을 가리켜 실로 우리 대한(我韓) 유래에 보지 못했던(未曾有) 일대 기관(奇觀)”이라고 소개할 정도였다

一進演說, 皇城新聞1905916일자.
本日下午一時頃一進會에셔 演說會獨立舘左傍新建한 國民演說臺開하傍聽許한다난대 此洋屋子宏壯華鹿하其額面國民演設臺金字刻成하고 該臺內에는 千餘名傍聽者收容할 듯하다 하니 今日 此臺刱設我韓由來未曾有한 一大奇觀이라더라

 

이렇게 국민연설대 건물이 독립관과 나란히 찍혀있는 사진인만큼, 이 사진 역시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와는 완전히 무관한, 친일단체 일진회의 집회 모습을 담은 사진임이 역시 명백해졌다. 헌데 그렇다면 이 사진은 정확히 언제, 누가 찍은 것일까?

그 해답은 1908년 미국 뉴욕의 찰스 스크리브너 (Charles Scribner & Sons) 출판사에서 출간된 조지 트럼불 라드 (George Trumbull Ladd)의 책 이토 후작과 한국에서(In Korea with Marquis Ito)에 있다. 라드는 예일대 출신의 교육학자이자 철학자, 심리학자로 당시 미국에서 상당한 명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는 1892년 일본에 초빙되어 1899년까지 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철학과 교육학을 가르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당시 일본의 수상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와 깊은 친분을 맺게 되었다. 라드는 1907년 메이지 천황이 그에게 수여한 욱일중광장(旭日重光章)을 받고자 다시 일본을 방문했는데, 이때 당시 한국 통감으로 와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초대를 받아 그해 326일부터 수 개월간 이토의 조선 순방에 동반하여 대한제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이때의 감상을 책으로 펴내기에 이르렀다. 라드는 일본의 무사도와 일본 문화에 상당한 호의를 가지고 이를 예찬한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극도의 경멸과 노골적인 야유를 서슴치 않으며 매우 왜곡된 시각으로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해 논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라드의 책은 좀체로 국내에서 인용되거나 번역되어 소개된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책에는 라드 자신이 대한제국에 체류할 당시 직접 촬영한 상당수의 사진이 실려있는데, 이들 사진들의 대부분은 다른 경로로 유통되지 않고 라드 자신이 촬영한 유일한 판형인 경우가 대부분으로 그 자료적인 가치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이 사진들 역시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소개되어 왔다.

문제의 사진은 바로 이 책 52쪽 이면의 화보로 등장하는 것(PDF 파일 기준으로 67쪽)으로, “Going to the lecture at Independence Hall", 독립관의 강연에 가다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라드는 서울에서 만난 미국인 선교사들, 특히 당시 한성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한 선교사 필립 질레트 (Phillip L. Gillette)와 주로 일정을 같이 했는데, 그해 421일 독립관에서 강연을 하고자 질레트와 함께 독립관에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라드는 독립관/국민연설대에 약 1천명에서 15백명 가량의 군중이 모였다고 적었는데, 그의 영어 강연을 통역으로 전달한 한국인 기독교인의 웅변 실력을 칭찬하면서도, 한편으로 한국인 청중들의 참석 태도는 갱생이 불가능한 수준(unregenerate)으로 저급하다며 경멸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라드가 독립관에서 했던 강연은 당시 매 달마다 일진회의 주최로 개최되던 국민연설회의 일부로 개최된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1907419일자 기사(사진 5)에 따르면 국민연설회의 본 행사는 라드의 강연 전날인 420일에 열렸는데, 그날 이곳에서 있었던 연설회 강연의 내용은 정계 혁신의 급무론“ (송병준), ”부원(富源) 발달의 급무론“ (홍긍섭), ”사회정신 각오의 급무론“ (염중모)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일진회에서 회장을 비롯한 중책을 맡고 있던 이들로, 이미 이 시점에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벌이면서 조선이 문명화되기 위해서는 일본이 지도해주는 문명을 받아들여야한다는 내용을 대중에게 홍보하고 있었다. 라드 역시 이에 철저히 동조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당시 일진회가 그의 강연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이를 이용하려 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림 5. 일진회의 정기 연설회 개최 소식을 알리는 『황성신문』 1907년 4월 19일자 기사.
그림 5. 일진회의 정기 연설회 개최 소식을 알리는 『황성신문』 1907년 4월 19일자 기사.

결국 지난 20여년 가까이 수많은 책에 실려왔던 만민공동회혹은 독립협회사진은 그와는 거리가 멀뿐더러, 그 정체는 실상 극도로 친일적이었던 외국인이 일진회의 협조로 친일적인 강연을 벌인 현장에 모여든 사람들 - 일진회 회원들 - 의 모습을 담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동안 라드의 책에 수록된 사진들이 줄곧 각종 출판물과 언론 매체 등을 통해 계속 인용되어 왔던 것을 생각하면, 이 사진이 독립협회와 관련된 사진으로 둔갑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 사진의 출처를 처음부터 숨기고 이를 엉뚱하게 이용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기에 충분하다. 이는 역시 그간 부족했던 고증에 대한 노력 - 특히 건축물의 역사나 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고질병 - 에 대한 반성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순간을 생생한 모습으로 보고 싶어마지 않는 오늘날 우리들의 욕망을 부끄럽게 돌아보게되는 하나의 실례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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