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매일경제야. 한 글자도 안맞아"

  • 기자명 김형민
  • 기사승인 2020.03.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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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신문 노원명 논설위원이 역대급 칼럼을 쓰셨다. 제목부터 매우 도발적이게 점잖다. <"대구 사람들 참 점잖다."> 제목부터 고개가 갸웃거려졌는데 내용을 읽으면서 머금게 된 실소가 화사한 미소로 발전하고 급기야 폭소를 터뜨렸다가 박장대소로 마감하도록 만든, 희대의 명작이었다. 가히 2017년 4월, 북핵 정국에서 ‘한 달 후’ 문재인 대통령이 당할 일을 상상하여 썼다는 이정재의 저 유명한 중앙일보 칼럼 <한 달 후 대한민국>, 그로부터 전개된 정상회담 정국 내내 우렁찬 성지(聖地)로 발돋움했던 문제작에 필적할 만하다. 그 독후감이 너무도 치열하고 웅대하여 이 졸렬한 필치로는 감히 반론(反論)의 발뒤꿈치도 따르지 못하겠는 바, 그 한 줄 한 줄을 뜯어내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저 명문(名文)의 광휘에 편승하고자 한다.

 

2020년 2월 28일 매일경제신문 칼럼 "대구 사람들 참 점잖다"
2020년 2월 28일 매일경제신문 칼럼 "대구 사람들 참 점잖다"

 

첫줄부터 보자. “대구 출신 서넛이 카톡으로 고향 친지 안부를 묻는데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대구 사람들 참 점잖지 않노?’”

일단 ‘대구 사람들 참 점잖지 않노’는 말부터 팩트체크. 적어도 이 말을 한 사람은 대구 사람도 아니고 경상도 사람도 아니다. 타 지역 사람들이 즐겨 헷갈리는 문제가 경상도 사투리 물음형 ‘했노?’와 ‘했나?’의 용례다. 무턱대고 ‘노’자를 붙이는 것이 바로 일베 아이들의 무심함이거니와 경상도 사투리는 이 지점에서 매우 엄격한 기준을 지니고 있다. ‘노’자가 붙으려면 반드시 의문사가 앞에 와야 한다. 즉 “니 밥 뭇나?”라고 하지 절대로 “니 밥 뭇노?”라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 학교 가나?”지 “니 학교 가노?”는 경상도 말이 아니다. ‘노’를 쓰려면 “니 무슨 학교 가노?”해야 경상도 어법에 맞는 것이다. 즉 “대구 사람들 참 점잖지 않노?” 같은 말은 쓰지 않는다. 경상도의 표준말은 “대구 사람들 참 점잖지 않나?”가 되겠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대구 가서 길을 막고 물어 보라. 자 진도 나가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수 없다. 여당 대변인 입에서 '대구 봉쇄' 얘기가 나왔는데도 대구 사람들은 그저 속으로 끙끙 앓을 뿐이다.”

팩트가 아니다. 홍익표 대변인의 오만함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고 ‘귀태’ 운운할 때부터 임미리 교수를 대뜸 고발하기까지 이미 그 싹수는 황금빛으로 노랬다. 그런 사람이니 봉쇄 운운의 사고를 친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고 그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대구 사람들이 ‘속으로’ 끙끙 앓은 것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민심이 들끓었고 홍익표는 잘렸다. (아니 잘랐나?) 대통령까지 나서서 대구 시민들을 위로해야 했다. 그런 ‘겁도 없는’ 표현 앞에서 속으로 끙끙 앓다니 그건 대구 시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자격이 없다. 누굴 무골충으로 아는 건가 이 칼럼니스트는. 뭐 여기까지는 실소.

 

“다른 지역 같았으면 폭동 까지는 몰라도 집단 상경투쟁은 했을 것 같다. 버스 대절해서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 진을 치고 기어코 발언 당사자를 무릎 꿇리는게 한국인들의 평균 성정에 가깝다. 정부와 정권, 공권력의 권위가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대구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야흐로 이 칼럼니스트가 나를 웃기려고 작정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머금어지게 된다. 딱 하나의 반론만 드리자면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서 광주와 전라도에 대한 모욕은 ‘봉쇄’ 정도의 말 실수의 10만 8천배 정도 감행됐다. 지금껏 광주 ‘폭동’을 입에 달고 사는 정치인들이 널렸고 광주 시민군을 인민군으로 모는 인사를 자그마치 국회의원들이 초대씩이나 해서 강연회를 열었으며, 지금은 맘에 많이 안들지만 국회 증언석에 선 광주 출신 경찰 간부에게 “광주의 경찰이냐 대한민국 경찰이냐.”라고 국회의원이 캐묻는 기억도 새롭고, 며칠 전에는 야당의 대표라는 이가 80년의 그 아픔을 두고 ‘무슨 사태’ 운운하며 디스했다. 아니 ‘봉쇄’ 정도의 말 실수에 칼럼니스트가 표현한 정도의 ‘난리’를 내는 것이 ‘한국인의 평균 성정’이라면 광주 사람들은 국회를 점거하고 국회의원들 몇 명쯤의 볼기짝은 피범벅이 됐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래도 광주 시민들은 대개 참았다. 지금의 대구 시민들보다 백 배 천 배는 더 참았다. 어느 쪽이 한국인의 ‘평균 성정’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중국 대신 자국민에 코로나 책임을 돌리는 여유를 그것과 결부시키고 싶지도 않다. 그러면 국민 노릇이 너무 슬퍼진다.”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나는 폭소했다. 정확히 하자. 병은 중국에서 발생했지만 감염은 사람과의 접촉에 의해 이뤄진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한국의 코로나 전파를 시작한 건 중국에서 귀국한 한국인쪽이었고, 이 전파를 폭발시킨 ‘주감염원’은 신천지 사람들이었다. 병이란 걸 일부러 만들어서 생물학전 용으로 뿌렸다면 모를까, 중국 사람들도 결국 병의 피해자고 한국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웬 병의 ‘책임’이 필요할까. 더하여 감염이 폭발적으로 확대된 것에 신천지 교인들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들의 예배가 집단 감염의 현장이 된 것을 파악한 후에 그들의 동선과 정보를 당국에 공개하여 감염 확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비로소 ‘책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임’이라는 한국어와 질병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가 부족한 매경 칼럼니스트와 같은 국민 노릇을 하는 게 슬퍼진다. 동시에 웃겼다. 우하하하하. 폭소는 계속된다. 쭈욱.

 

“그러나 대구 사람들에게 미안한 생각은 가져야 한다. 대구인의 집단 아이덴티티가 정부·여당을 살렸다. 한국에서 선동이 가장 안 먹히는 동네가 대구다.”

하긴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이효상 국회의장이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고 떠들었던 건 ‘선동’도 아닐 것이다. 이름난 유지요 석학이요 그 아들도 천주교회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위세당당한 가문 출신의 이효상은 대구 사람이 아니었던가보다. 그는 이런 말까지 했다. “경상도 사람치고 박정희 안찍으면 미친 놈이다.” 이런 선동은 당연히 안 먹혔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박정희 동상 세우고 ‘탄신제’를 하는 곳은 대구 근처가 아니라 어디 대전 근처에 있는가 보다. 누군가 그런 선동이 어디 대구에서만 먹히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동의한다. 나는 단지 “한국에서 선동이 가장 안먹히는 동네”라는 개그에 웃을 뿐이지, 대구 사람들이 특별히 못난 것도 잘난 것도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생각한다.

 

“기호 노론에 밀려 17세기 후반이후 200년 이상 중앙 정치로부터 차단당했지만 모반사건 하나 일으키지 않았다. 정말 못 견디겠다 싶을때는 만인소를 올리는 게 전부였다. 선비적 자존심이다.”

이제는 역사 판타지로 장르가 넘어간다. 모반 사건 안 일으키기는..... 조선 후기 최대의 반란이라 할 이인좌의 난 때 이인좌는 청주에서 거병했지만 그 반란의 주요 근거는 영남 남인들이었다. 그리고 영남 남인들 중앙 정부로서는 소외됐지만 지방에서는 방귀깨나 뀌면서 소작농들 매우 치면서 잘 먹고 잘 산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모반 안 일으킨 게 자랑인가? (지금도 이씨 왕이 다스리는 나라도 아니고) 역으로 생각하기에 모반, 즉 저항은 자랑스러운 전통이 된다. 아니 특정 지역의 특권층들이 “우리가 남인감?” 하면서 다 해처먹는데 이걸 “모반 사건 하나 안 일으키고 못 견디겠다 싶으면 만인소나 올리는” 게 사람인가? 잘 훈련된 강아지인가? “와 우리만 남이고.” 하면서 대들 때는 대들 줄 알고, 부당한 것은 치고받으면서도 바꿔야 하는 게 미덕이지 그놈의 ‘선비’ 가 그렇게 대가 약해서가 되겠는가. 적어도 내가 아는 대구는 그렇게 점잖은 동네가 아니었는데 이 칼럼니스트는 왜 생판 어울리지 않는 자부심을 설파하려 하는가.

 

“6·25때 낙동강 전선의 보루였고 조국 근대화를 이끈 인재들을 다수 배출했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이 깊을수 밖에 없다. 그런 자존심과 자부심이 대구 사람들을 가볍게 행동하게 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더하여 대구는 원래 반역과 저항의 물결이 풍성하던 도시였다. 을미사변 이후 최초의 의병장 문석봉이 떴던 도시고, 나라가 망해 가던 시절에도 국채보상운동이 들불같이 일어났던 곳이며, 의열단의 군자금을 담당했던 이종암의 고향이며 저항시인이자 특수부대 훈련까지 받았던 문무겸비의 이육사의 터전이고,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며 일제 하 좌익 활동도 활발히 벌어지던 고장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백부 박상희의 이름을 꼭 들먹일 것까지도 없고 말이다. 대한민국이 소중한 것은 그 모든 역사를 받아안고 그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을 구현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즉 대구는 낙동강 전선과 조국 근대화의 테두리에 갇힐 도시가 아니고 그래서도 안된다. 왜 그 사랑하는 대구를 쥐방울 속에 가두어 흔들려 하는가. 이 웃기는 칼럼니스트는.

 

자 이제는 박장대소의 시간이다. “중국 혐오에 대해서는 갖은 인문주의적 수사를 동원해 방어막을 쳐 온 사람들이 신천지에 대해서는 마녀사냥을 주문하고 있다. 그래야 중국인 입국금지를 외면한 책임을 벗어날 수 있다. 저들이 하는 모양새를 보면 저러다 코로나19 진원지가 우한이 아니라 신천지(혹은 대구)라는 주장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이미 중국에선 우한이 진원지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국 현지 신천지 교인에 대한 단속이 진행중이다. 만에 하나 둘을 뒤섞어 무슨 괴이한 주장을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필히 한국에서 얻어간 아이디어일 것이다. 당부하는데 점잖은 대구사람들을 욕보이지 말라.”

중국 혐오든 신천지 혐오든 혐오는 안된다는 기본을 이 칼럼니스트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인 입국금지는 그저 절대선이고 그걸 하지 못한 것이 문제일 뿐, 당장 이 나라에서 대규모로 퍼진 코로나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깡그리 없다. 그저 이 정권이 미울 뿐이다. 그래서 중국이 진원지가 한국 신천지를 지목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중국을 욕하기보다는 “중국인들이 우리더러 뭐라 한 대요! 이건 문재인 정권 베껴 간 거래요.” 하면서 누군가를 지목할 태세가 돼 있을 뿐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 정권 때문임”을 광고하고 싶은 얄팍한 싸구려, 트럭으로 갖다 놔도 돈 백 원하고 안 바꿀 잡스런 선동을 이 ‘점잖은 선비’ 대구 사람들을 향해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아니 웃기는가. 손뼉을 치고 웃다가 손바닥이 다 얼얼할 지경이 아닌가.

 

이런 어이없는 내용으로 대구 시민들을 ‘선동’하려 드는 칼럼니스트의 용기에는 에누리 없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가뜩이나 힘겨운 싸움 치르고 있는 대구 경북 사람들을 이런 글로 욕 먹이고, 다른 사람들 보기에 민망하게 만드는 오만방자에는 직각으로 솟은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 수 밖에 없다. 명색 일간지에서 이런 칼럼을 보는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고 일상의 다반사일 수도 있겠으나 그 형편이 자심하고 차마 바라보는 것이 역겹도록 우스웠기에 이렇게 토를 달아 둔다. 대구 시민이건 서울 시민이건 광주 시민이건 강릉 시민이건 대한민국 사람들은 대개 감정적이고 기분파여서 선동에 약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런 무모하고 턱없는 선동에 넘어가지 않을 뿐. 대구 시민들 역시 그러하리라 믿는다. 바이러스는 기온이 올라가면 대개 수그러든다고 한다. 어서 따뜻해져서 코로나의 기세가 누그러지기를. 아울러 대구의 코로나 환자들을 받아 안기로 했다는 광주시와 시민 사회의 따뜻한 온기 앞에서 이 개그맨을 겸하는 칼럼니스트같은 이들이 쥐구멍 속으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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