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모델, 배우, 사진작가, 날마다 다시 태어나는 <시스터후드> 히로인, 우사마루 마나미

  • 기자명 홍상현
  • 기사승인 2020.02.26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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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면서 그로부터 풍기는 아름다움에 취해가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 어렵기도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아름다움을 열어주려는 마음이 일기까지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한 순간에 그 아름다움의 한복판에 서있음을 느끼곤 아찔해 한다.”

여균동, 『몸』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인터뷰에 임하며 우사마루 마나미가 말했다.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아직 현재진행형이니까요. 앞만 보면서 걸어가고 싶어요.”출전: ‘시스터후드’공식 트위터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인터뷰에 임하며 우사마루 마나미가 말했다. “‘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아직 현재진행형이니까요. 앞만 보면서 걸어가고 싶어요.”출전: ‘시스터후드’공식 트위터

안성의 텅 빈 소극장에 홀로앉아 정신없이 읽다가, 뭔가로 머리를 얻어맞는 충격과 함께 필사했던 소설의 한 구절을 떠올린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19년 뒤인 지난해 10월 5일. 200페이지 넘는 장편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두 주인공(“여자”와 “남자”)의 ‘몸’에 대한 대화가 아니라‘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작가의 언설에 매료되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지극히 유미주의적인 그 글에서 연극을 공부할 무렵 다시 펼쳐든 루카치 문예이론서의 필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해운대의 호텔 로비에서 막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한 해변을 바라보다, 20대 시절 읽은 책을 떠올린 이유로 그밖에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우선 작가가 2005년 <비단구두>로 같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는 영화감독이기도 하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 바로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이자 <시스터후드>의 히로인 우사마루 마나미가 『몸』의 “여자”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

다만 우사마루가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이유는 무척 이례적이다. 그녀는 열아홉 살 되던 해 죽기로 결심하고 ‘유영(portrait du défunt)’으로 누드사진을 준비하기 위해 카메라맨을 섭외했다. 하지만 ‘유영’은 온라인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대단한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고, 이에 생각이 바뀐 우사마루는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에 뛰어들었다. 얼마 후 무대 배우로 데뷔했고, 광고와 뮤직비디오, 영화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커리어를 쌓다가 급기야 사진작가로까지 데뷔하기에 이른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의 창 부문 초청작 <시스터후드>에서 우사마루는 실명 그대로 등장, 불리한 계약조건 등과 같은 직업상의 어려움과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민, 그리고 자신의 일을 이해해주지 않는 어머니와 갈등하는 모습 등을 통해 자유를 꿈꾸는 이상과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청춘을 연기한다.

우사마루가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이유는 무척 이례적이다. 그는 열아홉 살 되던 해 죽기로 결심하고 ‘유영(portrait du défunt)’으로 누드사진을 준비하기 위해 카메라맨을 섭외했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우사마루가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이유는 무척 이례적이다. 그는 열아홉 살 되던 해 죽기로 결심하고 ‘유영(portrait du défunt)’으로 누드사진을 준비하기 위해 카메라맨을 섭외했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장편상업영화 데뷔작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셨다.

우사마루 마나미

해외에서 상영되리라고 상상조차 못했다. 연기 경험이 일천하다 보니 다큐멘터리 촬영분량을 찍을 당시 영상촬영 자체를 처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저라도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시스터후드>가 초대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청난 영광이다. 한국영화 작품 중에서는 <아가씨>를 무척 인상 깊게 보았다.

 

홍상현

모델로 데뷔하게 된 계기도 드라마틱하다.

우사마루 마나미

원래 사진에 전혀 흥미가 없었는데, 19세 때 알몸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스무 살은 여성에게 ‘고비’와도 같은 시기이다. 소녀와 어른 사이의 경계선. 그런 중요한 시기를 최대한 기록하고 싶었다. 10대 시절, 저 스스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지라 마지막에 세상에 나올 때 그대로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면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스터후드’에서 우사마루는 실명 그대로 등장, 불리한 계약조건 등과 같은 직업상의 어려움과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민, 그리고 자신의 일을 이해해주지 않는 어머니와 갈등하는 모습 등을 통해 고뇌하는 청춘을 연기한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시스터후드’에서 우사마루는 실명 그대로 등장, 불리한 계약조건 등과 같은 직업상의 어려움과 크리에이터로서의 고민, 그리고 자신의 일을 이해해주지 않는 어머니와 갈등하는 모습 등을 통해 고뇌하는 청춘을 연기한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그저 ‘일’이 아니라, 어떤 ‘의식(ceremony)’같은 느낌이다. 잠깐 들어도 ‘나’에 대한 사색이 아주 깊은 수준인데.

우사마루 마나미

형제만 여섯에다 집에 돌아가도 설 자리가 없었다. 콤플렉스가 심했지. 다들 우수했으니까. 막내로써 어떤 일을 하든 그런 언니ㆍ오빠들에게 이길 수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뭘 해도 흉내 같고. 저 자신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느낌. 당시 인터넷을 좋아했다. 일기를 쓰거나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하는데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상대는 오히려 사이버세계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들도 많은 편이고 가족들과도 나름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현실세계에는 진정한 내가 없었던 거다.

 

홍상현

<시스터후드>에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인 모친이 하고 있는 일을 이해해주지 않아 괴로워하는 시퀀스가 나온다.

우사마루 마나미

어머니는 제가 지금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 걸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 ‘누드모델 일을 한다’고 전하면 새삼 충격을 받고 슬퍼하실까 두려워 일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는다. 이번에 부산국제영화제에 온 것도 말씀드리지 않았다. 물론 부모자식 관계로서는 무척 친한 편이다. 저 자신 그 부분을 소중히 하고 싶고.

일방적으로 제 모든 모습을 받아들여 달라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우사마루는 주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든 그 이미지에 따라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우사마루는 주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든 그 이미지에 따라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지금까지의 이력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당신에게 ‘이미지’란, ‘보여지는’, 즉,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능동적 수단’이었다는 점이다.

우사마루 마나미

다른 사람에게 “우사마루 씨는 이런 이미지”라는 말을 들어도 딱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스스로를 보여주기 힘들 정도로 남의 시선을 의식했지만 모델 일을 시작하면서 주변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든 그 이미지에 따라 저 자신이 변하는 건 아니잖은가. 스스로 소중히 여기는 게 무엇인지만 알고 있고 있으면 된다.

또한 앞서‘다시 태어나는 일’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 아직 현재진행형이니까. 앞만 보면서 걸어가고 싶다.

 

홍상현

연기 겸업을 하게 된 것도 그 연장선상이겠지?

우사마루 마나미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다. 배우와 모델은 정반대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도 주어진 역할이 저와 잘 맞아떨어진 거다. 다른 작품에서는 좀 달랐거든. 하지만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이 연기자로서 좀 더 노력해 봐도 되겠다는 자신감을 줄 것임은 분명하다.

최근 사진작가로 데뷔한 우사마루는 “찍는 일이든 찍히는 일이든 사진 자체가 너무 좋다”고 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이 1대 1로 만나 이루어지는 인물사진 작업이 매력적이라고.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최근 사진작가로 데뷔한 우사마루는 “찍는 일이든 찍히는 일이든 사진 자체가 너무 좋다”고 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이 1대 1로 만나 이루어지는 인물사진 작업이 매력적이라고.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사진작가로도 데뷔했다. 물론 모델도, 연기자도 크리에이터라고 할 수 있지만, 사진작가가 된다는 것은 좀 다른 차원이지 않은가?

우사마루 마나미

사진을 찍히는 것과 찍는 것은 의외로 비슷하다. 저를 찍는 사람은 결국 저를 통해 그 자신을 보고 있는 거니까. 저 역시 사이좋은 여배우를 찍을 때는 제 감정을 이입하고 대화도 한다. 찍는 일이든 찍히는 일이든 사진 자체가 너무 좋다. 특히 사람과 사람이 1대 1로 만나 이루어지는 인물사진 작업이 매력적이다.

 

홍상현

<시스터후드>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이 궁금하다.

우사마루 마나미

서로 다른 두 장르가 합쳐져 있어서일까 솔직히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았다. (옆에 앉아있던 니시하라 다카시 감독까지 전원 웃음) 그래도 3, 4년 전부터 촬영해 온 작품을 겨우 내놓을 각오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끝까지 함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창작자의 뜨거운 마음에 부응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시스터후드’에서는 최근 ‘독립영화계의 블루칩’으로 활약하고 있는 엔도 니이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우사마루는 엔도에 대해 “워낙 ‘튀는’외모의 소유자라 막연하게 ‘개성이 강하겠지’정도로 생각했는데, 여러 모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시스터후드’에서는 최근 ‘독립영화계의 블루칩’으로 활약하고 있는 엔도 니이나(왼쪽)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우사마루는 엔도에 대해 “워낙 ‘튀는’외모의 소유자라 막연하게 ‘개성이 강하겠지’정도로 생각했는데, 여러 모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파트너로 출연하는 엔도 니이나와의 캐미스트리는 어땠나?

우사마루 마나미

니이나 씨를 너무 좋아한다. 아시다시피 워낙 ‘튀는’외모의 소유자라 막연하게 ‘개성이 강하겠지’정도로 생각했는데, 여러 모로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를 만나면서 <시스터후드>가 인간적인 면에서의 캐스팅 또한 훌륭한 작품임을 확신했다.

 

홍상현

말이 나왔으니 이야긴데, (웃음) 배우의 입장에서 보는 니시하라 다카시는 어떤 감독인가.

우사마루 마나미

닌자 처럼 소리 없이 숨어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인물? (웃음) 이것저것 지시하기보다 일단 애정을 가지고 따듯한 시선으로 모두를 끈기 있게 지켜볼 줄 아는, 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우사마루는 ‘시스터후드’를 통해‘누구에 의해서든 함부로 규정되지 않고, 방해받을 이유가 없는, 자유로운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우사마루는 ‘시스터후드’를 통해‘누구에 의해서든 함부로 규정되지 않고, 방해받을 이유가 없는, 자유로운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제공: 부산국제영화제

홍상현

<시스터후드>의 히로인, 우사마루 마나미로서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우사마루 마나미

인터뷰 장면에서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어려움에 대해 질문 받았을 때, 저는 역으로 ‘여성으로서의 고단함은 없다’고 단언해 버렸다. 물론, 인간으로서의 난제(serious problem)가 쌓여있고, 그 안에서 각자 안고 있는 괴로움도 있겠지. 여기서의 핵심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점 아닐까.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섣부른 비난으로 얼버무릴 것도 아니다.

다만, 뭐든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어디서 행복을 느끼는지에 대해서도 각자 개인차가 존재함을 인정해야겠지. 사회가 그런 다양성을 좀처럼 수용해주지 않으니 문제가 생기는 것일 테고.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유로운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누구에 의해서든 함부로 규정되지 않고, 방해받을 이유가 없는.

우사마루 마나미는 “다큐멘터리 촬영분량을 찍을 당시 영상촬영 자체를 처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저라도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시스터후드’가 초대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청난 영광”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출전: ‘시스터후드’ 공식 트위터
우사마루 마나미는 “다큐멘터리 촬영분량을 찍을 당시 영상촬영 자체를 처음 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저라도 부산국제영화제의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설마 ‘시스터후드’가 초대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청난 영광”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출전: ‘시스터후드’ 공식 트위터

“<시스터후드>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함께해서 정말 좋았어요. 앞으로 편안함, 더러는 힘듦까지도 포함한 일상의 느낌을 공유하며 많은 분들과 작품을 통해 소통하고 싶습니다.”

맨발로 객실의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해외매체와의 인터뷰는 처음이라 너무 긴장할 지도 모르겠다’던 본인의 우려가 무색할 만큼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자연스러움으로 인터뷰에 임하는 그를 바라보며, 계속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단어가 하나 있다.

소확행(小確幸).

어쩐지 인정욕구가 무척 강한 사람일 것만 같다는 선입견의 정반대 지점에 서 있는 느낌. 물론 그 묘한 엇갈림을 푸는 데 딱히 긴 시간이 걸린 건 아니다. 순간, 부산에 오기 사흘 전, 그녀가 자신의 계정에 업데이트 해놓았던 트윗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력이 없어서 맛있는 카레를 먹으려고 자주 가는 끽차점에 갔더니 라스트오더가 끝나 있어서 조용히 돌아가려고 하는데, 마스터가 ‘카레라면 가능하다’고 말해주신 덕에 엄청 힘을 얻은 밤입니다. 배도 마음도 가득 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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