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간 해결 안된 '다큐 도용' 논란..."동정조차 필요없다" 양영희 인터뷰

  • 기자명 박강수 기자
  • 기사승인 2020.02.20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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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선언(1998)>과 <흔들리는 마음(1996)>은 9분 23초가 같다.

두 작품은 모두 재일조선인•한국인 학생들의 이름과 정체성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본명선언>은 서울영상집단에서 제작했고 홍형숙 감독이 연출했다. 1998년 9월 완성되어 같은 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운파상(다큐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흔들리는 마음>은 그보다 2년 앞선 1996년 4월 NHK에서 방영된 교양 다큐다. 프리랜서 시절 양영희 감독이 촬영해 NHK와 공동으로 제작했다. 러닝타임은 <본명선언>이 약 67분, <흔들리는 마음>이 약 30분이다.

문제는 9분 23초다. 여기에는 한국 이름(본명)과 일본 이름(통명) 사이에서 고뇌하는 아마가사키 고등학교 재일교포 학생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모두 양영희 감독이 찍었던 영상으로 TV 다큐 <흔들리는 마음>의 방영분 6분 40초와 미방영분 2분 43초가 흑백 처리되어 장편 다큐멘터리 <본명선언> 중반부에 그대로 쓰였다. 이를 양영희 감독은 “단순 자료 제공 및 취재 협조 차원에서 내준 영상을 허가 없이 무단 도용했다”고 본다. 반면 홍형숙 감독은 “불충분했을지는 몰라도 분명한 협의가 있었다. 무단 도용일 수는 없다”고 반박한다.

양영희 감독의 문제제기는 1998년 10월 16일 중앙일보에서 처음으로 보도됐다. 보도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심사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표절 아님’ 결론을 냈다. 당시 입장문에는 “(중앙일보의) 기사가 한국 다큐멘터리 작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로 인해 향후 작가들의 활동이 위축될 것을 우려한다”는 문장이 실렸다. 양영희 감독은 비교시사회를 요구하며 반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작사인 서울영상집단에서는 <본명선언> 상영 및 공개를 중지했다. 그렇게 논란은 봉인됐다.

부산영화제 심사위원회의 성명. 홍형숙 감독 페이스북 캡처.

 

고발이 재개되는 데 22년이 걸렸다. 양영희 감독이 다시 입을 열면서 1998년에 무산되었던 비교상영회가 2020년에 성사됐다. 당시 국적 문제로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던 양 감독은 그 사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2004년), 세 편의 작품을 냈다. “22년의 시간을 ‘캐치 업(catch up)’하고 싶다” 비교상영회가 있던 지난 7일 <흔들리는 마음>과 <본명선언>을 연속 상영한 뒤 양 감독은 이렇게 첫 마디를 뗐다. 발언은 두 시간여 가까이 이어졌다. 양 감독은 “홍 감독의 사과는 필요 없다. 다만 이 사건을 한국의 창작자들과 창작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교훈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을 맺었다.

그 자리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듣고자 지난 11일 양 감독을 다시 만났다. 차기 작품 후반 작업을 위해 양 감독은 6개월 넘게 한국에 머물고 있다. 작품을 만드는 일과 고발을 재개하는 일을 같이 진행하게 된 모양새다. 양 감독은 비교상영회 이후 나흘 사이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며 문제제기 이후 소회와 향후 계획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22년의 시간을 따라잡는 일은 이제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양영희 감독. 양영희 감독은 재일조선인 출신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으로 북한과 일본, 한국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자신의 정체성을 탐사하고 국가와 민족에 가려진 가족과 사람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디어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가족의 나라(2012)' 등을 연출했으며 베를린영화제, 선댄스 영화제 등지에서 수상했다. (촬영: 허윤수)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양영희 감독. 양영희 감독은 재일조선인 출신 다큐멘터리/영화 감독으로 북한과 일본, 한국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자신의 정체성을 탐사하고 국가와 민족에 가려진 가족과 사람의 모습을 담아내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디어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 '가족의 나라(2012)' 등을 연출했으며 베를린영화제, 선댄스 영화제 등지에서 수상했다.

 

비교상영회를 통해 확인된 명확한 사실 중 하나는 ‘NHK 저작권’ 문제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은 양영희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NHK를 통해 방영된 방송국의 저작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명선언>에는 ‘흔들리는 마음’이나 ‘NHK’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대신 크레딧에 ‘8mm 취재 양영희’라고 만 되어 있습니다. 관련해서 비교상영회에 NHK도 왔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NHK 서울 지국에서, 제가 초대한 것도 아닌데 왔더라고요. (NHK 쪽에서)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비교상영회 때도 말했듯이 1초라도 영상을 쓸 때는 가편집을 보여주고 합의를 하는 것은 상식이에요. 일본에서는 당연한 상식이고 여기 한국에서 방송하는 친구들한테 물어봐도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안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들한테 상식을 맞출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만약에 <흔들리는 마음>이라고 명기가 되어 있어도, 크레딧에 ‘NHK 협조’라고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진짜 합의’가 있어야죠. NHK에서 <본명선언> 가편집을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거에요. “아니 이렇게 쓰면 안 된다. 당신들 정신이 있냐”라면서. ‘마음대로 쓰세요’라는 계약서가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는 안 만들 거에요.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요, ‘베껴 옮겨 붙이기’라고 할까. 그걸 왜 했겠어요. ‘(촬영이) 모자라니까’지요. 더 찍으면 되잖아요. 1년이고 2년이고. 저도 <디어평양> 10년 걸려서 만들었어요. 저는 지금도 궁금해요. 왜 그 해 부산에 내야만 했었는지. 꼭 98년 부산영화제에 넣어야 한다는 예정이 있었던 것처럼 보이잖아요.

*<본명선언>은 1998년 9월 20일 완성됐고 나흘 뒤인 24일부터 시작된 부산영화제에 출품되어 10월 1일 상을 받았다.

 

결국 가편집을 보이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이 다 생략된 거네요.

네. 그래서 <본명선언> 처음에 보면 저를 ‘북조선 국적’이라고 나래이션에서 소개하는데 그건 틀렸어요. 그런 국적은 없어요. 재일 교포 중에 한국 국적이 아닌 사람은 ‘조선 국적’, 여기에도 꼭 따옴표를 넣어야 합니다. ‘조선’이라는 국적도 없거든요. 일본 국적법에서는 한국밖에 나라로 인정을 안 하기 때문에 한국 국적을 취득 안 한 재일교포는 ‘조선 반도 출신자와 그 후손들’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조선’이라는 국적에는 꼭 따옴표가 붙어야 하는데 ‘소위’ 조선 국적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북조선 국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아 재일교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웃어요. 내가 만약 (출연에) 합의를 했고 (가편집을 보며) 같이 상의를 했다면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지요. 또 하나, 아마가사키 고등학교는 오사카가 아니라 효고 현에 있어요. 효고 현 아마가사키 시에 있는 아마가사키 고등학교입니다. (<본명선언>에서 자막으로 나오는) ‘오사카 아마가사키 고등학교’라는 것을 보면 역시 일본 사람이 웃어요. 경기도에 있는 학교를 강원도에 있는 학교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촬영을 한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셨나 봐요. 그런 작품이 수상을 했다고 하니…

 

수상 이후 98년 당시에 중앙일보에서 ‘도용 논란’ 관련해서 첫 보도를 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다큐멘터리 심사위원들이 회의를 열어서 ‘표절이라고 볼 수 없다’ 결론을 내렸어요.

그 분들이 <흔들리는 마음>을 봤을까요? 봤으면 그렇게 결정이 나왔을까요? 중앙일보에서 기사가 나왔으면 진짜 표절인지 어떤지 알아봐야 되잖아요. 도용이 있는지 알아봐야 되잖아요. 그러면 심사위원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뭐에요?

 

<흔들리는 마음>을 봐야죠.

봐야죠. <흔들리는 마음>이 없나? 중앙일보에 달라고 하면 주잖아요. 그때 우리가 뉴욕에서 (<흔들리는 마음> 테이프를) 몇 개를 보냈는데, 신문사, 잡지사, 아마 부산영화제에도 보냈을 거에요.

당시 양영희 감독은 뉴욕에 있었고 한국 국적이 없어 입국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건 진짜 따져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기자 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어요. 그 세 분(심사위원)이 지금 두 작품을 보면 같은 답을 하실까, 아주 궁금해요. 그때 두 작품을 보고도 그렇게 결정했다고 하면 더 큰 문제이고요.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번 문제제기 때문에 아주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때 세 분 전원이 진짜 동의를 했었는지, 한 분은 반대를 했지만 다수결로 그렇게 됐는지, 누가 무슨 발언을 했는지, 거기까지 따져야 한다고 봐요. ‘(한국 독립 다큐) 진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때 관행이 그랬다’, 계속 그렇게 넘어왔잖아요. 따지지 않으면 개선이 안 됩니다. 서른 시간짜리 작품도 아니고 삼십 분 보면 되는데 그걸 안 하나요. 서른 시간짜리라고 해도 봐야지.

 

당시 심사위원회의 결정문에는 “(<흔들리는 마음> 영상은) 문맥상 기능이 ‘배경의 맥락’에 그치므로 이는 결코 표절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감독과 자료제공자 간의 개인적인 상호 의사소통에 문제인 것으로 개인적 차원에서 풀어져야 할 문제로 보인다” 등이 근거로 나와 있다. 여기에 기초한 홍 감독 측의 주장은 언론중재위에서 인용되어 98년 11월 12일자 중앙일보에 반론 보도로 실렸다.

언론중재위 합의서. 홍형숙 감독 페이스북 캡처.
언론중재위 합의서. 홍형숙 감독 페이스북 캡처.

심사위원회 결정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에서는 양쪽 당사자를 불러 비교시사회, 공청회, 기자회견을 열기로 결정했으나 이것도 결국 흐지부지됐다. 이를 두고 당시 사건을 최초 보도했던 중앙일보 이영기 기자는 “(집행위원회는) 석 달이 지나도록 일언반구가 없다. 이번 사태와 관련한 대응을 보면 규모에 걸맞은 체계와 당당함을 갖춘 조직인지 의문스럽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지난 비교상영회 자리에 참석한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유관 기관의 장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최대한 진실 규명에 가까이 가보고 협조코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라면서 “(현재) 저 개인이나 영화제의 어떤 입장 표명은 없을 것이고 빠른 시일 내 ‘본명선언 사태’가 진실이 밝혀지고 모든 것이 명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22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여러 차례 초청되고 한국을 오면서도 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이니까 제가 무얼 따져야 하는지 알지 그 동안은 사실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았어요. 그래서 조심스러웠죠. 또 무엇보다 (이 사건을) 안 끄집어낸 것은, 논의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후지와라 선생하고 아이들(<흔들리는 마음>에 등장하는 재일교포 학생들과 교사)의 모습이 또 나오게 되잖아요. 아, 그게 좀 미안하고 가슴도 아프고…

 

어떤 부분이 미안하신 건가요.

그분들은 (일상 속으로) 카메라를 받아들여서 다큐멘터리에 협조를 해줬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원래 작품이 아니라) 표절•도용 사건의 프레임 안에서 주인공으로 나타나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작품에 나오는 학생들하고 후지와라 선생한테 머리 숙여서 허락을 다시 받아야 될 것 같아요. “‘작품으로서’ 보다 ‘표절•도용 문제, 한국의 독립 다큐 진영 내부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고발하기 위해서’ 당신들의 얼굴이 계속 나온다”라고. 그 허락을 위해서 다시 다 만나자고 하고 있어요, 지금. 진짜 백 번 머리를 숙여도 모자라요, 후지와라 선생님과 애들 앞에서.

다큐하는 사람한테는 그래서 다큐가 무서운 거에요. (다큐멘터리에 찍히는) 사람들은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원래 영화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단지 감독을 믿고 카메라를 받아들인 거에요. 그만큼 다큐하는 사람들은 조심을 해야 돼요. 영화계 아닌 사람들 끌어들이는 ‘인간 쓰레기’라는 자각이 있어야 해요. 우리가 나쁜 사람이라는 자각을 가지면서, 비록 나쁜 인간이지만 최대한 고맙다는 마음으로 이 사람들을 대해야 하고 속이면 안 돼요. 사람들을 카메라 안에 끌어들이면서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 겸손해야 해요. 이걸 똑똑히 알아야 해요.

 

비교상영회 때도 <본명선언> 속 김성미(무라카와 키요미)씨 초상권 문제를 지적하면서 “초상권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작품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한 부분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김성미씨는 <흔들리는 마음>에 나오는 학생이다. <본명선언>에서는 제작진이 그와 만나지 못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본명선언>에 삽입된 <흔들리는 마음> 영상 속에는 김성미씨가 등장하기 때문에 <본명선언> 제작진은 실제 김성미씨를 만나 허락을 받지 않고 그의 얼굴을 영상으로 내보낸 셈이 된다. 비교상영회 자리에서 양영희 감독은 이를 ‘초상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나중에 몇 년 지나서 (그분이) “아 그 작품 불쾌해. 왜 내 얼굴 그렇게 썼어”하면 이제 (작품이) 못 나가는 거에요. <본명선언>도 이렇게 문제가 일어나니까 못 내잖아요.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성실하게 안 하면 작품 상영을 못하게 되잖아요. 당사자들에게 도덕적으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 속된 말로 나중에 다른 말 안 듣도록 잘 해놔야 작품을 지킬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조심해야 된다는 거에요.

아니면, 찍힌 사람들로부터 “불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잘 만들었더라”, “(찍힐 때는) 불편했지만 영화가 의미가 있네” 이런 말을 나오게 해야, 감독이 이렇게 이겨야죠. 그것이 설득이지. 10분짜리 뉴스 프로그램 만들 때도 조심을 해야 되는 문제를 한 시간 넘는 장편을 만드는 사람이 진짜 너무 둔해요. 자기 작품을 위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거죠.

촬영: 허윤수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로 결심한 사정이 궁금합니다.

최근 일본에도 화제가 되는 사건이 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몇 번 온 마츠에 테츠아키 감독의 작품 중에 <동정을 프로듀스(童貞。をプロデュース, 한국 제목 ‘동정’ 2007년작)>이라는 다큐가 있습니다. 성 경험이 없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에 나온 주인공 남자가 당시 촬영현장에서 거의 성폭행을 당하듯 찍혔다는 것을 14년만에 고발을 했어요.

그런데 주요 미디어에 기사도 전혀 안 나고 영화제 사람이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그런 선배 감독들이 와주거나 하지 않아요. 고발한 사람이 아주 고립된 상황입니다. 프리랜서 기자 정도가 포털에 기사를 써주고. 그분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고, 아주 제 일 같더라고요. 저도 트위터에 한마디 썼고 (<본명선언> 사건도) 20년 이상 지났지만 문제 제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우연히 김명화씨랑 <씨네21> 김성훈 기자한테 연락이 왔어요.

*<씨네21>에서는 지난 1월 3일 홍형숙 감독이 자신의 2009년 작품 <경계도시2> 스태프들에 10년 넘게 인건비를 지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독 보도했다. 이 보도는 당시 영화 프로듀서였던 김명화 굿필름 대표의 문제 제기로 시작됐다. 이 기사를 본 양영희 감독의 기고문이 같은 매체를 통해 공개되면서 ‘<본명선언> 도용 논란’도 재점화됐다.

 

먼저 연락을 받으신 건가요?

네. 너무 놀라서 우연인가, 필연인가 생각했죠. 그쪽에서 <경계도시2> 건으로 홍형숙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제 사건을 알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경계도시2> 기사를 봤어요. 처음에는 취재도 거절했었는데 결국 만났죠.

사실 처음에는 김명화씨 혼자 싸우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혼자 싸우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잖아요. 아마 내가 22년 전에 그때, 혼자 ‘도용이다, 표절이다’ 하는 모습도 한국에서는 ‘이상한 양영희’로 보였을 거에요. 이 사람(김명화) 혼자 이상한 사람 되면 좀 너무한 거 같아서 맨 처음에는 ‘지원사격’하는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어요. 그렇게 전문이 나올지는 몰랐죠(웃음). 그때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은 김명화씨에 대한 <씨네21> 기사에 나온 그 은행 계좌(아래 사진 및 사진 설명 참조)였어요.

<씨네21>는 후속 보도를 통해 당시 <경계도시2>에서 스태프들에게 인건비 명목의 돈을 지급한 뒤 이를 다시 되돌려 받는 방식으로 허위 정산을 했다는 기사를 냈다. 기사에 실린 모 ‘스태프1’의 계좌내역 사진에는 150만원이 들어왔다 하루 만에 빠져나가고 잔액 31원이 남은 내역이 나와 있다. 씨네21 기사 화면 캡처.

 

저도 전기 요금을 못 내서 전기가 끊기고 그러면서 영화를 만들어 왔어요. 지금도 촬영 감독한테 돈을 줘야 하는데 돈이 없는 속에서도 얼마를 드리면 되고, 얼마를 드려야 납득이 되시는지, 이거 밖에 없어서 미안하다 이런 마음으로 돈을 드려요. 그런데 (<경계도시2>에서) 그걸 줬다가 다시 (계좌로) 돌리라고 하고 남은 금액이 '31원'이라고 하니까 내가 미칠 것 같았어요. 돈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집중을 못하는 거잖아요, 창작에. 왜 전기 값 걱정하면서 집중을 못하는 것을 제가 경험을 했으니까요.

31원이라는 그 계좌는 인권 문제에요. 내 것도 인권 문제지만 홍형숙 감독하고 강석필씨(홍형숙 감독의 남편이자 <경계도시2>와 <본명선언>의 프로듀서)가 얼마나 스태프들의 인권을 짓밟으면서 일을 해왔는지… 그 계좌 기사를 보고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정말 나도 돈은 없지만 나라도 그 스태프 분들 모아서 얼마라도 드리고 싶었어요.

(촬영: 허윤수)

 

비교상영회 자리에서는 ‘법적 조치를 취하실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관심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관심 없다’는 말이 더는 홍형숙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을지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관심 없다는 말은 아주 차가운 말이에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동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이제까지 홍형숙씨에 대해서 재판할 생각도 없다고 해왔지만 최근에 좀 생각이 바뀌고 있어요. 아직 결정은 안 했지만, 여러 가지 알아볼수록 계획적으로 저를 속이신 거 같은 느낌도 들고, 22년간 이 문제를 떠올릴 때마다 많이 울었어요. 억울해서. 무엇이 억울한가 하면 왜 그런 사람을 믿었을까. 이거 밖에 없어요. 그 사람을 믿은 제 책임 때문에 후지와라 선생하고 학생들한테도 미안하고요. 그래서 망설이기도 했는데 너무 가만히 있으면 내가 바보 되는 거 같잖아요.

또 홍형숙씨 아래서 일한 서울영상집단 친구들이나 독립영화 하는 젊은 학생들을 만나보니까 무슨 ‘선배들이 그렇게 해 오셨으니까 할 수 없다’, 또는 ‘그렇게 배웠다’는 식으로 말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이 친구들 큰일 난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너무 안타깝잖아요. 비싼 돈 내고 영화 학교 다녔다는 친구들이, 돈 없어도 열심히 창작을 하려고 버티는 학생들이 미친 선배들 만나가지고 이상한 관례만 배워서, ‘이러면 안 되겠다’ 생각했죠.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저는 원래 사회를 위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절대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인데, 자기 욕심으로밖에 일을 안 하는데, 비교상영회를 하면 나의 작은 목소리라도 주워줄 사람이 있겠지 생각했던 거구요.

 

다음 대응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신 거네요.

이렇게 안 하면 또 지지부진해지고 유야무야 되고, 문제 제기만 되풀이되는 거잖아요. 철저하게 해야죠. ‘관례였다’, ‘그때 그 당시에는 인식이 그랬다’ 그런 말은 이제 하지 맙시다. 그 말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무리 선배고 스승이라도, 부모라도 비판할 건 비판해야죠.

누구는 ‘웬 재일교포가 한국 와서 국적 얻었다고 설치냐’라고 할지 모르고 또 ‘왜 리버럴(진보)쪽 사람들을 치냐. 양영희 그 여자는 깃발 부대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말할 거에요. 충분히 예상이 되고 지치는 일이에요. (다시 문제 제기하는 게) 힘든데 그래도 (영화계가) 조심을 해야 되는 문제니까요.

어느 사회나 썩고 있는 거 알아요. 부산영화제만 그런 게 아니고 모든 영화제가 다 문제 많고 모든 영화 팀에 문제가 있고 모든 진영에 문제가 많지요, 오른쪽도 왼쪽도. 그래도 내가 믿고 싶은 영화계 안에서, ‘버텨보자’, ‘열심히 해보자’하는 젊은 친구들이 한 사람이라도 나 같은 경험을 안 하고, 더 좋은 선배들을 만났으면 해요.

이렇게 당한 사람이 말 안 하면 누가 말하겠어요(웃음). 당했으니까 알고, 당했으니까 말할 수 있지. 말하는 거 싫은데, 그래도 당해서 말할 수 있으니까 말해야 될 것 같아요.

 

양영희 감독과 인터뷰가 끝나고 사흘 뒤 홍형숙 감독 측과 연락이 닿아 반론을 받았다. 홍형숙 감독과 강석필 피디는 이 자리에서 “협의의 불충분함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도용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양영희 감독의 역할과 <흔들리는 마음> 영상 사용 내용이 적힌 <본명선언> 구성안을 양 감독과 당시 공유했으며, 제작 과정에서 진행한 인터뷰 녹취록에도 양 감독이 자신의 역할과 작품의 방향을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는 주장이다.

이 이야기는 지난 4일 홍형숙 감독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내용과 같다. 양영희 감독은 비교상영회 자리에서 “구성안 비슷한 것을 언뜻 본 기억이 있을 뿐 (홍 감독이) 자세히 알려준 적은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명시적인 동의나 합의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있냐”는 질문에 강석필 피디는 “그게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안 되었을 것”이라며 “서류화된 명시적 계약서는 없지만 정황상 인지가 있었다”고 답변했다.

NHK의 저작권에 대해서는 “NHK는 생각도 못했다. 우리는 NHK에 방영된 영상을 편집한 것이 아니라 양영희 감독이 제공한 원본 영상에서 발췌해 썼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 왔다. 김성미씨의 초상권 문제 역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홍 감독 측은 “당시의 저작권 인식이 지금과 달랐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잣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옳은가”라면서 “(저의) 창작 윤리를 전부 부정하는 표절, 도용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비교상영회 자리에 참석한 관계자들의 판단은 다르다. 98년 당시에도 도용 논란과 관련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던 전찬일 평론가는 “(비교상영회를 보고) 98년에 썼던 원고가 부끄러웠다. 두 영상을 보고도 표절이 아니라고 한다면 세상에 표절은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시무 평론가는 “논문으로 치면 한 챕터를 인용도 없이 끼워 넣은 것이다. 홍형숙씨는 해명을 할 것이 아니라 사죄를 하고 영화 관련 공직에서 사퇴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형숙 감독은 현재 한국예술종합대학교 정교수 임용 최종 후보에 올라 있다. 한예종 측에서는 “아직 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두 영상을 확인한 한 변호사는 “복제권(도용) 침해도 문제지만, <흔들리는 마음>에 대한 ‘2차적저작물작성권’ 침해로 볼 수도 있다”고 전해왔다. 2차적저작물작성권은 원작을 각색하거나 변형한 창작물에 대한 권리다. 원작의 세계관, 작품관, 중심 이야기에 기반해 창작된 후속 작품들이 해당된다. 즉, <본명선언>은 <흔들리는 마음>이라는 단편을 장편화한 ‘2차적 저작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2차적저작물작성권은 영화 쪽 표준계약서에서도 따로 명시할 정도로 중요한 저작권의 핵심”이라는 것이 이 변호사의 설명이다.

양영희 감독은 인터뷰 끝에 향후 계획을 밝히면서 법적 대응을 비롯해 ‘영화계, 문화계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추가 비교상영회’ 등을 구상 중이라고 했다. 20여년만의 고발을 다시 묻을 수는 없다는 결심이 목소리에 묻어 났다. 이에 대해 홍형숙 감독은 “미진했던 부분에 대해 인정했고 사과도 했다. 양영희 감독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말했다.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다. <본명선언>과 <흔들리는 마음>은 9분 23초가 같다. 이 10분 남짓한 시간이 22년 세월을 거슬러 한국 영화계의 창작윤리를 되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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