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은 왜 '오리지널 디지털 콘텐츠'에 유용한가

  • 기자명 김재인
  • 기사승인 2020.01.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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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재인의 블록체인 이야기] ① '디지털 원장(原帳)'으로서의 블록체인

암호화폐(또는 가상화폐)로서의 블록체인 열풍이 한풀 사그러든 지금, 기술로서의 블록체인이 여러 응용을 중심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나는 블록체인의 응용과 관련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기술적 특징 하나를 강조하고 싶다. 먼저, 블록체인에 대한 기술적 정의 몇 가지를 확인하고 가자.

 

블록체인은 분산 방식으로(즉 중앙 보관소 없이), 대개는 중앙 권위(즉 은행, 회사, 정부) 없이 시행되는, 손을 대면 흔적이 분명하게 남고 손 타기 어렵게 되어 있는 디지털 원장이다.” (공식적 정의)

블록체인은 블록들로 그룹지어 모인, 암호로 서명된 거래들의 분산된 디지털 원장이다.” (비공식적 정의)

- Dylan Yaga et al., 「Blockchain Technology Overview」, NIST, 2018.10

 

블록체인은 무결성을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 순서에 따라 연결된 데이터 블록들의 정보 내용을 암호 및 보안 기술을 이용해 협상하는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소프트웨어 유닛을 이용하는 원장의 순수 분산 P2P 시스템이다.”

- 다니엘 드레셔, <블록체인 무엇인가>, 2017

 

(참고로, 앞의 정의는 미국 국립표준기술원(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NIST)에서 2018103일에 발간한 블록체인 기술 개관”(Blockchain Technology Overview)이라는 66쪽 짜리 보고서 최종본(National Institute of Standards and Technology Internal Report (NISTIR) 8202)에서 가져왔다. 이 보고서의 초고는 2018124일에 공개되었고, 많은 공개 논평(public comment)를 받아 새롭게 작성되었다. 미국 정부가 블록체인 비즈니스에 관심 있는 기관이나 기업에 제공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기에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뒤의 정의는 내가 보기에 블록체인 기술을 가장 잘 설명한 다니엘 드레셔(Daniel Drescher)<Blockchain Basics: A Non-Technical Introduction in 25 Steps>, 2017에 등장한다. 드레셔는 소프트웨어 공학으로 석사를, 계량경제학으로 박사를 받고 은행에서 금융 전문가로 활동한 이력이 있어서인지, 기술적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를 최대한 쉽게 일반인에게 전달하고 있다.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내 글에서 기술과 관련된 핵심 내용은 주로 이 두 문헌을 참조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위의 두 정의가 모든 이들에게 만족스러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이어지는 논의 전개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블록체인은 소프트웨어를 이용하는 원장, ‘디지털 원장이다.

블록체인은 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 system)이라고 불린다.
블록체인은 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 system)이라고 불린다.

 

먼저 나는 이 정의에서 원장(元帳, ledger)’ 개념에 주목하고 싶다. 원장의 유래를 살펴보면,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911년 판의 정의에 따르면(16359), ledger놓는다는 뜻의 영어 방언 liggen 또는 leggen에서 유래했으며, 네덜란드어 실사(實辭)legger로부터 채택했다. 원래 ledger는 한 곳에 어김없이 놓여 있는 책이며, 교회에 있는 성서와 기도서의 복사본을 위해 사용되었다. 찰스 라이어스슬리(Charles Wriothesley)<연대기>(Chronicle, 1538)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목사보(牧師補)는 최대 분량의 영어로 된 성경책을 구비해서, 한 교회에서 교구 주민들이 읽는 원장(lidger)이 되게 해야 한다.” 이런 본래 의미는 복식부기에 사용되는 총거래원장을 가리키기 위한 상업적 용법에 적용되었다.

 

원장은 아무리 많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이유는, 블록체인은 원장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잘할 수 있게 만든 기술이지, 원장 바깥에 있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회계에서 원장은 매출원장’, ‘매입원장’, (‘자산, 부채, 수입, 지출, 자본5개의 계정 유형으로 이루어진) ‘총계정원장을 포괄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원장 바깥에 있는 화폐 또는 화폐로 환산된 단위(가령 얼마짜리 무엇)와 그것의 변화가 원장에 기입된다.

 

전통적으로 원장은 책에 기입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사업체의 주인은 자신의 경제 현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 정확하게 원장을 기록해야만 했다. 복식부기로 대표되는 원장 작성 기술은 경제를 운용하는 데 있어 여전히 첨단 기술이다. 오늘날 원장은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의 도움으로 디지털로 작성된다. 하지만 기록과 저장의 원리만 놓고 보면 과거 책을 원장으로 삼았을 때와 완전히 똑같다. 요컨대 책 원장과 디지털 원장은 속도 문제를 빼면 장점과 단점을 고스란히 공유한다.

 

한 사회에는 여러 개의 원장이 있다. 나의 원장, 갑의 원장, 을의 원장, 톰의 원장, 제리의 원장 등. 이제 이 모든 원장을 하나의 원장에 담는다고 해보자. 이 원장은 '한 사회의 모든 원장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회의 모든 원장의 집합은 그 사회의 경제 현실을 표상한다. 그래서 원장이 무결하다면, 이 원장만 보면 그 사회의 경제 현실을 다 알 수 있다.

 

한 사회의 모든 원장의 집합은 디지털로 구현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는 편이 손쉽고 편리하다. 이렇게 하나의 동일한 디지털 통신 네트워크 안에서 작동하는 디지털 원장은 굳이 블록체인 기술을 통해 구현할 필요는 없다. 모든 원장을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를 중심으로 구현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은행의 데이터베이스가 고객 모두의 통장 내용을 담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며, 현실에서 충분히 잘 작동한다.

 

원장과 관련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원장에 기록된 내용과 원장에 반영된다고 상정된 실제 사이에 괴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속된 말로 하면, 어떤 장부에 기록된 내용이 은행계좌와 창고에 있는 실제 내용과 다를 수 있다. 분식회계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분식회계 여부는 적절한 감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원장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점은 여전히 한계로 남는다.

 

본래 원장은 주인 말고 타인에게 곧이곧대로 공개될 필요는 없다. 자산 상태를 속이고 실적을 더 줄이거나 부풀리는 일이 많은 경우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분식회계의 유혹은 늘 존재한다. 블록체인은 분식회계와 같은 유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다. 블록체인은 원장의 기록을 누구나 신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발명된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기술이 작동하는지, 그 원리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루겠다. 여기서는 오직 원장에만 집중하자. 원장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블록체인이 내포하는 장단점을 혼동하게 되고, 기술의 잠재력을 오해해서 궁극적으론 사기 치거나 사기 당하는 처지에 이를 것이다.

 

앞에서 나는 원장이 실제를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원장과 실제를 비교하고 원장 내용이 맞는지는 항상 검증해야 한다. 이 일은 번잡하고 골치아프다. 직원이 작성한 원장을 주인이 곧이곧대로 신뢰하긴 어렵다. 늘 확인할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은 원장과 실제의 불일치 가능성 문제를 해결했을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블록체인 기술 개관에 언급된 다음 대목을 눈여겨보자.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자신의 디지털 시스템 내에 있는 데이터에는 극히 잘 작동한다. 하지만 블록체인 네트워크가 현실 세계와 접촉할 필요가 있을 때는, 몇 가지 이슈(보통 오라클 문제라고 불리는)가 있다.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인간 입력 데이터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온 감각 입력 데이터 둘 다를 기록할 자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입력 데이터가 실제 세계의 사건을 반영하는지 결정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감지기는 오작동해서 부정확한 데이터를 기록할 수도 있다. 인간은 (고의이건 비의도적이건) 틀린 정보를 기록할 수 있다.”

 

기록된 데이터가 잘못될 수 있다는 있다는 점에서 블록체인은 책으로 이루어진 원장이 갖고 있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오라클 문제라는 개념은 나중에 살피기로 하자.)

 

블록체인은 한 사회의 모든 원장의 집합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사회는 하나의 동일한 디지털 통신 네트워크를 가리키며,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원장을 이룬다. 블록체인에서, 원장은 거래들의 모음이다. 원장에 기록되는 거래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간략히 말하면, 소유권에 관련된 데이터와 소유권의 이전에 관한 이력이다. 한 번 더 분명히 말하지만, 여기서 소유권은 실제 현실의 소유권과 동일시되어서는 곤란하다. 가령 블록체인 상에서 부동산 A의 소유권자가 갑이라고 해서, 실제로도 갑이 부동산 A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부동산 A의 소유권의 이전 기록은 신뢰할 수 있을지라도, 블록체인에 처음 기록될 때 A의 진짜 소유권자 을 대신에 갑으로 잘못 기입한 것이라면, 소유권의 이전 기록은 모두 무효가 될 것이다.

 

 

요약하자. 블록체인은 디지털 원장이며, 원장이 본래 갖고 있던 장단점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원장이 언제나 잘못된 데이터가 기록될 여지를 갖고 있듯이, 블록체인에도 잘못된 데이터가 기록될 수 있다. 블록체인은 어디까지나 일단 기록된 데이터(가령 소유권자)에서 출발해서 신뢰를 확보한다. 이것이 블록체인이 갖고 있는 근본적 한계임을 명심하도록 하자.

 

끝으로 블록체인 네트워크 안에서 생겨난 디지털 저작물의 경우라면 문제가 다르다는 점도 명심하도록 하자. 처음부터 디지털로 생성된 것이라면, 그것이 블록체인에 처음 공표된 이상, 소유권은 정확하게 보장될 수 있다. 이 가능성이 블록체인의 미래를 밝게 해줄 지점 중의 하나이다. , 사진, 그림, 음원, 영상물, 만화(카툰), 디자인, 게임 등 오늘날 수많은 콘텐츠가 디지털로 생성되고 유통된다. 오리지널 디지털 콘텐츠는 블록체인에서 흘러가는 양분이고 혈액이다.

 

나는 이 문제를 디지털피지컬의 구별과 관련짓는다. 블록체인은 다른 첨단 디지털 기술과 마찬가지로 디지털에 강점을 가지며, 피지컬과 관련해서는 응용에 있어 주의가 많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다른 곳에서 쓴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엄밀하게 보면 종이 문서가 복제될 때 원본이 물리적으로 그대로 복제되는 건 아닙니다. 복사한 걸 또 복사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 마지막 결과물은 분명 LP 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질이 저하되니까요. 그러면 종이 문서는 LP 판과 유사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 걸까요? 놀랍게도 종이 문서는 MP3 파일과 더 비슷합니다. (...) 대표적으로 책을 볼까요. 판형, 폰트, 행간, 편집 상태 등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종이책도 있고 전자책도 있고요. 책 하나하나는 물질적 차원에서 완전히 다 다릅니다. 하지만 글자가 흐려져서 겨우 읽을 수 있는 상태라 해도 책에 담겨 있는 정보들, 생각들은 똑같습니다. 종이 문서란 물질적 영역과 완전히 다른 세계인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읽는 이 책을 어떤 판본으로 접하건 내용은 같다고 할 수 있어요. 처음 드는 생각과는 달리 책은 디지털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 김재인,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동아시아, 2007, 297

 

* 이 글은 2020년 상반기에 출판될 저서 <신뢰의 혁명, 블록체인의 철학>(동아시아)의 일부를 이루는 초고입니다. 저작권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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